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북촌 한옥마을 분양이 첫 사례… 2000년대 전문영역 인정받아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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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디벨로퍼의 역사

서울 종로구 북촌 한옥마을. 1920, 30년대 디벨로퍼들의 작품인 집단한옥지구는 이제 서울을 대표하는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다. 동아일보DB
서울 종로구 북촌 한옥마을. 1920, 30년대 디벨로퍼들의 작품인 집단한옥지구는 이제 서울을 대표하는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다. 동아일보DB
 “집을 팝니다(放賣家). 계동 99 신축 기와집 11동, 익선동 166 신축 기와집 24동…. 매 칸 매매가 200원 내외, 전세가 140원 내외….”

 1930년 12월 7일 동아일보 2면 하단의 분양광고 일부다. 최근 서울 종로구 가회동, 계동, 삼청동, 익선동 등 관광객이 많이 찾는 서울 도심 한옥마을의 가옥들은 조선시대의 전통 한옥이 아니다. 1920, 30년대에 한꺼번에 지어져 분양됐다.

 일제강점기 서울의 인구 증가로 주택난이 발생하자 정세권 사장의 건양사(建陽社) 등 주택 개발 업체들은 도시형 집단 한옥지구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대형 필지를 매입해 중산층, 서민들이 살기 적합하도록 100m², 200m² 단위로 쪼개 한옥을 지어 팔았다. 이들이 지은 집은 전통 건축 양식을 유지하면서도 유리, 타일, 함석 등 새로운 재료를 사용하고 평면을 표준화시킨,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유형의 주택이었다. 건양사 등은 개발·기획, 설계, 시공, 중개 등을 도맡으면서 할부 판매 등 주택 금융까지 도입했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방식이었다.

 서울 도심의 집단 한옥지구는 한동안 ‘집장사’들이 지은 도심의 흉물로 하루빨리 철거돼야 할 건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예전 서울을 보여 주는 상징물로 평가받는다.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집단 한옥지구는) 조선인을 위한 주택을 대량 공급해 일본인으로부터 서울을 지켜 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건양사 같은 업체의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 북촌에는 한옥 대신 일본식 가옥 단지가 자리 잡았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국내에서 현대적인 의미의 디벨로퍼가 생겨난 시기는 1980년대다. 서울 강남 곳곳에 주상복합빌딩의 형태로 들어선 거평프레야(거평그룹), 샹제리제빌딩(나산그룹) 등을 지으며 돈방석에 앉고 대기업 회장이 되는 이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아이디어 하나로 부동산 디벨로퍼가 돈방석에 앉을 수 있음을 보여 줬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 전후로 무리한 사업 확장과 각종 인허가 비리에 연루되면서 이들은 추락했다.

 2000년대 들어 시행과 시공의 구분이 정착되면서 디벨로퍼는 다시 주목받았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대형 건설업체가 토지 매입부터 개발 기획, 자금 조달, 시공, 분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도맡았다. 하지만 이때부터 건설업체는 시공, 나머지는 디벨로퍼가 맡는 분업 구조가 정착됐다. 2001년부터 시작된 부동산 호황이 2007년까지 이어지면서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개발 사업에 뛰어든 신흥 세력이 많았다. 정춘보 신영 회장, 문주현 엠디엠·한국자산신탁 회장 등이 대표 주자다. 이들은 2005년 한국디벨로퍼협회(현 한국부동산개발협회)를 결성하며 현재까지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부동산 경기 침체기를 거치면서 디벨로퍼 업계는 다시 한번 옥석 가리기에 들어갔다. 또 단순히 땅을 사고 적당한 시기에 개발한 뒤 분양하는 수준을 넘어서 자금을 끌어들이고, 새로운 산업을 유치하며 지역 발전을 유도하는 작업까지 벌이고 있다. 김승배 피데스개발 대표는 “현재 디벨로퍼는 단순 시행을 넘어 사업을 총괄하는 코디네이터로 발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한 사람의 아이디어로 수십만 명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좋은 디벨로퍼가 많이 나와 줘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북촌 한옥마을#일제강점기#디벨로퍼#부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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