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아지는 체니…美언론 “비밀감옥등 파문 라이스에 밀려”

  • 입력 2006년 9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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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6월 말. 딕 체니 부통령은 일과를 마치고 휴식 중이던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불쑥 찾아갔다. 그는 부시 대통령에게 당시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리고 있던 제3차 6자회담(6월 23~26일)의 미국 대표단이 서명하려는 합의문에 문제가 있으므로 이를 번복하는 긴급 훈령을 내려야 한다고 요청했다.

당시 미국 대표단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경제 지원과 안전보장을 약속해 줄 수 있다는 방침이었으나 체니 부통령은 북한이 먼저 핵을 완전히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 시간 콜린 파월 국무장관과 리처드 아미티지 부장관은 연회에 참석중이어서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러자 체니 부통령은 국가안보위원회(NSC)를 통해 막바로 협상단에 지침을 내려보내도록 했다

체니 부통령이 얼마나 막강하고 구체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다. 그러나 요즘 '미국 역사상 최고 실세 부통령'으로 불려 온 그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있다는 조짐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지난주 부시 대통령이 중앙정보국(CIA) 비밀 감옥의 존재를 시인하면서 이곳에 있던 14명의 수감자를 국방부로 이감시키자 미국 주요 언론들은 일제히 "2년을 끌어온 백악관 내 '체니 VS 라이스(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노선 논쟁'에서 라이스 노선이 승리를 거둔 것"이라고 보도했다. "테러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위해선 대통령과 대테러 전담 기관들에게 특단의 권력이 주어져야 한다"는 체니 부통령의 인식과 "합법적 절차와 인권, 세계여론을 너무 무시해선 안된다"는 라이스 장관의 노선 사이의 논쟁에서 결국 후자가 승리했다는 것.

물론 체니 부통령의 옹호자들은 최근 이스라엘과 레바논 무장세력인 헤즈볼라간 분쟁 당시 이스라엘이 헤즈볼라에 결정타를 날릴 시간을 줘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 사람이 체니 부통령이었음을 강조하면서 여전히 그의 영향력은 막강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조차도 그의 영향력이 2003~2004년 절정기를 고비로 쇠락하고 있다는데는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부시 대통령은 체니 부통령에게 의존하던 정보망을 다각화했으며, 제임스 베이커 전 국무장관과 같은 외부인사 그룹의 조언을 많이 듣고 있다는 것. 또 안보문제에서 의회 지도부를 설득하는 역할도 체니 부통령 대신 덜 이념적이고 법률전문가인 스티븐 해들리 안보보좌관에게 맡기고 있다는 것.

체니 부통령이 침공을 강력히 주장했던 이라크전쟁의 난맥상, 아부그라이브 수용소 인권실태 폭로, 체니 부통령의 눈과 귀 역할을 했던 루이스 리비 부통령 비서실장이 '리크 게이트'에 연루돼 사퇴한 것, 포로 인권 관련 법안을 둘러싼 존 매케인 상원의원 등 공화당내 실력자들과의 관계 악화, 테러 용의자들의 법적권리를 옹호한 대법원 판결 등이 체니 부통령의 영향력을 감소시킨 원인들로 꼽힌다.

게다가 체니 부통령을 정점으로 막강하게 포진했던 네오콘(신보수주의) 그룹의 핵심들이 대부분 비핵심 라인으로 이동했다(그래픽 참조). 체니 부통령 자신은 네오콘으로 분류하기 어렵지만, 그는 네오콘 인맥을 직접 챙기고 후원해주는 정점에 있었고, 1기 파월 국무부와의 갈등 등 주요 이념투쟁에서 네오콘 전략가들은 체니의 오른팔이었다.

그러나 대북 정책에 있어선 체니 부통령의 영향력이 여전히 막강하다는 관측이 많다. 특히 대북 금융제재의 성과가 체니 부통령이 한반도 문제에 여전히 힘을 갖는 '언덕'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7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 직후 옛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고위 관리들까지 대북 선제공격론을 들고 나왔지만 체니 부통령이 이를 일축한 것도 금융제재를 통해 '북한 목죄기'가 성공하고 있으므로 굳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은 군사적 선택을 운운할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의 결과라는 해석이다.

한편 체니 부통령은 10일 미 NBC방송 '언론과의 만남' 프로에 출연, "이라크에서의 저항이 이처럼 오래갈 줄 몰랐다"며 일부 실책을 자인하면서도 영장 없는 구금제도 등 기존 정책을 옹호했다.

그는 사담 후세인 정권과 알 카에다 조직과의 연관성이 전혀 없었다는 민주당측 공세와 관련, "비록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를 발견하지 못했고 두 세력간 연관성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라크전 개전 당시 최선의 정보를 활용했었다"며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킴으로써 세상은 훨씬 나아졌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당시 CIA가 부시 대통령과 당신에게 이라크는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보고했더라도 이라크를 공격했겠느냐"는 질문에 "그렇다"면서 "이라크는 WMD를 확보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유엔 제재가 완화됐더라면 실제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체니 부통령은 자신이 2005년 5월에 말했던 것처럼 이라크 저항세력이 '마지막 발악' 단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시인하면서 "우리는 이라크내 저항이 이렇게 오래갈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워싱턴=이기홍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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