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각서로 본 진상]이승만대통령 하야 '美 압력設'근거없다

  • 입력 2000년 11월 23일 18시 51분


최근 세상을 떠난 월터 매카나기 전 주한미국대사의 부음 기사

내용이 국내 학계에서 새로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동아일보는 15일자(A23면)에서 4·19 때 이승만대통령이 매카나기 당시 대사의 방문을 받기에 앞서 하야를 결심해 주위에 알렸다고 보도한 반면 일부 신문은 매카나기 대사의 압력으로 이대통령이 하야했다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4·19 직후인 21일 양유찬 주미한국대사와

매카나기대사를 통해 이대통령에게 전한 외교각서를 보면 이 논란의 진상을 알 수 있다.

◇부정선거 책임자 해임등 수용 안하면 원조중단 통고 '하야' 직접 언급 없어◇

이 문서에 따르면 미국의 요구는 △3·15부정선거를 철저히 조사해 책임자를 해임할 것 △여야 특별공동위원회를 구성해 앞으로는 부정선거가 사실상 불가능하도록 선거법을 고칠 것 △1959년 강제로 폐간시킨 경향신문을 복간시킬 것 △1958년 12월24일 불법적으로 통과시킨 국가보안법의 문제조항들을 폐지할 것 △헌법 규정대로 참의원을 선출해 양원제를 운영할 것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완전한 민주적 과정으로의 복귀를 보장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정부의 담화를 즉각 발표할 것 등 여섯 가지다.

미국은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아이젠하워대통령의 방한 취소 △한국의 유엔가입 지원 중단 △경제원조 중단 △한국군에 대한 무기 공급 중단 △주한 미군 전면 철수 등을 강행할 것이라고 통고했다.

또한 미국 정부는 한국의 시위 참가자들에게 미국 정부가 그들을 후원하고 있음을 널리 알리도록 했다.

매카나기대사는 한국 외무부를 거치지 않고 이대통령을 만나 미국 정부의 뜻을 전달하면서 당시 주한 미군 사령관인 카터 매그루더 대장을 동반했는데, 이는 미국 정부의 요구가 외교적인 것일 뿐 아니라 군사적 의미도 담겨 있음을 알리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미국 정부의 이런 행동은 ‘노골적 내정간섭’이었고, 현대 외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19세기적 ‘협박 외교’였다. 그런데 이대통령은 말없이 듣기만 했고 하야 후에도 당시 미국 정부가 가한 압력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미국 정부의 압력이 이대통령의 하야 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미국 정부의 요구에는 이 대통령의 하야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부분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은 이대통령의 오랜 협력자였던 정한경박사의 유고로 최근 출간된 ‘1943년부터 1960년까지의 전쟁과 평화를 통한 한국과 미국’(연세대출판부)에도 나와 있다. 미국 와이오밍대 김귀영교수도 ‘이승만의 몰락’(1983)에서 사료를 두루 분석한 뒤 이대통령이 미국 대사의 압력으로 하야했다는 기록을 남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매카나기대사의 마지막 방문에 앞서 하야를 결심해 주변에 알린 뒤 매카나기대사를 접견했다고 단언한 바 있다.

<김형찬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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