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손’ 개도국, 세계자본시장 호령

  • 입력 2007년 10월 12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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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머니 중동국가들 선진국 증시-기업 인수전

외환 넘치는 中도 공격적 투자… 자본권력 이동

지난달 두바이 증권거래소는 뉴욕 증권거래소와 함께 미국 양대 증권거래소로 꼽히는 나스닥의 지분 20%를 인수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질세라 카타르 투자청은 같은 날 런던 증권거래소 지분 20%를 사들였다고 발표했다.

대만 PC업체인 에이서도 지난달 미국의 대표적인 PC업체인 게이트웨이를 접수해 세계 PC시장에서 3위로 올라섰다. 인도의 타타그룹은 포드자동차의 재규어 및 랜드로버 브랜드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

자본의 ‘권력 이동’이 본격화되고 있다. 그동안 전 세계 자본시장의 질서는 선진국이 좌지우지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선진국 자본의 먹잇감이었던 개발도상국 자본이 오히려 선진국 기업과 자산을 정면 공략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인 딜로직에 따르면 올해 들어 개발도상국 자본이 인수한 선진국 기업들의 자산은 1280억 달러로, 2003년 140억 달러의 9배에 이른다. 같은 기간 선진국 자본이 인수한 개도국 기업 자산 1300억 달러와 큰 차가 없는 수치다.

이 같은 자본 권력 이동의 물꼬는 고유가 행진으로 외환보유액이 크게 늘어난 중동 국가들의 오일달러가 텄다.

매킨지에 따르면 2006년 말 기준으로 오일 달러는 3조8000억 달러로 추산된다. 그동안 인수합병(M&A) 시장을 주도해 온 헤지펀드와 사모(私募)펀드의 자금 규모가 각각 1조5000억 달러와 7000억 달러인 점을 감안하면 천문학적 규모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카타르 등 정부가 직접 조성한 국부(國富)펀드(Sovereign Wealth Fund)는 최근 공격적인 투자로 국제 자본시장에서 큰손으로 등장했다.

카타르 투자청은 올 7월 218억 달러를 들여 영국의 제3위 유통업체인 세인즈베리를 인수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아부다비 국영투자기관도 지난달 미국 유수의 사모펀드 칼라일그룹의 지분 7.5%를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세계 최대 외환보유국인 중국의 행보도 심상치 않다. 중국의 보유 외환을 관리 운용할 중국투자공사(CIC)가 지난달 자본금 2000억 달러로 정식 출범했다. 그동안 수익률은 낮지만 안정적인 미국 정부 채권을 주로 사오던 중국의 투자전략에도 변화가 예상되고 있다.

특히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이 불러온 신용경색도 개도국 자본에는 호기로 작용하고 있다.

주로 차입에 의존한 M&A를 주도해 온 사모펀드들은 신용경색으로 발목이 묶인 상태다. 반면 개도국 자본은 신용위기 등 시장 상황에 큰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자금이 꾸준히 늘고 있다.

자본시장 주도권이 바뀌면서 새로운 형태의 보호주의도 나타나고 있다. 그동안 국경을 넘어선 자본의 이동을 주창해 오던 선진국에서 ‘자본의 국적’을 문제 삼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미국 정치권이 미국 항만운영권을 사들인 두바이포트월드에 압력을 넣어 이를 되팔게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독일은 프랑스와 공동으로 개도국 국부펀드의 기업 인수와 관련해 유럽연합(EU) 차원에서 통합된 규제방안을 마련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그러나 이처럼 역류하고 있는 자본의 거센 흐름을 바꾸기는 힘들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블랙스톤이나 칼라일 같은 미국을 대표하는 사모펀드가 개도국으로부터 자본을 수혈하는 것 자체가 점점 가시화되는 자본의 권력 이동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뉴욕=공종식 특파원 k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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