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에서 배우는 교훈

  • 입력 2008년 9월 17일 19시 59분


한국 금융업의 미래이자 선망의 대상이던 미국 투자은행(IB)들이 줄줄이 무너져 내리면서 국내 금융권과 정부 일각에서 'IB 속도 조절론'이 흘러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태가 '과거로 U턴'하는 전환점이 아니라 타산지석을 통해 '한국형 IB 모델'을 정립하는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한국 금융업계가 IB산업에 뛰어들기 전에 이 같은 대형 사태가 터진 게 불행 중 다행이라는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메릴린치 투자를 통해 많은 교훈을 얻었다." 진영욱 한국투자공사(KIC) 사장은 올해 7월 기자간담회에서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에 대한 투자 의사를 묻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미국 IB의 이면에 감춰진 리스크의 실체를 이번 사태를 통해 확인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KIC는 올해 20억 달러를 메릴린치에 투자했다. 잘만 하면 세계적인 IB의 대주주로 첨단 금융기법도 확보하고 투자수익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투자 당시보다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메릴린치는 뱅크오브아메리카(BOA)로 넘어가는 신세가 됐다.

정부 일각에서는 금융 산업 체질을 투자은행 중심으로 개편하는 전략에 대한 '속도 조절론'도 나오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번 사태는 한국 금융산업의 체질이나 체급을 고려하지 않은 채 투자은행으로 전환하는 것이 위험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한국 정부와 금융 시장이 보유한 국제 금융권에 대한 인적 네트워크가 우리 경제 수준에 비해 터무니없이 약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며 '선(先) 체력 강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리스크 관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윤만호 산업은행 이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리스크를 감안한 투자은행 활동이지 리스크를 테이킹(감내)하는 게 아니다"라며 "이번 사태는 위험관리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걸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금융당국의 규제 완화와 감독 부실이 위기를 불렀다는 지적도 나온다. '탈규제의 부작용'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국내 금융 산업의 지향점을 재점검하고 한국형 IB모델을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인수합병(M&A) 등 IB 본연의 사업 모델은 한국 금융산업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여전히 유효하다는 뜻이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국내 증권사의 IB 사업 수익 비중은 5%에 불과하고 주식중개 수수료 등의 수익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며 "국내 시중은행은 은행 사업 비중이 80% 이상이기 때문에 IB 분야로 사업 다각화는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도이체방크나 JP모건처럼 탄탄한 고객 수신기반과 기업금융 인프라를 갖춘 상업은행에 바탕을 둔 IB모델도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최근 문제가 된 미국의 IB들이 자체 수신이 없고, 기업 고객 기반이 약해 모기지나 파생상품 등 고수익 고위험 상품에 매달려 금융시장의 불안에 특히 취약했다.

조급증부터 버려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보성 한국증권연구원 금융투자산업실장은 "100년 이상된 미국 IB도 망하는데 자본시장통합법만 통과시킨다고 IB가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라며 "사람 몇 명 데리고 온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리스크 관리를 위한 인프라, 리서치 역량, 해외 네트워크 등을 인내심을 갖고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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