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조 퇴직연금 잡아라” 금융혈투

  • 입력 2009년 8월 8일 02시 59분


은행 “인사고과 반영” 유치 독려
보험-증권사들 가세… 전선 확대

서울 강남의 한 시중은행 영업점에 근무하는 최모 씨는 최근 담당하고 있는 기업을 자주 찾는다. 퇴직연금 가입을 독려하기 위해서다. 하반기 인사고과 평가까진 4개월이 남았지만 벌써 마음이 급하다. 상반기에 비해 할당량이 120% 상향 조정됐기 때문이다. 최 씨는 “상반기 실적 마감을 앞둔 5, 6월에 퇴직연금 목표치를 달성하느라 고생했다”며 “하반기엔 퇴직연금 유치를 더욱 강조하는 분위기여서 미리 영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반기 퇴직연금 시장 선점을 위한 은행들의 공세가 가열되고 있다. 안정적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퇴직연금 시장은 금융권에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된 지 오래다. 특히 금융위기로 어려움을 겪은 은행들은 퇴직연금 시장에 사활을 걸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우리은행은 올 하반기 핵심평가지표(KPI·Key Performance Indicator)에 퇴직연금 부문을 신설하고 40점을 부여했다. 국민은행 역시 지난해 20점이었던 KPI의 퇴직연금 항목을 올해는 개인영업점 40점, 기업영업점 60점으로 늘렸다. 신한은행 등 다른 시중은행들도 퇴직연금을 별도 평가항목으로 설정하고 총점의 5% 정도를 할애하고 있다. KPI의 별도 항목으로 지정되면 본점에서 각 영업점에 퇴직연금 가입 목표치를 할당하고 이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한 영업점의 직원들은 인사고과에서 불이익을 받게 된다.

은행들은 퇴직연금을 전담하는 조직과 인력도 크게 확충하고 나섰다. 국민은행은 전국 영업점에 퇴직연금 전담 직원을 배치해 컨설팅에서 자산운용까지 종합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은행 역시 올 하반기부터 대기업을 대상으로 컨설팅에 나설 방침. 하나은행은 하나대투증권과 공동으로 공공기관 및 대기업 전담팀을 구성해 공동 마케팅을 실시할 계획이다. 일부 은행은 퇴직연금 가입이 노동조합과의 협상 대상임을 감안해 아예 노조 간부 출신을 퇴직연금 담당자로 영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규모에 상관없이 거의 모든 은행이 퇴직연금 시장에 집중하고 있다”며 “교육과 컨설팅 서비스 제공은 물론이고 각 지점이 영업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은행들이 퇴직연금 영업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은 금융위기 이후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저금리로 수익성이 크게 악화됐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한때 3%에 가까웠던 순이자마진이 2%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이자부문에서는 수익을 올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에 따라 한번 유치하면 계속 자금이 들어오는 퇴직연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 퇴직연금 시장의 높은 성장 가능성도 매력적이다. 퇴직연금으로 적립된 금액은 현재 8조 원 정도. 하지만 2015년에는 시장규모가 100조 원을 훌쩍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2010년 말부터 기존의 퇴직보험·신탁에 대한 세제혜택이 폐지되면서 기업들의 퇴직연금 가입 바람이 불 것으로 보인다.

보험과 증권업계 역시 퇴직연금 영업을 강화하고 있지만 지점이 압도적으로 많은 은행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은행권의 6월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은 약 4조2000억 원. 5월 말 기준 적립금 3조7500억 원에 비해 12%나 늘었다. 이에 반해 생명보험과 손해보험을 합친 보험업계는 4%, 증권사는 5% 성장에 그쳤다. 이처럼 은행들이 퇴직연금 시장을 장악해 나가면서 대출을 미끼로 중소기업들의 퇴직연금을 유치하는 ‘꺾기’ 영업에 대한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금융감독원은 퇴직연금 경쟁이 본격화되는 연말을 앞두고 퇴직연금의 비정상적 영업에 대한 실태조사를 검토하고 있다.

:퇴직연금:

퇴직금을 은행과 보험 증권사 등에 적립해 회사를 그만둔 뒤 연금이나 일시금으로 받는 제도. 10년 이상 퇴직금을 적립한 뒤 55세 이상이 되면 연금을 받는다. 연금액이 임금수준과 근속기간에 따라 정해지는 확정급여형(DB·Defined Benefit)과 연금액이 운용실적에 따라 달라지는 확정기여형(DC·Defined Contribution)으로 나뉜다.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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