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들, 현금 쥔 대기업 모시기에 사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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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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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닉스 인수 SKT에 선뜻 2조 대출…
‘갑을’ 뒤바뀌며 비위 맞추기에 열성

“1970년대 대우빌딩 1층에 있는 제일은행 지점에 부임한 대리는 김우중 당시 대우 회장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은행장이 기업 사장은커녕 임원 만나기도 힘들어요.”

최근 퇴임한 한 시중은행 임원이 밝힌 현실이다. 과거 돈줄을 쥔 은행에 항상 꼬리를 내려야만 했던 기업들은 최근 풍부한 보유 현금을 앞세워 기세가 등등하고, 은행들은 주요 대출고객인 대기업 앞에서 고개 숙인다. 일부 대기업은 마음에 들지 않는 은행에는 예금 인출 등으로 압박하고 계열사의 부실을 은행에 떠넘기는 식으로 은행의 뒤통수를 치기도 한다. 은행들은 달라진 세태에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수익원 확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대기업 고객 유치에 ‘올인’하고 있다.

최근 KB국민은행과 우리은행은 하이닉스반도체를 인수하겠다고 나선 SK텔레콤에 ‘필요한 만큼의 자금 지원 등 모든 지원을 해주겠다’는 내용의 투자확약서(LOC)를 써줬다. SK텔레콤의 하이닉스 인수대금이 3조4000억 원을 넘는다는 점, SK텔레콤이 보유한 현금이 1조5000억 원 정도라는 점을 감안할 때 2조 원가량을 대출해 주겠다는 약속을 한 셈이다. 금융계에서는 은행이 먼저 이 정도의 대규모 대출을 해주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는 데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다. 국민은행의 한 임원은 “대기업들이 과거처럼 은행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고객이 원하는 이상의 서비스를 제공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대기업과 은행의 달라진 관계가 극명하게 드러난 예는 현대자동차와 외환은행이다. 지난해 말 현대건설 매각작업에서 외환은행이 현대그룹과 양해각서(MOU)를 맺자 현대차는 곧바로 외환은행에 예치했던 1조3000억 원의 예금을 빼냈다.

또 올해 초 LIG그룹의 계열사인 LIG건설은 모그룹이 지원을 중단하자 채권단과 논의하지 않고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효성그룹 계열사인 진흥기업, 삼부토건에서도 비슷한 행태가 나타났다. 이를 두고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은행들이 대기업 계열사에 쉽게 대출을 해준다는 점을 악용한 사례”라며 “은행과는 대출 만기 협상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법원으로 가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이중플레이’에 당한 셈”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뒤통수를 맞으면서도 은행권이 대기업 고객에 목을 매는 이유는 자금 운용의 어려움 때문이다. 당국의 규제로 가장 큰 수익원인 가계대출의 통로가 좁아진 데다, 중소기업 대출에선 큰 수익이 나지 않는다. 시중은행이 탐낼 만한 대기업은 대부분 은행 못지않은 현금을 쌓아두고 있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대기업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다.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삼성전자는 184억 달러(약 21조 원)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대기업 유치를 담당하는 은행 내 담당자의 직급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한 시중은행장은 “은행장들이 주도하는 기업 고객 및 퇴직연금 유치 전쟁에 금융지주 회장들까지 들어와서 경쟁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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