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석자가 곧 기업평판”…CEO는 최고의 브랜드

  • 입력 2005년 3월 2일 18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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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바이러스 전문업체인 하우리는 최근 초중고교 시장에서 철수했다. 안철수연구소 때문이다. 하우리는 안철수(安哲秀) 사장의 명성 때문에 초중고교 시장에서 진입조차 어려웠고 한계를 절감했다고 한다. 일반기업에서도 실무자가 하우리 제품을 선택해도 최종 결정 단계에서 안철수연구소의 제품으로 뒤집히는 일이 가끔 있다. 최고 경영진이 실무진의 테스트 결과보다 ‘안철수’라는 이름을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기업 컨설팅·홍보 업체인 버슨-마스텔러는 2003년 미국의 경제전문가 1040명을 설문조사해 ‘CEO 명성 2003’이란 보고서를 내놓았다. 그 결과 최고경영자(CEO)의 명성이 기업 평판에 영향을 미친다는 답변이 절반이나 됐다. 국내 증권전문 인터넷사이트인 팍스넷이 같은 해 ‘CEO가 코스닥 기업 주가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3743명을 조사한 결과에서도 ‘CEO의 영향이 매우 크다’는 응답이 80%가량 됐다.》

▽‘CEO 브랜드’를 활용하라=기업 재무제표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 CEO 브랜드가 기업에 대한 투자나 인재 확보, 경영 실적, 주가에 미치는 영향이 갈수록 커지자 기업들도 이를 활용한 마케팅에 적극 나서고 있다.

기업이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으면 CEO가 보여주고, 기업이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CEO가 말하게 한다.

최근 부쩍 늘어난 CEO들의 ‘현장 경영’도 이런 전략의 일환이다.

CEO의 어떤 이미지를 부각시킬 것인지도 치밀한 계산에 따른다. 김쌍수(金雙秀) LG전자 부회장이 최근 ‘1등 LG’와 ‘강한 승부근성’을 강조하며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소비자들이 오래 쓰고 값비싼 전자제품을 구매할 때 이성적인 접근을 한다는 분석에 따른 것이다. 벤처업계에서는 CEO의 전문성을 집중 부각하고 있다.

안철수연구소 외에도 의사 출신 경영진의 전문성을 앞세워 2000년 출범하면서부터 돌풍을 일으킨 제대혈(탯줄혈액) 은행 메디포스트가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해 초저가 화장품 돌풍을 일으킨 ‘더 페이스샵’의 정운호(鄭芸虎) 사장, 밀폐용기 브랜드 ‘락앤락’을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시킨 ‘하나코비’의 김준일(金俊一) 회장은 모두 ‘한 우물을 판 CEO’의 전문성으로 승부해 성공을 거뒀다.

이 같은 경향은 이른바 ‘굴뚝 산업’으로도 확산되고 있다. 3차 산업의 관점에서 2차 산업을 이끌어야 한다는 ‘3.2차 산업론’을 주창하고 있는 허태학(許泰鶴) 삼성석유화학 사장은 “서비스업은 물론이고 제조업에서도 CEO의 평판이 기업 실적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며 “특히 업체 간 제품 품질 차이가 좁혀지면서 CEO의 이름을 보고 거래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송영선(宋永繕) 한투증권 리서치센터 기업분석팀장은 김정태(金正泰) 전 국민은행장, 윤종용(尹鍾龍) 삼성전자 부회장, 조충환(曺忠煥) 한국타이어 사장 등을 대표적인 CEO 브랜드로 들면서 “이들 CEO는 기업 주가가 내리는 것을 방어해 주는 역할까지 할 정도로 브랜드 파워가 막강하다”고 말했다.


▽국내 ‘CEO 브랜드’의 한계=국내에 CEO 브랜드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한 것은 외환위기 직후였다. 통합 국민은행을 ‘스타 은행’으로 이끌었던 김 전 행장과 침몰 직전의 한국전기초자를 기사회생시킨 서두칠(徐斗七) 전 회장 등은 ‘CEO 주가’의 대명사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오너’가 없는 회사의 전문경영인이었다는 점이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대기업의 고위 관계자는 “오너가 있는 회사에서 전문경영인이 자신의 브랜드를 자산화하기에는 제약이 있다”며 “같은 그룹 계열사의 다른 CEO에 비해 너무 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CEO도 많다”고 전했다.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반(反)기업 정서도 CEO 브랜드 시대의 걸림돌이다.

차희원(車禧嫄)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는 “최근 국내 CEO들이 사회공헌 활동에 적극적인 것은 기업 명성을 높이려는 측면도 있지만 반기업 정서를 없애기 위한 방어적 성격이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CEO브랜드와 기업가치의 인과관계를 냉철하게 되짚어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신현암(申鉉岩)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일본 닛산자동차의 카를로스 곤 사장이 인정받은 것은 1년에 3조 원의 적자를 내던 회사를 1년 만에 흑자로 전환시켰기 때문”이라며 “기업 실적이 뒷받침되고 난 후에야 비로소 CEO브랜드가 있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

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美게인스로스씨 “CEO는 정직-윤리적 이미지 보여줘야”▼

“최고경영자(CEO) 개인의 명성이 한 기업의 전체 인상을 좌우하는 경향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기업 컨설팅·홍보업체인 버슨-마스텔러의 레슬리 게인스로스(사진) 박사는 2일 본보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CEO 브랜드 구축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게인스로스 박사는 CEO의 명성에 대해 각종 연구 프로그램을 진행해 온 세계적인 ‘CEO 전문가’로 버슨-마스텔러의 최고지식조사 총괄책임자를 맡고 있다. 버슨-마스텔러는 1997년부터 2년마다 CEO의 명성이 기업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해 왔다. 다음은 본보와의 인터뷰 내용.

―버슨-마스텔러가 CEO 브랜드를 본격적으로 조사하게 된 계기는….

“지금처럼 경제 상황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는 과거처럼 부동산, 제조시설, 재고 등 유형 자산으로 기업을 평가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오히려 일반인은 CEO의 평판을 통해 기업을 인지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조직에 사기를 불어 넣고 동기 부여를 통해 조직을 이끄는 CEO의 능력을 기업 평가의 주요 척도로 삼는 투자자도 늘고 있다.”

―CEO의 브랜드 파워가 기업 실적이나 주가와 직접적인 상관 관계가 있나.

“그렇다. 우리는 특히 금융권에서 CEO의 명성에 높은 가치를 둔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CEO는 잡지의 커버모델이 될 필요는 없지만 정직하고 윤리적인 사람으로 알려져야 한다. 또 자신이 이끄는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기업이라는 점을 확신해야 한다.”

―미국 기업들은 CEO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별도의 전략을 구사하는가.

“미국 기업들은 최근 몇 년간 일어난 회계 부정 스캔들 때문에 CEO가 윤리적이고 믿을 만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국 기업이 참고할 수 있는 CEO 브랜드 전략은….

“경쟁 기업의 평판을 주기적으로 모니터해야 한다. 또 CEO는 사업 관계 외에 동문들과 언론매체, 시민단체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김상훈 기자 sanh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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