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PD 한정석의 TV 꼬집기

  • 입력 2000년 7월 29일 15시 08분


TV속의 귀신을 돌리도.

덥다. 무지 덥다. TV는 당연히 시청자들의 더위를 식혀줄 의무가 있다. 왜? 방송은 서비스업이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올 여름엔 TV에 그게 없다. 납량특집말이다. 무시무시한, 소름 끼치는, 너무나 엽기적이어서 베개로 얼굴을 가려야하는, 그래서 임산부나 노약자는 시청을 삼가달라는, 그 즐거운 공갈협박(?) 프로그램 말이다.

한때 MBC의 '다큐멘터리 이야기속으로'나 SBS '토요 미스테리',그리고 KBS의 '미스테리 추적'은 우리의 사랑을 독차지했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러한 재미들이 사라졌다. 시청률 톱을 내달리던 그 프로그램들이 차례로 잘려나갔던 것. 일부 시청자들의 방송사에 대한 불만과 은근한 협박 때문이었다.

그들중 많은 이들은 종교계 지도자, 정치인, 교수, 그리고 스스로 학식과 덕망을 고루 갖췄다고 자부하는 대한민국의 장로(長老)층이었다. 그들로서는 온나라가 귀신이야기로 법석을 떠는 꼴이 한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주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영화학자 로빈은 공포물이 정치적으로 대단히 진보적인 텍스트라는 점을 발견했다. 공포란 바로 '억압된 시선의 귀환'이기 때문이다. 공포물이 다분히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라는 점은 과거 KBS의 '전설의 고향'이나 '구미호'가 이제 더 이상 우리를 무섭게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그 대신 MBC의 '다큐멘터리 이야기속으로'는 우리의 공포를 확인시켜 주었다.

돌아가신 할머니, 죽은 삼촌, 어린 아이…. 공포의 대상은 집 바깥의 '괴물'에서 안쪽으로 들어와 가족과 친지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한 공포는 IMF로인한 사회,경제적 추락과 더불어 가족해체라는, 우리 사회가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갈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대중이 그러한 사회적 모순과 마주하고 있다는 것은 장로들에게 불쾌함을 넘어 기득권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 더운 여름에 그나마 TV에서 만날 수 있는 공포물은 KBS의 드라마'RNA'뿐이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 드라마가 설정하고 있는 공포의 시선이 '여고괴담'처럼 학교라는 억압기구를 통해 청소년들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부모인 기성세대로 향한다는 점이다. RNA의 억압된 시선은 청소년에 대한 기성세대의 '불안감'에서 비롯되고 있다. 세미는 어른들이 통제할 수 없는 위험한 힘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여고생 세미의 초능력은 상징화된 '남근'으로서 가부장적 사회를 위협한다. 세미는 그러한 자신에 대해 한편으로는 갈등해야한다. 그러한 세미의 최후는 어떤 것이 될까? 아마도 타자를 위한 희생이라는 명목으로 '처벌'되거나 초능력을 포기하는 '거세'를 통해 , 평범하고 착한 소녀(good girl)의 행복을 누린다는 해피엔딩이 될 공산이 높다. 그것은 로빈이 지적한대로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선택, '강간할 것인가, 숭배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착된다.

'죽거나, 착하거나'…. RNA는 이 비극적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수있을까? 오호라! 그 옛날 TV강호에 순진하게 날뛰던 오방귀신들이 차라리 그립고녀….

한정석(PD.영화평론가) kalito@crezi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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