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평창동 특별전[프랑스로 간 정기호展]

  • Array
  • 입력 2012년 12월 24일 13시 54분


재불 화가 정기호(74)화백이 파리 유목생활을 마치고 돌아온다.

“GalerieArtoour 전속작가”로서 또 “프랑스 파리 국립미술협회회원”과 “파리국립미술관 영구회원” 등으로 활약해 유럽 화단에 한국의 작가적 위상을 높였던 작은 거인 정기호의 고국에서의 전시에 관심이 쏠린다.

정기호는 1939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9살 되던 해 해방되어 아버지 고향인 전북 남원에 정착하였지만 몹시도 가난했다.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상경해 수많은 일들을 몸으로 겪으면서 버틸 수 있었었던 것은 오로지 그림뿐이었다. 그나마 재료구할 돈조차 없어 미군이 버린 텐트를 가지고 캔버스를 만들어 그림을 그렸지만 그 어려움 중에도 그는 그림을 팔지 않았다.

당시 그는 “그림을 팔면 몸 파는 창녀가 되는 줄 생각했어요.” 그래서 굶기를 밥 먹듯 했다. 초등학교 중퇴인 젊은 정기호에게 누구도 시선을 주지 않았지만 화랑가와 평론가들이 일찍부터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림을 사주고 전시를 열어 주었다.

정기호의 삶은 고호. 오원 장승업. 이중섭의 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처절한 가난에서 얻은 고질적인 병마와 광기를 폭발하기보다 속으로 다스려 그 자체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소설가 박인식씨가 80년대 초 정기호를 보고서 “피를 칠하고 살을 바르는 오체투기로 캔버스를 칠해 유화(油畵)가 아니라 혈화 (血畵)를 그리는 그를 광화사(狂畵師)”라 했다.

그러던 중 지인들의 도움으로 아내와 함께 파리로 건너갔다. 파리에 입성한 정기호 작품에 매료된 로렌지방 신문 사설에 “그는 그렇게 크지 않으나 눈길은 엄숙하고 압도적인 순진한 미소를 짓고 있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색들과 놀라운 숙련된 선으로 구성된 정기호의 그림은 우리를 그의 화폭에서 춤추게 했다.”고 했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정기호의 그림에 관하여 많은 말들을 하였지만 도리어 파리에 정착한 후 안정적으로 작품에 빨려 들어갔으며 재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정기호의 작품을 접한 파리의 미술 평론가들은 새로운 미술세계를 전하기 시작했다.
“정기호는 형식주의와 멀티미디어 영상의 위세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주위 환경의 원천으로 거슬러 오르는 작업을 결코 게을러 하지 않았다. 그의 작품 속에는 피카소. 마티스. 미로에 대한 기호를 엿볼 수 있으나 오랜 시간을 거쳐 인내성을 가지고 참을성 있게 그들을 관찰하고 흡수하여 정기호 자신의 특유한 화법을 창작했다. 즉‘ 그의 화법은 예술과 해학의 세계가 눈부신 동심의 세계와 밀착된 즐거운 원무곡의 연주이다’ 피카소와 상대되는 기법을 통해 양식화된 대상과 인물들로 이뤄진 자신의 표현세계를 구축했다 ” 파리 소로본느 미학교수였던 막스 블럼베르그는 도리어 그를 동양의 피카소라고도 하였다.

또 “정기호는 현대회화의 영웅이다. 색의 전사이며, 음악가 없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또 감각의 왕자, 놀이적 현대미술의 대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동양에서 온 작은 거인 정기호에게 “불행에 흠뻑 젖은 예술가”였던 그가 재능과 절망을 동시에 안겨준 젊은 시절을 잊지 않고 풍파와 고통을 변함없이 즐거워하고 유토피아적인 거대한 미술작품으로 이야기 하였다.

정기호의 회화는 만화경 놀이로, 대중과 예술사이의 자유로운 중재자인 미학의 문턱에로, 그리고 화폭에 옮겨진 몸짓과 대중의 호기심어린 시선들 간의 자가 비평에로 우리를 초대한다.

정기호 특별기획전은 1977년 화가로서 첫 전시를 하였던 갤러리 평창동(구.그로리치화랑)에서 갖는다. 주)한국로얄코펜하겐과 주)루마인홈에서 주관한다.(02-396-8744)
전시 동영상 : http://www.youtube.com/watch?v=NhocUjklYaQ

<본 자료는 해당기관에서 제공한 보도 자료입니다.>
ⓒ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