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윤재]영화 ‘한반도’의 외침

  • 입력 2006년 8월 9일 03시 03분


코멘트
“영화 한 편이 논문보다 나은 것 같다.” 극장을 나서며 아내가 한마디 했다. 나도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시했다. 당초에 나는 ‘한반도’란 말이 ‘조선반도’와 함께 대한민국이란 국가의 존재를 은근히 무시하려는 의도가 담긴 용어라고 생각해 영화 ‘한반도’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한반도’는, 물론 돈벌이용으로 제작된 영화지만,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제국 말기의 비극이 되풀이되어선 안 된다는 시대적 과제를 다룬 정치영화였다.

영화의 이야기 전개에 무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국새를 화두로 한 흥미로운 상상력, 그것을 통한 문제 제기, 그리고 세련된 구성이 돋보여 영화를 보는 즐거움은 열대야의 시간 때우기 이상이었다. 1905년 11월 18일의 을사늑약과 그 후의 대일(對日) 외교문서들은 고종황제의 비준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이어서 법적 성립 요건이 미비했다. 설령 일부 일본인이 주장하듯 성립되었다 하더라도, 2만 명이 훨씬 넘게 동원된 일본군대의 협박 속에서 강제된 것이기 때문에 효력 요건도 불비한 것임은 이미 학문적으로 충분히 논증된 바 있다.

내가 보기로 영화 ‘한반도’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 ‘정신’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임을 정당화하는 각종 현실주의와 그것에 따른 정책 및 보이지 않는 ‘음모’ 속에서 주변인으로 몰렸던 국사학자(조재현)의 고군분투, 마침내 진짜 국새를 찾아 일본으로 하여금 기존의 대한(對韓) 정책을 수정하고 과거사를 사과하게 하는 그의 성취, 총리(문성근) 같은 파워엘리트들의 교묘한 뭉개기 술수를 뚫고 자주의 역사의식으로 국정을 주도했던 대통령(안성기)과 그를 따랐던 관리들의 자세, 그리고 일본의 30%밖에 안 되는 전력으로 일본의 무력침략에 결연히 맞서는 해군제독(독고영재)의 결심과 복종.

이 모든 내용은 그동안 우리가 잊고 있던 ‘정신’의 현실적 중요성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정신 차림’이 결코 군인들만의 구호가 아님을 전하고 있다. 장 자크 루소는 “국가는 구성원들의 단결 속에서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정신적 인격체”라고 말했다. 국가란 보이지 않는 주권의식을 바탕으로 한 ‘시민들’의 공고한 결합이 영토와 같은 가시적 요건들보다 우선해야 존립할 수 있음을 강조한 말이다. 이러한 ‘정신 차림’은 정열(passion)과 의기(義氣)를 추동하여 국가 형성과 유지에 필수적인 공동 행동을 가능케 한다. 이 건강한 에너지들이 때로는 차분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표출되면서 ‘시민’ 중심의 근대국가가 만들어지고 이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대통령을 통해 부분적으로나마 개혁 리더십의 바람직한 모습을 그려 보이고 있다. 아마도 감독과 그의 동료들은 한국 현대정치사에 대한 나름대로의 문제의식을 공유한 사람들일 것이다. 추측건대 이들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일단은 기대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그게 아닌데’ 하는 아쉬움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무척 많은 토론을 했을 법하다. 그러고는 그들이 기대했던 바를 그대로 영화에 쏟아 넣은 것 같다. 우선 최고지도자는 공개토론에서 학술논쟁에서와는 달리, 방향과 원칙을 명료하게 제시하는 것이 중요함을 부각시키고 있다. 영화 속에서 국새 찾기를 방해하려던 중앙정보부 서기관(차인표)이 ‘국새의 존재 유무를 확인 운운’ 하자 대통령은 즉시 “내가 진짜 국새를 찾으라고 지시한 것을 잊었는가” 하면서 소임을 이행할 것을 재차 짧게 지시하고 자리를 떴다. 또 혁명이 아닌 개혁을 시도하는 정치지도자는 어떠한 경우든 인내심과 포용력을 갖고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졌던 총리가 사직서를 내자 즉시 만류하면서 오히려 더 많은 일을 해 줄 것을 권하고 설득하는 대통령의 모습은 이른바 ‘코드 인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함을 시사한다.

어떤 영화평은 ‘한반도’가 처음부터 ‘반일 감정에 기댄’ 영화라고 단정해 버린다. 또 미래 한국에 대한 ‘지나친’ 걱정으로 상황을 너무 단순화해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고 꼬집는다. 그렇지만 그런 정도의 불편함은 영화배우 문성근이 평소의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열연하는 것을 보는 재미로 상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권과 자긍심의 원칙에 따라 일했던 ‘대통령’과 현실적인 이해타산을 우선했던 ‘총리’ 사이의 마지막 갈등 장면은 한국에서의 정치가 그리 녹록한 업(業)이 아님을 잘 보여 주었다.

정윤재 객원논설위원·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tasari@aks.ac.kr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