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과 캐주얼 사이 여유담은 ‘자유선언’

  • 입력 2008년 4월 28일 08시 24분


내가 대학 신입생이 되어 제일 처음 찾아 낸 것은 미팅이나 생맥주가 아닌 네이비 블레이저였다. 고등학교 졸업식에 입었던 신입사원도 안 입을 듯한 묵직한 수트나, 어디 있는지도 몰랐던 UCLA ‘대학티’는 이름도 어엿한 신입생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학구적이지만 따분하지 않고 자유스럽게 보이는 옷, 갑작스런 미팅에도 머뭇거리지 않을 수 있는 옷이 바로 네이비 블레이저였다. 그렇게 산 반도패션의 더블 브레스트 블레이저를 어두운 데님 팬츠, 하얀 옥스퍼드 셔츠, 갈색 로퍼과 함께 대학 내내 마르고 닳도록 잘도 입고 다녔다.

블레이저는 캠브리지 대학 보트 클럽의 ‘타는 듯한’ 빨간 재킷에서 유래했다. ‘반짝거리는’ 금색 버튼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는 이 재킷은 탄생 이후 온통 한 벌의 수트 뿐이던 세상에 다양한 표정을 만들었다. 물론 수트도 셔츠, 타이, 그리고 포켓 스퀘어 등의 조합으로 풍부한 스타일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아무래도 그 표현의 폭에서 블레이저에 미치지는 못한다.

블레이저를 흔히 ‘콤비’로 불리는 세퍼레이트 재킷으로만 생각하는 데 문제가 발생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 순간 블레이저는 ‘기지’ 바지에 받쳐 입어야하는 수트 재킷의 한 종류가 되기 때문에 어색한 수트 패션이 되고 만다. 수트는 무겁고 , 점퍼는 아니고, 카디건 보다는 묵직해야 할 때 그 해답이 바로 블레이저다.

블레이저를 점퍼처럼, 카디건처럼 입는다면 어느 자리에서도 적어도 스타일이 너무 무겁다거나 가볍다는 평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다. 블레이저 하나가 일상에 가벼운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예는 많다. 어두운 색의 블레이저는 너무 캐주얼하게 보이고 싶지 않을 때 제격이다. 어두운 블레이저와 회색 바지, 그리고 짙은 색의 넥타이라면 사무실에서 오페라 극장까지 어디든 자신감 있게 다닐 수 있다.

주말 아내의 갑작스런 마트 도우미 요청에는 진과 블레이저로 대처하자. 슬리퍼와 운동복 대신 블레이저와 진을 선택한 대가로 아내로부터 원하던 자동차 용품을 사도 좋다는 허락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주말이나 휴가 중이라면 연한 하늘색 코튼 블레이저. 하얀 피케 셔츠, 린넨 포켓스퀘어라면 ‘리플리’(영화 ‘태양은 가득히’주인공)처럼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이렇게 쓰임이 많은 블레이저를 잘 입어내기 위해선 꼭 알아두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절대로 수트처럼 입어서는 안 된다는 것. 블레이저의 ‘여유’라는 본질을 잘 살리기 위해선 수트처럼 어깨에 힘을 주어선 안 된다. 그 보다는 카디건과 점퍼와 같은 느낌으로 입어야 한다. 그냥 셔츠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할 때 슬쩍 걸쳐 입는 느낌으로 입어야 본래의 맛을 잘 살릴 수 있다. 힘을 주어 입은 블레이저는 결혼식에 갈 때만 수트를 차려입는 사람처럼 어색해 보인다. 백발의 신사가 블레이저를 더 멋지게 입을 수 있는 이유는 인생의 다양한 경험과 그로부터 나온 여유 때문이 아닐까.

한 승 호

아버지께 남자를 배우고 아들에게 그런 아버지가 되고 싶은 수트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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