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3조원대 KIKO 소송 내달 첫 선고

  • Array
  • 입력 2009년 12월 11일 03시 00분


코멘트

본안 소송 내달 첫 선고

삼성전자 등에 프레스 금형을 납품하는 T사는 직원이 14명뿐이지만 2007년 74만 달러 상당의 금형을 수출하는 등 매년 25억 원 안팎의 매출을 올리는 작지만 강한 기업이었다. 하지만 2007년 멕시코에 공장을 짓기 위해 외환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으면서 상상도 못한 암초에 부딪히게 됐다. 대출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당시 잘 이해되지도 않은 환헤지 상품인 ‘키코(KIKO)’를 은행의 권유로 선뜻 가입한 것.

이 상품은 환율이 937원을 기준으로 ±30원 한도 내(907∼967원)에서 움직이면 약정한 환율로 2008년 한 해 동안 분기마다 30만 달러씩을 팔아 환율 변동에 안정적으로 대처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환율이 상·하한을 벗어나면 불리한 환율로 2배인 60만 달러를 팔아야 해 위험도 매우 컸다. 이 회사 사장인 박모 씨는 상품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듣지 않은 채 키코에 가입했고 2008년 초부터 불어닥친 환율 급등으로 1분기부터 엄청난 환차손을 입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지난해 중국 금형 업체의 약진으로 수출액이 절반으로 줄어든 상황. 은행의 달러 매도 압력은 거세졌고 박 사장은 중소기업 유동성지원 프로그램(패스트트랙)을 통해 4억 원가량의 빚을 내 손해를 감수한 채 약정한 달러 매도에 나섰다. 이렇게 박 사장이 입은 키코 손실액은 지난해 5억1000만 원. 회사 연간 순익의 10배에 달하는 규모였다. 결국 박 사장은 “은행이 제대로 설명도 안 하고 키코를 팔았다”며 은행을 상대로 부당이익금 반환 소송을 냈고 10일 증인으로 법정에 섰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1부(부장판사 임성근) 심리로 열린 이날 재판에서 은행 측은 2007년 12월 28일 오후 1시 반 은행 직원이 키코에 대해 박 사장에게 자세히 설명한 통화 녹취록과 키코 상품 설명이 담긴 계약서 등을 증거로 제시했다. 이에 박 사장은 “통화 당시 식사하고 있어서 질문에 무조건 ‘예’라고만 답해 제대로 듣지 못했고, 계약서도 바빠서 제대로 보지 않고 서명했다”고 반박했다. 재판장은 “딱한 회사 사정은 알겠지만 바빠서 읽어보지 않고 계약한 것은 스스로 책임질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 회사처럼 키코 손실 때문에 은행과 법정다툼을 벌이고 있는 소송은 200여 건이다. 현재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1부는 이 가운데 40여 건을 맡고 있다. T사 등 15건에 대해 이달 24일까지 재판을 마치고, 이르면 내년 1월 14일과 21일 차례로 판결을 선고할 계획이다, 총 피해액만 4조 원에 달하는 키코 본안 소송의 첫 선고가 내려지는 것이다.

당장의 급한 피해를 막기 위해 본안 판결이 나기 전까지 키코의 효력을 정지시켜 달라고 요청한 가처분 사건은 대부분 마무리됐다. 지난해 말 첫 가처분 사건에서 서울중앙지법 민사50부(부장판사 이동명)는 기업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키코의 효력을 중지시켰다. 당시는 세계적 금융위기로 경기가 악화됐고 환율도 급등해 키코에 가입한 기업들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환율이 안정되고 키코 상품에 대한 다양한 연구결과가 나오면서 법원의 판단은 점차 은행 쪽으로 기우는 분위기다. 올해 8월 서울고법 민사40부(수석부장 이성보)는 키코 가처분 신청 항고심(2심)에서 처음으로 기업의 주장을 기각하고 은행의 손을 들어줬다. 은행이 상품 설명에 미흡한 면이 있었다 해도 불법행위로 보기는 어렵고, 기업들이 자유의사에 따라 계약을 맺은 점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1부는 최근 키코와 유사한 구조의 ‘수출환변동보험’에 가입했다가 환차손을 본 기업들이 보험 판매사인 한국수출보험공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기업 측에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환율변동 위험성은 어디까지나 환헤지 금융상품에 가입한 기업들이 져야 할 책임(기회비용)”이라고 밝혔다.

이종식 기자 bell@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