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 자본주의’에서 길을 찾다]<4>상품-서비스 교환 ‘지역화폐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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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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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된 품앗이’ 지역화폐, 지구촌 골목경제에 생기 불어넣다

“피너츠 덕에 힘 납니다” 일흔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본 지바 시 유리노키 거리에서 현역 이발사로 활동하고 있는 가이호 마코토 씨가 자신의 이발관에서 고객의 머리를 다듬고 있다. 피너츠 로고(왼쪽 위 작은 사진)는 스페인어로 ‘친구’를 의미하는 ‘아미고’가 쓰여 있어 지역 민간 유대와 교류를 중시하는 지역 화폐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피너츠 덕에 힘 납니다” 일흔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본 지바 시 유리노키 거리에서 현역 이발사로 활동하고 있는 가이호 마코토 씨가 자신의 이발관에서 고객의 머리를 다듬고 있다. 피너츠 로고(왼쪽 위 작은 사진)는 스페인어로 ‘친구’를 의미하는 ‘아미고’가 쓰여 있어 지역 민간 유대와 교류를 중시하는 지역 화폐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피너츠 회원이시죠? 50엔 할인해 드릴게요. 점심값은 600엔입니다.” 일본 도쿄의 동쪽에 자리한 인구 25만 명의 지바 시 유리노키 거리에서 중국음식점을 운영하는 이시카와 요시카즈 씨(65). 그는 650엔짜리 소바 정식을 먹은 고객이 노란 종이를 하나 내밀자 선뜻 50엔(약 750원)을 깎아줬다. 노란 종이는 만성적인 불황에 시달리던 유리노키 거리의 소규모 자영업자들을 살린 지바의 지역화폐(LETS·Local Exchange Trading System) ‘피너츠’다. 이 거리의 식당, 부동산 중개업소, 양복점, 미용실 등의 가게들은 낡고 비좁은 내부 공간, 좁은 진입로, 백화점과 대형마트의 등장 등으로 1990년대 초부터 극심한 불황에 시달려 왔다. 하지만 1999년 피너츠가 등장하면서 죽어가던 골목길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
○ 소꿉장난의 마법
“어둡던 동네가 달라졌어요” 세계 3000곳서 통용


지역화폐는 특정 지역이나 집단 내에서만 통용되는 화폐를 통해 상품과 서비스를 교환하는 지역경제 시스템을 말한다. 실제로는 돈을 찍어내기보다 대개 통장계좌로만 관리한다.

1983년 캐나다 밴쿠버 인근의 작은 마을 코목스 밸리에서 처음 탄생한 후 확산일로를 걸어 현재 미국 일본 캐나다 독일 등 세계 각국에서 약 3000개의 지역화폐가 쓰인다. 한국에도 대전 한밭레츠의 ‘두루’, 부산 사하품앗이의 ‘송이’, 서울 송파품앗이의 ‘송파머니’ 등 10여 개가 있다.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아이들 소꿉장난 같다’는 평가를 받던 지역화폐는 정착이 어렵지만 일단 성공만 하면 아사(餓死) 상태에 있던 지역경제를 기적처럼 살려내고 동네를 정이 흐르는 생태 공동체로 복원시키는 마법을 가져온다. 또 지역주민 간 신뢰와 유대감을 강화하고 경제적 자립 능력이 취약한 계층에도 경제활동의 기회를 제공하며 지역 내 소상공인들의 부활을 촉진하고 자원 낭비까지 줄여준다.
○ 영양만점 日 ‘피너츠’
할인 받고 잡일로 갚아… 부담 줄이니 매출 늘어


피너츠를 관리하는 ‘지바마을만들기 지원센터’의 무라야마 가즈히코 대표는 ‘피너츠클럽’이란 단체를 만들어 개인회원(소비자)에게 노란색 종이를, 기업회원(가게 주인)에게 하얀색 종이를 발급해 준다. 이 종이가 일종의 통장이다. 개인회원은 피너츠클럽에 속한 가게에서 일반 손님보다 물건을 5∼10%씩 싸게 사고, 그 대신 해당 가게의 잡일을 돕는 식으로 갚는다.

이시카와 씨의 낡고 작은 중국집은 피너츠클럽에 가입하기 전에는 폐점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지금은 매출의 30%가 피너츠 회원으로부터 나올 정도로 지역화폐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단골 고객들은 메뉴판을 만들어 주거나, 식당 청소를 돕는 식으로 자신이 할인받은 대가를 지불한다. 자연스럽게 이런 과정에서 개인회원은 주인과 인간적으로 친해져 더 자주 가게를 찾게 된다.

이시카와 씨의 가게에서 20m 떨어진 곳에서 이발관을 하고 있는 가이호 마코토 씨(70)는 이곳에서 48년간 이발관을 해 왔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도쿄 인근의 대형 미용실로 가 버리는 바람에 최근 몇 년간 어려움을 겪었지만 피너츠클럽에 가입한 중장년층의 남자 손님들이 몰리면서 웃음을 되찾았다. 가이호 씨는 “유행에 민감하지 않고 이발사와 인간적인 교류를 원하는 손님들이 가게에 온다”며 “요즘은 지바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찾아오는 중장년층 고객이 있다”고 말했다.

1999년 피너츠클럽 출범과 비슷한 시기에 일본 내 다른 지역에서도 무려 1200개에 달하는 지역화폐가 생겨났지만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건 10개 정도에 불과하다. 피너츠클럽에는 현재 약 2500명의 소비자와 60여 개의 가게가 참여하고 있다. 출범 당시 30여 개에 불과했던 가맹점이 두 배로 증가한 것이다.
○ 경제 약자가 주체로
주부-퇴직자 회원들이 중심… “자신감도 되찾아”


부산시 사하구의 ‘사하품앗이’ 공동체에서는 600여 명의 회원이 2007년부터 ‘송이’라는 지역화폐를 사용한다. ‘송이’ 역시 ‘피너츠’와 마찬가지로 통장 형태로 운영된다. 사하품앗이의 주축은 부산여성회 사하지부와 부산여성경제센터 회원 등인 주부들. 회원 간에 거래되는 것은 주로 육아 및 가사활동과 관련한 서비스다.

사하품앗이 웹사이트에는 “큰애가 발가락이 부러져 고생하고 있어요. 우리 애를 학원에 태워주실 분께 1만 송이 드릴게요” “철 지난 옷을 수선해 주실 분께 3000송이 드립니다”와 같은 글이 종종 올라온다.

회원들끼리 자신의 특기를 가르치는 ‘품앗이학교’는 서로의 재능과 취미활동을 공유한다. 천연화장품, 천연비누, 환경수세미 만들기, 요리교실이 인기다. 사하품앗이는 이를 발전시켜 ‘송이아띠 사업단’이라는 사회적 기업도 만들었다. 이화수 사하품앗이 공동대표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직장을 그만뒀던 여성이 재취업에 성공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이지만 사하품앗이에서는 주부들도 당당한 경제주체로 참여해서 자신감을 되찾는다”고 설명했다.

호주 시드니의 지역화폐 ‘오페라’를 사용하는 200여 명의 회원 중 상당수는 퇴직자들이다. 이들은 탁아는 물론이고 전자제품 수리, 글쓰기 지도 등을 통해 지역민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홍승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려면 여성과 노인들이 경제활동에 종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줘야 한다”며 “지역화폐 체제에서는 극심한 자본주의의 경쟁에서 소외된 주부나 노인도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 품질-서비스 개선
“이웃이 만든 좋은 재료 사용” 로컬푸드 운동으로


주민 간의 거래로 지역경제를 활성화하자는 지역화폐의 취지는 지역 내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등을 지역 내에서만 소비하자는 ‘로컬 푸드(local food)’ 운동을 자동적으로 실천하게 만든다. 지역 내 거래가 활성화되면서 연료 소비, 환경 파괴, 농약 및 방부제 사용 등의 폐해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시카와 씨의 경험에 따르면 서로 잘 알게 된 회원들이 주로 음식점에 찾아오면서 이익만 따지는 불량 음식을 지양하게 되고 질 좋은 음식을 내놔야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런 마음에서 믿을 수 있는 유기농 가게를 찾게 되고 결국 같은 피너츠클럽에 속한 채소가게에서 파는 유기농 재료만 사용하게 된다. 이런 사실이 소문이 나면서 더 많은 손님이 몰려온다. 결과적으로 잘 몰랐던 이웃과 돈독한 관계를 맺게 되고, 두 가게가 서로 안정적인 매출처를 확보하는 계기가 된다. 1986년 광우병이 휩쓸고 간 영국 토트네스 지역 주민들도 지역화폐를 도입했다. 동시에 유기농 농업 및 친환경 목축 방식을 도입해 건강한 먹을거리를 공급하고 에너지 절약을 위해 태양광 발전기를 설치했다. 이제 토트네스는 지역화폐 및 로컬푸드 운동의 모범 사례가 돼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몰리고 있다.
○ 공존 경제의 교과서
情-신뢰 쌓여… ‘돈 안드는 지역사회 안전망’ 역할


지역화폐를 쓰는 사람들이 가장 큰 장점으로 꼽는 것은 주민들의 소통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돈’이 아니라 ‘신뢰’에 기초한 인간관계를 맺는 일이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무라야마 대표는 “피너츠 사용이 늘어나면서 지바대 학생들이 지역 노인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쳐 주는 등 피너츠가 만들어낸 지역 공동체에서 세대를 뛰어넘어 정과 신뢰를 나누는 사람들의 수가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이화수 사하품앗이 대표도 “각박한 도시 생활 속에서 이웃 주민과 인연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지역화폐의 또 다른 묘미”라며 “우리나라는 품앗이, 두레 등 상부상조의 전통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기 때문에 지역화폐가 자리 잡기에 더없이 좋은 토양을 지녔다”고 덧붙였다.

신동엽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자영업자 살리기, 경제적 취약계층 지원, 육아, 먹거리 문제 등과 깊이 맞닿아 있는 지역화폐는 막대한 재정 지원 없이도 ‘지역사회 안전망’을 형성하는 효과가 커 공존 자본주의를 배우는 학교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 “지역화폐 쌓아두면? ‘마이너스 이자’ 물립니다” ▼
차감방식 채택해 사용 유도… 적자나도 갚을 필요는 없어


성공한 지역화폐의 중요한 특징은 이자가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플러스 계좌(+)가 되면 마이너스(―) 이자가 붙는다.

일본의 피너츠클럽은 월 1%의 차감 방식을 택했다. 즉 한 회원이 봉사활동과 기부를 통해 1000피너츠를 적립한 후 피너츠클럽 소속 가게에서 500피너츠밖에 쓰지 않았다면, 매월 5피너츠씩 줄어든다. 무라야마 가즈히코 대표는 “피너츠를 통해 물건 및 서비스를 적극 구입해야만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는데 이를 사용하지 않고 쌓아두는 일은 피너츠 정신에 위배된다”고 말했다. 적자라고 불안할 필요도 없다. 다른 사람에게 상품, 서비스 등을 많이 빌려 마이너스 계좌가 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이를 언제까지 갚아야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독일 동남부 바이에른 주 킴가우 지역에서 유통되는 지역화폐 ‘킴가우어’ 역시 3개월마다 2%의 마이너스 이자가 붙는다. 마이너스 이자는 킴가우어의 유통을 더욱 촉진시킨다. 2003년 킴가우어가 처음 등장했을 때 불과 130명의 주민이 7만 킴가우어(7만 유로) 정도를 이용했지만, 8년 뒤인 작년에는 3000명이 600만 킴가우어를 이용할 정도로 커졌다.

글·사진 지바(일본)·부산=하정민 기자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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