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은 자신과 상대에 대한 관심… 대충 입는 사람, 성공한 경우 드물어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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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60주년 ‘명품 맞춤 양복’ 장미라사 이영원 대표

올해 창립 60주년을 맞은 장미라사의 이영원 대표. “옷은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그릇”이라고 강조하는 그는 두 가지 원단을 재치 있게 덧대어 만든 양복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섰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올해 창립 60주년을 맞은 장미라사의 이영원 대표. “옷은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그릇”이라고 강조하는 그는 두 가지 원단을 재치 있게 덧대어 만든 양복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섰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대한민국 정치인과 기업인이 대거 양복을 맞추던 맞춰 입던 곳이 있었다. 국회 인근 식당서 "국회 부근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면 양복 재킷이 뒤바뀌어 있다는 있다"는 농담 섞인 말도 이 양복점 때문에 나왔다. 같은 양복점에서 곳에서 옷을 맞춘 이들이 식당에 재킷을 걸어뒀다가 다른 사람 남의 옷을 입고 나온다는 것.

1956년 삼성 제일모직 사업부에서 시작해 올해 60주년을 맞이한 장미라사의 '장미라사'의 이야기다. 그 사이 장미라사는 삼성에서 분사했고 당시 지배인이 지분을 인수해 운영하고 있다. 서울 중구 세종대로 장미라사에서 이영원 장미라사 대표(58)를 만났다.

이 대표는 어릴 때부터 양복에 매료됐다. 부산 보수동 책골목에서 일본 패션잡지를 뒤적이고 국제시장에서 원단을 끊어 옷을 만들어 입던 그는 고교 졸업 직후 직후인 1977년 삼성에 입사해 30년 가까이 장미라사에 매달려왔다. 패스트패션의 시대에 '맞춤 양복'이 유효한지부터 궁금했다.

"컴퓨터로 스캔을 떠서 입체 제작하면 몸에 가장 정확하게 맞는 양복이 나오겠죠. 하지만 양복은 몸에 단순히 걸치는 옷이 아니에요. 사람의 골격과 움직임을 제대로 이해해 기계로 구현할 수 없는 우아한 아름다움을 담아내죠."

삼성 창업주인 고(故) 이병철 회장은 물론 이명박 전 대통령, 영국의 찰스 왕세자 등 국내외 인사들이 장미라사에서 옷을 맞췄다. 특히 이 회장의 옷 심부름을 도맡았던 이 대표는 그에 대한 기억을 잊지 못했다.

"이 회장님은 탐미주의자였어요. 하루에도 양복을 두어 차례 갈아입고, 바지를 맞출 때에도 길이를 5㎜ 단위로 수정해가며 자신에게 완벽한 양복을 만들려하셨죠. 또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선언(1983년)한 뒤엔 머리를 메탈 그레이로 염색하고 양복도 실버 그레이색을 입을 정도로 패션을 통해 경영철학을 표현할 줄 아는 분이었어요."

그는 옷을 '은쟁반'에, 사람을 '금사과'에 비유하며 설명했다. 옷 자체로 완성품이 아니라 옷은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그릇이어야 한다는 것. 이런 철학이 하루아침에 생긴 건 아니었다. 1980년대 해외 디자이너들의 옷을 대거 접한 게 계기가 됐다.

"어깨를 타고 흐르는 실루엣과 오묘한 색조는 기존 옷과 차원이 달랐죠. 기성복도 고급화되고 있었어요. 당시 장미라사에 손님이 차고 넘쳤지만 이대로 가다간 맞춤 양복이 곧 사라질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를 느꼈죠. 한국에서 양복을 만든다는 게 구시대 유물처럼 느껴졌죠."

마침 삼성은 1988년 장미라사를 분사했다. 맞춤 양복이 대기업식 경영과는 부적합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양복의 존재 이유에 고심했던 그는 빚까지 내서 양복의 본고장 유럽에 갔다.

"프랑스 센강이나 몽마르트언덕 몽마르트 언덕 노천엔 그림이 많았죠. 왜 어떤 그림은 길바닥에서 싸게 팔려 금세 사라지고, 어떤 그림은 미술관에 걸려 오래 남는 명품이 될까를 생각했죠. 그러다가 수준이 다르면 살아남겠다는 답을 얻었죠."

맞춤 양복에 확신을 가진 그는 1998년 장미라사 지분을 인수해 대표가 됐다. 하지만 당시는 외환위기 직후. 불황에 가격경쟁으로 생존의 기로에 섰다. 다시 유럽에 갔다.

"이탈리아 재단사들은 오히려 더 미련하게 양복을 만들고 있었죠. 패턴도 손으로 그리고 바느질도 한국과 달리 했어요. 기술자가 아니라 예술가였죠. 현지에 집을 구하고 재단사를 보내 바느질부터 다시 배우게 했죠."

기존엔 바느질 한 번에 여러 땀을 꿰어 원단이 밀려 라인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았다. 이를 한 땀 한 땀 꿰매 홑겹들이 압착되게 했다. 간단히 보여도 이 방식을 바꾸기까지 8년이 걸렸다.

"오래 했다고 장인이 되는 건 아니죠. 살아남으려면 기존의 자신을 철저하게 깨부술 수 있어야 하니까요."

한때 서울 명동·소공동 일대 500여 곳에 이르던 양복점이 지금은 10곳 정도로 줄었지만 장미라사는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양복 한 벌에 바느질 2만5000여 땀. 치수를 재고 원단을 고르고 가봉하고…. 최소 2,3주가 2, 3주가 걸린다. 패션에 관심 많은 20~40대들은 이런 '느린 패션'에 열광한다. 취직하면 장미라사 양복 한 벌 장만하는 게 꿈이었다며 옷을 맞춰가는 지방의 젊은이도 있다. 갤러리아 명품관에도 해외 명품 브랜드들과 나란히 입점해 진열돼 있다.

최근 이 대표는 해외로도 눈을 돌리고 있다. 중동에선 테러에 대비해 방탄차를 타고 방탄조끼를 입고 사고에 대비한 수혈용 피까지 싣고 왕실양복을 주문받아오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중국 싱가포르 등 고급호텔에 VIP를 초대해 옷을 주문받는 '트렁크 쇼'도 선보인다. 이젠 장미라사만의 전통을 쌓는 게 목표다. 그는 "남자도 우아할 수 있단 걸 보여주고 싶다"며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에서 풍기는 절제미를 옷에 담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옷은 자신과 상대에 대한 관심입니다. 대충 옷 입는 사람치고 성공한 사람은 드물걸요. 자신과 주변에 소홀할 가능성이 크니까요. 또 좋은 옷을 입어도 개인의 품격이 배어나오지 않으면 옷은 번지르르한 포장에 불과해요. 이게 한번에 되지는 않습니다. 꾸준히 자신을 파악하고 연습해야 합니다."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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