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우리회사’…김대리, 퇴근길에 책 한권 할까?

  • 입력 2007년 1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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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오일뱅크의 독서토론 모임인 ‘무녀리’ 회원들이 서울 중구 남대문로 연세빌딩 21층 현대오일뱅크 대회의실에서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은 2주에 1권씩 책을 읽고 토론한다. 사진 제공 현대오일뱅크
현대오일뱅크의 독서토론 모임인 ‘무녀리’ 회원들이 서울 중구 남대문로 연세빌딩 21층 현대오일뱅크 대회의실에서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은 2주에 1권씩 책을 읽고 토론한다. 사진 제공 현대오일뱅크
현대오일뱅크 서영태 사장이 회사 대회의실에 들어선다. 20여 명의 임직원이 자리를 채우고 있다. 재정팀 사원 현일(28) 씨가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꺼낸다. 순간 스페인 전통 춤인 플라멩코의 흥겨운 리듬이 흘러나온다. 이어 스페인의 풍경을 담은 동영상이 상영된다. 스페인 문화와 유적지에 대한 현 씨의 설명이 곁들여진다.

이 회사에서 얼마 전에 열린, 여행에세이 ‘스페인, 너는 자유다’ 독후감 발표 현장의 풍경이다. 이 자리에서 현 씨는 책의 발자취를 따라 모은 동영상과 스페인 관련 자료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한 여직원이 스페인 배낭여행 때 찍은 사진을 책상에 펼쳐 보였다. 참석자들은 책과 여행에 대한 느낌을 자유롭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 모임의 이름은 한 배에서 난 새끼들 중 가장 먼저 태어난 새끼라는 뜻의 ‘무녀리’. 회원들은 2주에 1권씩을 읽고 토론한다. 지난해 이 모임에서 함께 읽은 책은 20권이 넘는다.

요즘 직장인의 최대 관심사는 자기계발. 그러나 막상 혼자 책을 읽을라치면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 그래서 이처럼 회사에서 함께 책을 읽는 모임이 최근 늘고 있다. 특히 직원 간 유대와 업무 향상을 위해 회사에서도 독서를 독려하면서 ‘사무실에서 함께 책 읽기’는 새로운 기업문화로 정착되고 있다.

○ 임직원 벽 허물고 역량도 높이고

무녀리의 특징은 사장부터 말단 사원까지 참여하는 모임이란 점. 자연히 무녀리에서는 직급도, 세대 간 벽도 없다. 한 젊은 직원은 ‘블링크’라는 책을 읽고 저자와의 가상 대담 형식으로 소개했다. 소설 ‘조선 왕 독살사건’ 토론 때는 조선 시대 문신 송시열의 행적을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현 씨는 “말단 사원이 사장 앞에서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말할 기회가 얼마나 있겠느냐”며 웃었다.

독서 토론은 곧장 업무 효율 향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삼성SDS 전략마케팅연구회 회원들은 월요일 오후 5시만 되면 회의실로 달려간다. 이 모임은 경제 경영서와 미래전략서 등을 집중적으로 읽고 토론한다.

2004년 이 모임을 시작할 땐 대부분이 경영학과 마케팅에는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회원들이 지난해 ‘서비스 사이언스’라는 책을 발간할 정도로 준(準)전문가가 됐다. 회원들은 모임에서 함께 읽은 책의 방법론을 곧바로 부서 업무에 적용한다.

회장을 맡은 신재훈 전략기획그룹장은 “회원들이 모임 참가 후 핵심을 잡아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발표하는 능력이 크게 향상됐다”고 말했다.

○ 중소기업의 생존전략, 독서경영

독서문화는 대기업에 비해 직원의 자기계발에 큰돈을 들이기 어려운 중소기업에 효과적인 경영혁신 전략이 되기도 한다.

휴대용 저장장치인 USB 등 데이터 저장장치를 만드는 이메이션코리아의 박세연 대리는 새해 첫 회의에서 “올해 업계 1위로 올라서자”고 강조했다. 반면 이장우 대표는 별 말 없이 ‘패스트 세컨드’라는 책을 추천했다.

“출혈을 감수하는 1위보다는 알찬 2등 자리를 재빨리 차지하자는 책의 내용에 공감했습니다. 브랜드 파워가 더 커지기 전까지 안정된 2등을 유지해야겠다고 깨닫게 되더군요.”

직원들은 한 달에 2번씩 근처 대형 서점을 찾는다. 직원들이 읽는 책은 한 달 평균 8권. 이 회사의 ‘북 랠리’는 유명하다. 1년에 두세 번 50여 권의 책을 사 회사 내 원탁에 펼친다. 30여 명의 직원은 각자 2권씩 읽고 싶은 책을 고른다. 먼저 고르는 사람이 ‘임자’이기 때문에 쟁탈전이 치열하다.

○ 책 돌려 보기도 새로운 문화로 정착

독서모임은 제한된 회원만 참여할 수 있다. 그래서 삼성카드는 ‘북 크로싱’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유석렬 사장이 매달 읽은 책의 독후감을 인터넷 사내보에 올리면 전 직원이 책을 돌려 가며 읽고 사내보에 독후감을 올린다.

CGV는 두 달에 한 번씩 책 선정팀이 추천한 책의 독후감을 회사 인트라넷에 올리면 전 직원이 이 책을 돌려 보고 또다시 독후감을 올린다. “얼굴 모르는 직원도 책을 매개로 친해지는 등 책은 직원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구심점”이라는 게 회사 관계자의 귀띔이다.

“다람쥐 쳇바퀴 굴러가듯 반복되는 업무에 책 한 권 들기란 쉽지 않습니다. 동료와 나누는 대화도 매일 똑같죠. 하지만 대화 주제가 그날 읽은 책이 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정체된다는 두려움은 사라지고 다른 세계, 미래와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겁니다.” 현 씨의 얘기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 독서모임 잘 유지하려면

지식경영을 선포한 삼성SDS 김인 사장은 매년 두 차례 7600명 전 직원에게 책을 선물한다. 또 매주 월요일 직원들에게 e메일을 보내 책을 추천하고 독서를 격려한다.

이메이션코리아 이장우 대표는 아예 “아무리 어려워도 책값은 전부 치러줄 테니 책만큼은 마음대로 사서 보라”고 직원들에게 주문했다. 이 때문에 직원들은 “책을 안 사면 손해 보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이 대표는 회의 때마다 직원들에게 “어제는 무슨 책을 읽었느냐. 느낌은 어떠냐”고 물어 직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다.

현대오일뱅크도 책값을 지원하고 독후감 경진대회를 열어 직원의 참여도를 높이고 있다. 삼성SDS 전략마케팅연구회는 2년 연속 사내 ‘신지식인상’을 받으면서 사기가 높아졌다.

좋은 책을 고를 노하우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현대오일뱅크 독서토론 모임 무녀리를 이끌고 있는 장효택 부장은 “비슷한 주제의 책 읽기만 계속하거나 많이 팔리는 책 위주로만 고르면 흥미도가 금방 떨어진다”고 말했다.

무녀리는 4, 5명의 회원으로 이뤄진 도서선정위원회가 경제·경영서와 교양·인문·과학서를 적절히 배분해 추천한다. 장 부장은 “동아일보에 연재 중인 ‘책 읽는 대한민국’ 코너는 무수히 쏟아지는 책 중에서 양서를 고르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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