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정경준]성공한 맏아들의 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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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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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준 산업부 차장
정경준 산업부 차장
요즘 같으면 정말 기업 하기 괴롭겠다. 유럽 재정위기가 촉발한 세계경제의 암운이 짙은데 미국의 이란 제재조치로 국제유가도 고개를 쳐들고 있다. 나라 안에서는 선거를 의식한 여야 정치인들이 ‘경제 민주화’를 내세워 대기업 때리기에 바쁘다. ‘재벌세’를 물리겠다는 급진적 아이디어까지 나온다. “기업 못해먹겠다”는 얘기가 나올 법하다.

하지만 냉정하게 짚어 보면 대기업들도 반성해야 할 대목이 분명히 있다. 대기업 옥죄기 기류는 직접적으로는 표를 의식한 정치권의 포퓰리즘에 기인하지만 문어발식 사업 확장과 동네상권 침해, 일감 몰아주기, 담합 등 일부 대기업의 부정적인 행태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때맞춰 쏟아지는 대기업 관련 서적 가운데 ‘가난한 집 맏아들’이라는 제목의 책은 독특한 비유로 문제에 접근한다. 부모(정부)가 소 팔고 논밭 팔아 마련한 돈으로 대학에 진학하고(특혜) 결국 큰 성공을 거뒀지만 자신 때문에 희생한 동생들(중소기업)을 도외시하는 맏아들(대기업) 얘기다. 저자는 ‘명시적인 계약은 없었더라도 성공한 맏아들은 희생한 동생들에게 보상해야 할 도의적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 대기업들은 광복 직후 시장경제 도입 과정에서, 또 경제개발 5개년계획 추진 과정에서 적잖은 혜택을 받았다. 일제 귀속재산 불하나 외화배정을 통해 앉은자리에서 돈을 벌었다. 투자인가 정책에 따라 독과점 이윤을 보장받았고 각종 세제 감면, 특혜융자도 받았다. 저(低)금리 기조는 국민의 희생 속에 기업들을 살찌운 정책이었다.

물론 대학에 간다고 다 성공할 수 없는 것처럼 혜택을 본 기업들이 모두 잘나가는 대기업이 된 것은 아니다. 창업자들은 자금을 마련하느라 속을 태웠고, 결단의 순간에는 밤을 하얗게 새웠다. 그렇게 일궈낸 기업은 어느덧 자신의 분신(分身)이 됐다. 지금도 마음을 놓을 순 없다. 사활을 건 글로벌 경쟁에서 도태되는 건 한순간이기 때문이다. 학업도 포기한 채 여전히 어렵게 살고 있는 동생들(중소기업)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돌보기는커녕 큰 희생을 강요한 대기업도 적지 않다. 동아일보가 지난해 8월 10차례에 걸쳐 보도한 ‘같이 가야 멀리 간다’ 기획시리즈는 대기업-중소기업 동반성장의 모범사례를 발굴해 널리 본받게 하자는 취지였지만 그 반대편 사례도 생생하게 전달했다. 사실 모범사례보다는 납품단가 낮추기, 신기술 탈취, 핵심 인력 빼오기 등을 취재하기가 더 쉬웠다.

한 대기업 간부는 “과거 경험에 비춰 보면 지금처럼 광풍(狂風)이 몰아칠 때는 납작 엎드려 있는 게 상책”이라고 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양극화가 이슈가 되고 있는 이번만큼은 아닌 것 같다.

대기업들은 이익공유제를 논의하자는 동반성장위원회 본회의를 반(反)시장적이라며 이미 두 번이나 보이콧했다. 앓는 소리를 하는 동생들을 만나지도 않겠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제는 정면으로 부닥쳐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 그것이 억울하게 양극화의 주범으로 몰리지 않는 길이자 가난한 집 성공한 맏아들의 자세다.

정경준 산업부 차장 news9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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