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집중분석] 회상 상상없는 ‘알찬’드라마 어디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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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10일 17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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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재방송인가?"
"현준(이병헌 분)과 최승희(김태희 분)의 사랑이 이제 안타깝기보다는 지루하다."

드라마 '아이리스'에서 남녀 주인공이 일본 아키타 현으로 비밀 여행을 떠났던 장면이 반복 등장하자 일부 시청자들은 각종 게시판에 비난을 쏟아냈다. 이 장면은 3회에 처음 등장한 이후 17회분까지 최소 4번 이상 재편집돼 방영됐다. 보다 못한 시청자들이 "이번에도 회상신으로 방송 분량을 채울 것이냐"고 지적하고 나섰다. 첩보물이라는 특성상 드라마가 긴박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두 사람이 시시때때로 추억에 잠기다보니 드라마 몰입에 방해가 된다는 것.

사실 연작 드라마가 중후반에 들어서면서 회상이나 상상 장면이 부쩍 늘어나는 것은 비단 아이리스에서만 보는 일은 아니다.

‘아이리스’는 3회 방송한 김현준-최승희의 일본 여행 장면을 재편집해 4번 이상 우려먹어 비난을 받았다.
‘아이리스’는 3회 방송한 김현준-최승희의 일본 여행 장면을 재편집해 4번 이상 우려먹어 비난을 받았다.


방송사고 아니야? 지난번에 나온 내용인데…

주 2회, 회당 한 시간짜리 드라마 편성 방식이 고착화된 한국적 현실에서 회상 장면은 어떤 의미에서는 필수요소다. 시청자들은 회상 장면을 보면서 등장인물의 감정선을 기억해내고 스토리를 이해한다. 문제는 적정선이 어디까지냐다. 도를 넘은 회상신은 드라마의 지지부진한 전개로 이어져 시청자들이 떠나게 하는 요인이 된다.

이런 사례로는 2006년 최고의 화제작으로 꼽히는 '주몽'이 대표적이다. '주몽'은 드라마 중반 이후 한동안 '해모수장군 회상기념방송'이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12회에 죽음을 맞으며 퇴장한 해모수(허준호 분)가 이후 지나치게 자주 등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주인공인 금와(전광렬 분)가 해모수에 대한 애정과 미안함을 간직한 채 살고 있고 주몽(송일국 분)이 뒤늦게야 해모수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았다는 정황 등이 있기는 했다.

그렇다 해도 이같은 회상신은 드라마 중반 이후 갑자기 집중적으로 등장, 드라마 분량을 채우기 위한 '땜빵' 처리 아니냐는 비난으로 이어졌다. 실례로 주몽에서도 연장방송이 결정된 뒤 스토리를 급박하게 전개하게 되자 해모수 회상장면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대개 드라마 중반 이후에 회상 장면이 급증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우선 사전 제작하는 경우가 드문 우리나라 드라마 제작 현실 탓이다. 드라마가 후반부에 치달을수록 방송 분량을 맞추기가 버거워지는 건 당연지사다. 당시 주몽 제작진은 잦은 회상 장면에 대해 비난이 쏟아지자 "긴 장마 때문에 촬영이 지연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때문에 회상신이 늘어난 것은 아니다"는 애매모호한 설명을 늘어놓은 바 있다.

‘주몽’은 방송 초반인 12회에 퇴장한 해모수를 회상하는 장면을 지나치게 자주 삽입해 '해모수장군 회상기념회'냐는 빈축을 사기도 했다.
‘주몽’은 방송 초반인 12회에 퇴장한 해모수를 회상하는 장면을 지나치게 자주 삽입해 '해모수장군 회상기념회'냐는 빈축을 사기도 했다.


다른 하나는 제작비를 아끼기 위한 방편이라는 점이다. 회상 길이만큼 촬영 분량을 줄일 수 있는 데다 간접광고(PPL) 효과도 극대화할 수도 있다. '아이리스'에서 김현준과 최승희가 비밀 여행을 즐긴 일본 아키타현은 그후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아키타 현 측이 '아이리스'의 경제효과가 2억 엔 정도 된다고 발표했을 정도다. 회상신이 자주 등장할수록 아키타 현의 광고 효과도 배가 되는 셈이다. 비슷한 사례는 올 초 방영된 '꽃보다 남자'에서도 찾을 수 있다. '꽃남'은 남태평양 뉴칼레도니아에서 촬영한 관광 장면을 드라마 초반부에 방송한데 이어 중후반부에 회상 장면으로 다시 넣어 뉴칼레도니아 관광청을 흡족하게 했다.

상상으로 재미를 더했다? 대국민 낚시질!

회상 장면이 드라마 분량을 채우려는 '시간 때우기'용이라면 상상하거나 꿈을 꾸는 장면은 소재가 고갈됐을 때 등장하는 대표적인 수법이다.

40살 허순애(심혜진)의 영혼이 남편 윤일석(윤다훈 분)과 바람을 피우던 28살 한초은(박진희)의 영혼과 갑자기 뒤바뀌는 이야기를 다룬 2006년 드라마 '돌아와요 순애씨'는 거의 한회분을 '꿈'으로 채워넣어 시청자들의 빈축을 샀다.

2006년 방송된 ‘돌아와요 순애씨’는 한 회 방송 중 45분을 주인공의 꿈으로 설정해 ‘시청자를 우롱하는 행위’라는 비난을 받았다. ‘꿈’ 장면 중 일부.
2006년 방송된 ‘돌아와요 순애씨’는 한 회 방송 중 45분을 주인공의 꿈으로 설정해 ‘시청자를 우롱하는 행위’라는 비난을 받았다. ‘꿈’ 장면 중 일부.


드라마 중반부에서 초은이 야구공에 맞아 정신을 잃은 뒤 순애가 자신의 몸을 되찾아 남편과 초은에게 통쾌한 복수극을 벌이는 스토리가 45분이나 전개되다가 초은이 잠에서 깨어나 이 모든 게 꿈이었이 밝혀지는 것. 당시 시청자 게시판에는 "이런 식의 시간 때우기는 시청자를 낚는 것"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드라마 비평가 신주진 씨는 "상상 장면은 시청자들에게 다른 재미를 주거나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기대하게 하는 소재로 쓰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최근 종영된 '미남이시네요'가 기발한 패러디와 상상신으로 호평을 받은 게 좋은 사례. 그러나 "시청자를 '낚으려' 무리하게 상상장면을 끼워넣는 경우 시청자들이 다 눈치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결국 관건은 원작의 스토리라고 드라마 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지적한다. 그는 "아이리스가 중반 이후 과도한 회상 신으로 추동력을 잃은 이유는 스토리보다는 보여주기에만 치중한 결과"라고 지적한다. "인물 각각의 스토리를 유기적으로 풀어내지 못하며 생긴 구멍을 남녀 주인공의 러브신으로 메웠다"는 것.

윤교수는 나아가 "이런 문제는 '아이리스'만이 아니라 선덕여왕 등 대부분의 대작 드라마에서 늘 눈에 띈다"고 지적하고 "처음부터 규모에 맞는 스토리만 충분히 준비한다면 이런 문제는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아연 기자ay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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