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간 좀 열어다오” 메아리 없는 투자 호소

  • 입력 2009년 5월 21일 19시 11분


올 3월초 금융시장이 제법 안정을 찾고 실물경제에도 낙관론이 솔솔 나올 무렵, 정부는 기업들에 "이제 위기가 어느 정도 지나갔으니 곳간을 열고 투자에 나서라"고 독려했다. 또 대폭적인 규제 완화라는 당근도 함께 제시했다.

하지만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기업들은 언제 다시 닥칠지 모르는 추운 겨울에 대비해 여전히 현금을 곳간에 쌓아두고 있다. 이에 따라 경제의 미래 성장동력을 상징하는 기업들의 투자지표들이 좀처럼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기업 유보율 1000% 육박

한국거래소가 21일 국내 10대 그룹(자산총액 기준) 상장 계열사의 재무제표를 분석한 결과 올 3월 말 현재 이들 기업의 유보율은 945.54%로 1년 전인 지난해 3월 말(884.74%)보다 60.80%포인트나 상승했다. 유보율은 기업의 잉여금을 자본금으로 나눈 값으로, 영업활동이나 자본거래를 통해 벌어들인 자금을 얼마나 내부에 쌓아두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따라서 이 비율이 높으면 기업이 그만큼 투자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 기업의 자본금은 1년 전과 큰 변동이 없었지만 잉여금은 233조699억 원으로 같은 기간 6.6% 증가했다. 그룹별로는 포스코가 5782.94%로 가장 높았고 현대중공업(1906.88%), 삼성(1659.57%), SK(1548.89%), 롯데(1316.70%) 등의 순이었다. 10대 그룹의 유보율은 외환위기 직후 국내 산업계가 정보기술(IT) 분야에 대규모 투자를 한 뒤로는 매년 수직 상승을 이어가고 있다.

기업들의 투자부진은 다른 지표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한국은행의 국민소득 통계에 따르면 1분기 설비투자액은 17조7046억원으로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22.1% 줄었다. 2001년 이후 최악의 감소율이다. 최근 시중 단기유동성이 800조 원을 돌파한 것도 정부가 시중에 공급한 돈이 실물투자보다는 단기 수익을 겨냥한 기업들의 금융투자에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업들, "위기 상황 끝나지 않았다"

정부와 여당은 실물경기의 부양을 위해 올 초부터 끊임없이 기업들에 투자를 확대해달라고 요청했다.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는 올 3월 출자총액제한제를 폐지하면서 "투자 여건을 좋게 만들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 기업인들이 금고 문을 좀 활짝 열어주면 감사하겠다"고 당부했다. 한승수 국무총리 등 정부 관료들 역시 "우리 경제가 하반기 이후 서서히 회복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기업들이 속도를 내서 투자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재계에서는 '아직 위기가 종료된 것은 아니다'라며 몸을 사리고 있다. 해외수요가 여전히 살아날 조짐을 보이지 않는데다 내수도 바닥을 치고 있는 마당에 섣불리 곳간을 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오히려 올 1분기에 지난해 같은 기간의 두 배가 넘는 26조 원 어치의 회사채를 발행하며 시중 자금을 끌어들이는데 급급한 모습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종년 수석연구원은 "하반기 본격적인 구조조정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기업들이 재무 건전성을 높이기 위해 현금 확보를 하려는 건 당연한 경영전략"이라며 "지금은 공급과잉 상태라 투자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만큼 적절한 집행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물론 유보율의 증가를 국내 기업들의 재무구조가 더 탄탄해진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LG경제연구원 이한득 연구위원은 "향후 경기가 불확실할 때 대응력이 높아진 것이란 해석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유재동기자 jarrett@donga.com

이서현기자 baltika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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