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채 발행 ‘뚝’… 투자엔진도 식는다

  • 입력 2006년 9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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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총액 기준 재계 서열 9위(공기업 및 민영화된 공기업 제외)인 한화그룹은 올해 6월 말 현재 1조7346억 원을 사내(社內) 잉여금으로 쌓아놓았다.

하지만 이 회사가 올해 상반기 대규모 공장 증설에 나서거나 다른 회사를 인수하는 등 투자한 곳은 거의 없다.

한화그룹 구조조정본부 장일형 부사장은 “경기가 불확실한 데다, 외환위기 때 기업들이 유동성 문제로 무너진 ‘학습효과’도 있어 선뜻 투자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재계 서열 1위인 삼성그룹의 ‘금고’는 현금으로 꽉 차 거의 터질 지경이다. 삼성그룹은 올해 상반기(1∼6월)에 삼성전자가 4조7000억 원을 투자에 썼는데도 6월 말 현재 언제든지 쓸 수 있는 회사 돈이 무려 57조4847억 원에 이른다.

국내 채권시장에 회사채 씨가 마르고 있다.

투자를 줄이고 여유자금이 넘쳐나니 회사들이 굳이 회사채 발행으로 투자자금을 조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약 5년 전인 2001년 10월 이후 단 한번도 회사채를 발행하지 않았다.

● 회사채 시장 위축 심각

지난해 국내 기업의 회사채 발행금액은 총 40조6844억 원.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38조964억 원) 이후 가장 적은 규모다. 올해 들어서도 8월 말까지 회사채 발행금액은 19조7727억 원에 그쳤다.

채권시장에서 회사채가 차지하는 비중도 2001년 30%에서 지난해 11%로 급감했다.

우량기업들은 또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는 연장하지 않고 바로 갚고 있다.

증권예탁결제원에 따르면 회사채 발행금액보다 상환금액이 더 많은 ‘순상환’이 8월까지 3개월 연속 이어지고 있다.

● 투자할 곳이 없어서

증권전문가들은 기업들이 회사채 발행을 하지 않는 것은 여유자금이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기업들의 투자의욕이 꺾인 탓이 크다고 지적한다.

한국증권선물거래소에 따르면 6월 말 현재 539개 제조업체의 유보율은 평균 597%로 사상 최고 수준이다. 잉여금을 자본금으로 나눈 비율인 유보율은 벌어들인 자금 가운데 얼마만큼을 회사 안에 쌓아 두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특히 10대 그룹은 잉여금 144조9651억 원과 자본금 20조5276억 원으로 유보율이 무려 706%에 이른다.

한국증권업협회 채권시장실 서기석 과장은 “경기가 좋아진다는 확신이 서야 기업들이 투자를 할 텐데 미래가 불확실하니 투자를 주저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부가 제대로 된 투자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승철 상무는 “서비스업은 규제덩어리고, 첨단산업 공장은 수도권에 만들지 말라고 한다”며 “정책적 배려가 없으니 기업이 중장기 프로젝트를 제대로 짜질 못한다”고 분석했다.

한 증권사 채권담당 부장은 “기업들 사이에선 ‘이 정부 아래에선 투자할 생각이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고 귀띔했다.

● 중소기업은 벙어리 냉가슴

우량 대기업은 금고에 돈이 넘쳐나 회사채 발행이 필요 없지만 중소기업은 사정이 다르다.

신용도가 낮은 중소기업들은 회사채를 발행해도 시장에서 사지 않기 때문에 자금 조달이 쉽지 않다.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 이 시장마저 죽으면 이들 기업의 장기 투자자금 마련은 멀어진다.

한국금융연구원 강경훈 연구위원은 “은행에서 문전박대 당한 중소기업이 회사채 시장에서도 버림받으면 사실상 자금조달이 끊기는 것”이라며 “회사채 시장이 위축되면 기업자금 공급이라는 자본시장 본연의 역할이 흔들리게 된다”고 강조했다.

대한투자신탁운용 권경업 채권운용본부장은 “회사채 시장이 제 역할을 못하면 경제 성장에도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수 기자 ssoo@donga.com

김상훈 기자 sanh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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