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천광암/시장개방=매국?

  • 입력 2003년 6월 19일 18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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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계가 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스크린쿼터) 축소 반대를 선언하기 위해 이달 12일 마련한 긴급 기자회견장에는 톱스타 10명이 결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이 모습이 보도된 뒤 “웬만한 집 한 채 값과 맞먹는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정부가 나서서 한국 영화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할 자격이 있느냐”는 의문을 던지는 사람이 많다.

기자는 스타들이 정말 외제차를 즐겨 타는지 궁금해 스크랩을 뒤져 봤다. 한 시나리오 작가가 2001년 말 본보에 기고한 칼럼을 보니 12일 기자회견장에 나온 영화배우 10명 가운데 3명이 ‘벤츠’를, 1명이 ‘BMW’를 타고 다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수입차 업계에도 물어봤다. 또 다른 1명은 ‘아우디’를, 칼럼에서 벤츠를 탄다고 언급된 1명은 BMW와 ‘지프’를 갖고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외제차를 탄다는 이유로 이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한국은 작년 한해 동안 133억2200만달러(약 15조7700억원)어치의 승용차를 해외로 수출했다. 외제차 소유를 비판한다면 외국인들에게 무슨 명분으로 “한국차를 사 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외제차=매국(賣國)’이라는 등식은 이제 버려야 할 때다.

그런데 스크린쿼터에 관한 한 ‘축소=매국’이라는 등식이 영화계에서는 아직 통하는 것 같다. 재정경제부의 K과장은 3월경 한 토론회에 참석한 뒤 스크린쿼터문화연대의 한 관계자로부터 “너 같은 매국노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거야”라는 ‘꾸지람’을 들었다고 한다.

또 영화계는 스크린쿼터를 줄이면 한국 영화가 금방 망할 것처럼 이야기한다.

1990년대 초반 통신시장 개방압력, 90년대 중반 자동차시장 개방압력이 거셀 때도 해당업계에서는 비슷한 논리를 폈다.

정부는 미국의 압력에 밀려 통신시장과 자동차시장을 열어 줬지만 결과는 달랐다. 통신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산업으로 발전했고 승용차는 반도체에 이어 한국의 두 번째 ‘달러박스’로 자리를 굳혔다.

더구나 한국영화는 개방 당시의 통신이나 자동차산업에 비해 상대적인 경쟁력이 떨어지지 않는다. 한국 영화 ‘쉬리’가 지난해 2월 미국 6개 대도시에서 동시 개봉됐을 때 뉴욕 타임스에는 다음과 같은 영화평이 실렸다. “폭력 액션 분야의 블록버스터를 할리우드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했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미국의 개방 압력에 끝까지 버텨낸 전례는 거의 없다. 스크린쿼터 축소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협상전략과 논리를 개발하고 경쟁력을 높이려는 논의도 이젠 필요하지 않을까.

천광암 경제부기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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