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 보았던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이라는 영화도 그랬다. 이야기의 기둥은 독일군 점령 하에서 독일 병사와 사랑을 한 죄로 집단 린치를 당한 프랑스 여인이 몇 십 년 후 히로시마에서 일본 남자와 만나 서로의 거울이 되어 상처를 확인하는 내용이다. 부역에 대한 집단 린치나 히로시마 원폭 투하가 서구사회의 집단 무의식 속에 죄의식으로 깊이 박혀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지만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내게는 일본이 가해자로 단단히 내면화돼 있었기에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시가 주체가 돼 지난 20여 년간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를 상대로 ‘원폭과 전쟁’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여 왔고 2020년까지 모든 원폭을 제거하자는 평화운동을 벌이면서 지지 세력을 폭넓게 규합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원폭 피해자가 앞세우고 있는 그 같은 평화의 메시지를 누가 거부할 수 있겠는가?
▷이런 운동을 통해 일본은 스스로를 식민 가해자가 아닌 끔찍한 전쟁 피해자로 이미지를 굳히는 데 성공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기에 종전(終戰) 60주년을 맞아 일왕 자신이 사이판에서 일본 전몰장병을 추모하는 행사를 전 세계의 주목을 끌며 당당히 벌이겠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국과 중국은 자기중심으로만 문제를 보고 접근한 탓으로 일본과의 역사 전쟁에서도 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박명진 객원논설위원 ·서울대 교수·언론학 mjinpark@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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