선전은 ‘중국 속 유럽’…‘뉴 차이나’ 설계 鄧추모 줄이어

  • 입력 2008년 3월 3일 03시 00분


《질서정연하게 쭉 뻗은 8∼10차로 대로, 쓰레기 하나 없는 깔끔한 거리, 하늘을 찌를 듯 즐비하게 늘어선 빌딩과 곳곳에 널린 자연 숲 공원. 지난달 27, 28일 기자가 찾은 이곳은 유럽이나 북미의 선진국 도시가 아니다. 중국의 경제특구(經濟特區) 1호인 선전(深(수,천))이다. 30년에 걸친 중국의 개혁개방은 이 도시를 상전벽해(桑田碧海)와 같은 비약적 발전의 주무대로 탈바꿈시켰다. 1970년대 중반 인구 3만 명의 한적한 농어촌이었던 선전(당시 바오안·寶安 현)은 이제 1200만 명(유동인구 포함)이 북적이는 최첨단 도시로 급성장했다.》

31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선전의 대표적 어촌 뤄후(羅湖) 구 위민(漁民) 촌은 20∼30층짜리 아파트가 줄줄이 들어선 고급 주택가가 됐다. 불과 한 세대 전엔 조각배로 고기를 잡던 곳이라는 설명이 귀를 의심케 한다.

선전 시내의 곧게 뻗은 대로도 주변의 한자 간판과 중국 전통의 홍등이 아니라면 중국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자전거 천국’으로 불리는 중국이지만 선전 시내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선전의 금융 1번지’ 선난둥(深南東)로는 세계의 금융중심지인 미국 뉴욕 맨해튼의 월가를 방불케 한다. 이 거리에서 가장 높은 88층 높이의 오피스텔 빌딩 디왕다샤(地王大廈)는 선전의 미래를 상징하는 듯했다.

1980년 8월 26일 광둥(廣東) 성의 경제특구로 지정된 선전은 지난해까지 28년간 연평균 28%라는 기적적인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무역액은 매년 40%씩 늘었다. 지난해 중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458.6달러(잠정 추계)지만 선전은 1만 달러를 훌쩍 뛰어넘었다.

선전의 지난해 무역 총액은 2875억 달러로 한국 전체 무역액의 40%에 이른다. 5년 전 이미 한국 최대의 부산항을 제치고 세계 제4위의 항구로 부상한 선전의 지난해 물동량은 1억9919만 t이나 됐다.

선전의 눈부신 발전은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선전을 경제특구로 지정해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실험에 들어갔다. 외국자본에 법인세 혜택 등을 주어 외자를 대거 유치해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 1979년 1537만 달러에 불과했던 선전의 외자 유치액은 지난해 32억9000만 달러로 크게 늘었다.

덩샤오핑은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후 개방 노선이 흔들리자 1992년 1월 이른바 ‘남순강화(南巡講話)’의 코스로 다시 선전을 찾아 ‘중단 없는 개혁개방’에 전폭적으로 힘을 실어 주었다.

“매우 감사하죠. 감격스럽습니다.”

개혁개방 이전 고기를 잡아 겨우 생계를 유지했다는 위민 촌의 량모(65) 씨는 “덩샤오핑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마치 그가 앞에 서 있기라도 한 듯 허리를 연방 굽혔다.

덩샤오핑의 도시인 선전의 곳곳엔 그의 동상과 초상화가 그려진 입간판이 설치돼 있다. 리즈(L枝) 공원 앞의 가로 30.47m, 세로 10.35m의 초대형 초상화 입간판엔 매일 수천 명이 찾아 그를 추모한다.

1992년 1월 덩샤오핑이 직접 선전 시내를 내려다보며 개혁개방을 독려했던 국제무역센터 49층의 회전식 식당 ‘덩궁팅(鄧公廳)’은 기본 음식값이 5800위안(약 77만 원)이지만 덩샤오핑을 기리려는 예약 손님들로 줄을 잇는다.

선전=하종대 특파원 orion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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