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파트와 팔레스타인

  • 입력 2004년 11월 16일 11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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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세르 아라파트의 본명은 무하마드 압둘라 우프 알쿠드와 알후세이니(Muhammad Abd al-Ra uf al-Qudwash al-Husayni)이다. 그는 부유한 팔레스타인 상인의 일곱 자녀중 하나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와 출생일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카이로에서 발행된 출생 증명에 따르면, 그는 카이로에서 1929년 8월24일에 태어났다. 그러나 아라파트 자신은 예루살렘에서 1929년 8월4일 태어났다고 말하곤 했다.

어쨌든 그는 비교적 유복한 환경 속에서 유년시절을 카이로와 예루살렘에서 보냈으며 1947년 유엔의 팔레스타인 분할 안으로 촉발된 유대인들과의 전투에서는 외가 쪽 친척이자 저명한 율법학자인 아민 알 후세이니의 휘하에서 싸웠다.

1948년 제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건국된 후 아라파트는 조국 팔레스타인 땅을 등지고 피난길에 올라 카이로에 정착했으며, 그곳 카이로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했다. 1952년 아라파트는 무슬림 형제단과 팔레스타인 저항운동에 가입하고 팔레스타인 학생연합의 의장을 맡으며 팔레스타인 저항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그 후 수많은 암살 위협 속에 그의 신상과 생활은 철저히 가려져 왔다. 따라서 그에 대한 업적과 평가를 내리기 위해서는 그가 가담한 단체를 통해 활약상을 알아보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1953년 아라파트는 카이로 대학 졸업 후 곧 바로 사회에 진출하지 않고 팔레스타인 학생운동에 관여하다가 1955년 이집트 군장교로 임관되었으며 1956년 제2차 아랍-이스라엘 전쟁 (일명 수에즈 전쟁)에 참전했다. 수에즈 전쟁 후 아라파트는 쿠웨이트로 이주해 그곳 관청의 토목기사로 일했으며 한때 자신의 건설 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 파타라는 비밀 조직 결성▼

1958년 아라파트는 쿠웨이트에서 살라흐 할라프와 할릴 와지르 등과 함께 공동대표로 파타(Fatah)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함으로써, 평생의 정치적 기반이자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의 중추세력을 확보했다. 그는 대학동창들과 함께 1959년 베이루트에서 <우리 팔레스타인>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며, 요르단 시라아 레바논 등지의 난민 캠프에 파타의 비밀 하부조직을 넓혀나갔다.

파타는 1963년이 되어서야 비로써 알제리 혁명정부로부터 알제시에 군사훈련 시설을 제공받아 조직원을 훈련시킬 수 있었다. 1964년 초 아랍 정상 회담 후 아랍연맹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창설할 때까지 파타는 지하운동에 머물러 있었다.

1964년 바트당이 집권하고 있던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아라파트를 비롯한 파타지도자들은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게릴라 활동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그 첫 작전으로 1965년 1월1일 요르단 강 서안에 있는 송수관을 폭파시켰다. 이때 까지만 해도 파타의 조직원은 단 200명에 불과했다.

1967년 제3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일명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 지구를 빼앗기자 팔레스타인 민족평의회(PNC)를 이끌어 오던 아흐마드 슈카이리 의장의 입지가 현저히 약화되었다. 그러나 아라파트가 이끄는 파타의 특공대 조직 아시파('폭풍'이라는 뜻의 아랍어)는 450명의 조직원으로 이스라엘 군 1만 5,000명을 국경도시 카라메 전투에서 대파, 조직원 수를 일거에 1만 5,000명으로 키워 PLO 내에서 가장 큰 세력으로 부상했다.

이와 동시에 파타는 영국이 위임 통치하던 모든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과 무슬림, 기독교도 모두에게 평등한 민주국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다. 4개월 후 아라파트는 카이로에서 개최된 PNC 5차 대회에서 PLO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아라파트는 의장에 취임하자 "팔레스타인인들이 유엔의 구호물자를 타기위해 줄을 서있는 한 세계는 PLO를 존경하지 않는다"며 PLO를 무장 조직으로 전환시켰다.

1970년 요르단 암만에 근거지를 둔 파타는 조직원 수가 4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이때부터 파타의 지도부는 서서히 좌, 우익으로 갈라져 아라파트는 이들을 중재하는 역할을 해야만 했다. 아라파트는 이 과정에서 2가지 입장을 고수했다. 첫째는 어떤 아랍 정권이라도 단독으로 PLO를 흡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팔레스타인 해방과 관련된 모든 사회적, 정치적 이념을 수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파타는 1970년 요르단 후세인 왕 폐위기도 사건에서 주로 좌익세력과 연루되어 요르단 군대와 전투를 벌인 끝에 패해, PLO와 아라파트는 근거지를 레바논으로 옮겨야 했다. 이 사건으로 파타는 좌경화 되었으며 PlO는 1972년 레바논 베이루트에 새로운 근거지를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2년 9월5일 독일 뮌헨 올림픽 선수촌에서 파타 내의 비밀 게릴라 단체인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들에 대해 테러를 가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6,000명의 보도기자가 운집한 지구촌 축제 현장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고통 받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세계인에게 환기시켰으며 동시에 PLO가 과격 테러 단체라는 인상을 각인시켰다.

그러나 1974년 10월에 열린 아랍 정상회담은 PLO를 팔레스타인 민족의 유일 합법적인 대표로 인정함으로써 아라파트의 지위는 한층 격상되었다. 아라파트는 또 그해 11월 비정부 기구의 대표로 유엔총회에 참석, "나는 항상 권총과 올리브 나뭇가지를 함께 지니고 다닌다"는 비장한 요지의 연설을 함으로써 세계무대에서 PLO의 존재를 과시했다. 이 후에도 아라파트는 공산권 국가를 순방하는 등 외교적 역량을 드높였다.

1975년 4월에 시작된 레바논 전쟁에서 아라파트와 다른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은 죄파 레바논 민족운동 편에 가담했다. 그 후에도 파타가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무장 투쟁을 강화하자 1982년 6월 이스라엘은 레바논 베이루트를 포위 공격, 아라파트는 PLO 지도부를 튀니지로 옮기고 PLO 전사들을 여러 아랍국으로 분산시켰다.

이 때에도 아라파트는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키는 정치력을 발휘했다. 실용주의 노선을 채택해 다시 국제사회의 여론을 팔레스타인 쪽으로 돌려놓으며 재기에 성공한다. 즉 가자 지구 등에서 주민 봉기 운동(인티파다)을 벌이며 주민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장갑차에 맞서 돌맹이로 항거하도록 했다. 이런 모습은 지구촌으로 하여금 팔레스타인에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케 했으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스라엘에 화해노선을 제안했다.

1988년 11월 팔레스타인 의회격인 PNC는 알제리의 알제에서 가자 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 그리고 동 예루살렘으로 구성되는 팔레스타인 국가를 선포했다. 그해 12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는 새로이 선포한 팔레스타인 국가가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를 포기하고가 평화공존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총 대신 올리브 나뭇가지를 높이든 것이었다.

미국은 국제사회의 여론에 밀려 이틀이 지나지 않아 PLO와 직접 대화를 제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9년 4월 PNC는 아라파트를 팔레스타인 국가수반으로 선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 군사시설에 대해 공격을 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미국은 PLO와 대화를 중단했다.

한편 구소련과 동구권이 붕괴된 후 소련 등지에서 살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에 들어오는 이민자의 수가 급격히 증가되었다. 걸프전이 발발하자 아라파트를 따르던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은 그의 온건노선에 의존하지 않고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지지함으로써 아라파트로 하여금 부득불 사담 후세인과 제휴하게 만들었다. 이는 아라파트를 부유한 걸프 연안국의 통치자들과 사이가 멀어지게 만들어 이들의 PLO에 대한 지원이 중단되기도 했다.

▼ 이스라엘과 평화협정 체결▼

1992년 2월 걸프전에서 이라크가 패하고 측근들이 계속 암살당하자 아라파트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과감하게 이스라엘과 비밀협상을 벌였다. PLO가 이스라엘의 평화제의를 받아들인 것은 PLO의 재정난이 가장 큰 이유였다. 1991년 8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때 아라파트와 PLO가 사담 후세인을 지지하자 아랍 부국들이 재정지원을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구소련과 동구권이 붕괴됨으로써 동서대립에서 얻을 수 있는 어부지리(漁父之利)가 없어진 것, 그리고 아랍 세계 자체 내에서 이슬람 원리주의와 세속주의, 진보와 보수 세력 간에 대립이 심해져 PLO가 전통적으로 받아오던 폭 넓은 지지기반을 잃게 된 것 등이 그 배경이 되었다.

1993년 9월 맺은 오슬로 평화협정은 '평화를 위한 영토반환'으로 이스라엘 점령지에서 팔레스타인 자치권을 부여하는 첫 단계로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의 예리코에서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이 협정에 따라 아라파트는 1994년 7월 자치정부 수반으로서 가자지구로 돌아가면서 "나는 지금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다"말해 베이루트를 떠나면서 했던 약속을 지켰다.

이러한 평화에 대한 노력으로 아라파트는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 시몬 이스라엘 외무장관과 함께 1994US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리고 1995년 9월에는 요르단 강 서안에 대한 자치협정에도 서명했다.

아라파트가 평화협정에 서명한 것은 그가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약했기 때문이다. 그가 약속한 평화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지금까지 점령지의 경제는 완전히 이스라엘에 의존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 본토로 출퇴근하며 품을 팔아 겨우 연명했다. 국제적으로 지지를 얻지 않고는 존립의 기반을 다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평화와 테러, 올리브 나뭇가지와 권총의 이미지를 한 몸에 담고, 중동 역사의 한 가운데서 처절한 몸부림을 치던 아라파트는 그 파란 만장한 삶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그의 지도력은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이다. 팔레스타인 역사에서 그가 차지한 역할이 너무나 커서 그가 남긴 공백을 메우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이 이 만큼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는 그의 공적이 절대적이었음을 어느 누가 부인 할 수 있겠는가.

연국희기자 ykookh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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