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학교육이 기술경쟁력]<하>국내 대학교육의 새바람

  • 입력 2003년 12월 9일 18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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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학들도 현장 실무능력을 배양하는 국제기준의 공학교육으로 전환하고 있다. 대학이 앞장서 산학연 협력을 추진하기도 한다. 사진은 한양대가 안산캠퍼스 안에 유치한 경기테크노파크. 국내외 71개 기업이 입주했다. 사진제공 한양대
한국 대학들도 현장 실무능력을 배양하는 국제기준의 공학교육으로 전환하고 있다. 대학이 앞장서 산학연 협력을 추진하기도 한다. 사진은 한양대가 안산캠퍼스 안에 유치한 경기테크노파크. 국내외 71개 기업이 입주했다. 사진제공 한양대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뚫어라.”

뜻있는 이공계 출신들은 대학과 기업의 단절을 ‘죽음의 계곡’에 비유한다. 이론 중심의 대학교육과 실무형 전문 인재를 원하는 기업의 시각차가 인력수급의 불균형과 산업경쟁력 저하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최근 이 ‘죽음의 계곡’을 벗어나기 위한 한국 대학들의 도전이 시작됐다. 산학 연계와 실무 교육을 강조하고, 선진국의 공학교육인증 기준에 맞춰 교과과정을 바꾸는 대학이 늘고 있다.

기업 역시 학벌보다 실무 중심으로 채용 기준을 바꾸고 정부는 산업별 산학협의체 구성에 나섰다.

▽대학·기업·연구기관의 화학적 결합=한양대 경기 안산캠퍼스에서는 요즘 굴착기를 동원한 터파기 공사가 한창이다.

한양대는 이 캠퍼스 내 10만평을 내놓고 기업과 연구소들을 끌어들여 학연산(學硏産) 클러스터(집적단지)를 만들고 있다. 대학이 주도하는 까닭에 이름도 산학연이 아니라 학연산이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산업기술시험원을 유치했고 71개 기업은 이미 옮겨 왔다.

한양대의 도전은 대학, 연구기관, 기업체의 물리적 공간적 결합에 그치지 않는다. 3자가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대학의 교육과정까지 바꾸는 화학적 결합을 추진하고 있는 것.

클러스터 사업단장인 이재성 교수(재료공학과)는 “400∼500명의 박사급 연구인력과 첨단 연구시설을 갖춘 ‘국내 최대의 부품산업 클러스터’가 목표”라면서 “클러스터를 통해 실용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교육기능도 강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연구기관이나 기업의 박사급 연구원을 겸임교수로 임명해 강의를 맡기고, 교수가 연구기관이나 기업체 연구원으로 일하는 인적 교류도 추진할 예정이다.

한양대 안산캠퍼스는 이번 2학기에 기업 현장에서 실무를 배우는 ‘클러스터 교육과정’을 개설했다. 이 과정에는 2학년 정원의 30%인 628명이 참여했다.

▽교과과정을 국제기준에 맞춘다=한국전력에 근무하는 K씨는 작년부터 미국 오리건주 기술사(PE) 시험을 준비해 오다 최근 중단했다. 시험 당국이 ‘한국 공과대학 교육과정은 국제인증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시험 자격을 줄 수 없다고 통보했기 때문.

미국 영국 캐나다 등 20여개 나라는 교과과정과 시설, 교수진 등의 기준을 정해놓고 학과(學科) 단위로 공학교육을 인증하는 ‘워싱턴 협정’에 가입해 있다.

한국 대학들도 국제 공학교육인증 기준에 맞춰 교과과정 개편에 나섰다.

한국공학교육인증원은 2001년부터 국제 기준을 적용한 공학교육을 인증하고 있다. 심사진은 기업인과 교수 250여명. 한국이 2007년 워싱턴 협정에 가입하면 국내 인증이 해외에서도 효력을 갖는다.

인증을 받은 곳은 2001년 동국대 영남대 등 2개 대학, 11개 학과에서 올해는 총 9개 대학 57개 학과로 늘어났다.

인증 기준에 맞추려면 공학 실무 수업이 4년간 60학점을 넘어야 한다. 교육인적자원부 기준(졸업에 필요한 최소한의 전공학점)인 36학점의 2배에 달하는 수준. 또 공학윤리, 공학경영, 리더십, 의사소통 방법 등의 과목을 개설해야 한다.

산학 연계도 중요한 인증 기준. ‘창의적 종합설계(캡스톤 디자인)’ 과목이 대표적이다. 이는 학생이 기업과 공동으로 제품의 설계부터 제작까지 마쳐 졸업논문을 대신하는 제도. 이 과목을 개설한 대학은 작년 8개 대학에서 올해 21개 대학으로 증가했다.

공학교육인증원 이사장인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출신 대학을 살피기보다는 공학교육인증을 통해 실력이 검증된 인력을 우선 채용하겠다”고 말했다.

▽특성화와 기업 맞춤식 교육=충북 주성대, 산업기술대, 대구 영진전문대 등은 매년 수십대 1의 입학 경쟁률을 나타낸다. 기업 수요에 맞춘 교육으로 취업률이 90%를 넘는 까닭.

산업기술대는 기업체에 근무하는 겸임교수가 188명으로 정규 교수 103명보다 많다. 교직원의 96%는 기업에 근무한 적이 있다. 교과과정도 매년 기업의 수요를 조사해 짠다. 이 학교의 가명현 산학협력과장은 “실습 중심으로 특화한 교육이 경쟁력”이라고 소개했다.

주성대는 음향공학과 정원을 99년 40명에서 2001년 80명으로 늘렸다. 음향 관련 기업들이 학과 정원을 늘려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기업 수요에 맞춰 정원을 늘렸기 때문에 취업률은 99년 이후 100%를 유지하고 있다.

영진전문대는 ‘프로젝트 교수제’를 운영하고 있다. 교수마다 담당 기업을 정해 기업에 기술지원을 하는 제도. 이 과정에 학생들이 참여해 실무를 익힌다.

정진화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일부 연구 중심 대학을 빼고는 산업 중심으로 특성화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산학 협의체 만든다=정부는 내년부터 ‘산업별 인적자원개발 협의체’를 만들 계획이다.

산업별로 대학과 기업이 만나 △인력 수요 분석 △대학 교과과목 재편 △산학 연계 프로그램 운영 △각종 자격기준 제정 등을 협의하는 기구다.

내년에는 우선 전자, 자동차, 기계, 화학 등 4개 분야의 협의체를 구성할 예정. 산업자원부는 협의체 구성으로 인력개발의 주도권이 정부에서 기업 및 대학으로 넘어갈 것으로 기대했다.

안현호 산자부 산업기술정책과장은 “기업이 선심을 쓰듯 대학에 투자하지 말고 경영 전략에 맞는 학교와 학과를 선택해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민동준 연세대 공대 교학부장은 “대학 평가나 학생 선발, 학점제도 등에서 대학의 자율을 확대하는 것도 정부의 과제”라고 지적했다.

이은우기자 libra@donga.com

박 용기자 parky@donga.com

▼조환익 산업기술재단 사무총장 기고 ▼

한때 이공계 출신, 특히 공대생은 ‘단무지’라는 평을 들었다.

단무지란 단순한 데다 무식하고 지루하다는 말의 줄임말이다. 좋게 풀이하면 공대생은 장인정신에 쏙 빠져 있는 사람들, 매일 계속되는 전공 공부로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볼 겨를이 없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이런 평가 속에 그들이 땀 흘린 만큼 기술혁신이 있었고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를 맞았다.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로 가기 위한 동력도 역시 그들 몫이다.

그러나 현실은 우울하다. 기업 수요의 두 배에 이르는 공대 정원 탓에 청년 실업자가 양산되고 그나마 졸업생의 실무능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기업들은 신입사원을 거의 원점에서 다시 교육시키느라 막대한 비용을 치르고 있다. 어떤 기업인은 “일본은 대졸 신입사원을 3년 정도 교육시키면 숙련된 기술자가 되는데 우리는 3년이 지나야 겨우 일을 맡길 수 있는 수준”이라고 불만을 쏟아낸다.

공학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기업의 대학에 대한 투자를 강제로 늘릴 수는 없다. 공대 정원을 수요에 맞춰 갑자기 줄이는 것도 입시생과 학부모의 반발 등 사회적 부담이 크다.

우선 바꾸거나 개선할 수 있는 제도부터 살펴야 한다.

교육부는 공대 졸업을 위해 필요한 최소 전공학점을 36학점으로 줄였다. 전공뿐 아니라 다른 학문도 이해해야 한다는 취지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적어진 전공수업은 공대생의 전공 능력을 감소시켰다.

최악의 취업난을 겪고 있는 이 나라에서 공부하기 어려운 과목은 기피 대상 1호다.

공대생들은 어려운 전공수업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200명씩 모인 대형 강의실에서 노트 필기만 열심히 하고 토익 학원에 다니면서 취업할 궁리만 한다.

이 때문에 공대생인지 인문 사회대생인지 구별할 수 없는, 특징 없는 대졸 미취업자만을 양산하고 있다.

다소 일률적인 대학평가제도도 개선돼야 한다. 평가에서 중요한 것은 국제학술지에 실린 교수들의 논문 건수다. 또 학부제를 운영해야 평가에 가산점을 받는다. 좋은 평가를 받아야 정부지원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대학들은 정부의 평가 기준에 맞출 수밖에 없다.

대학마다 특성을 가져야 하는데 전공과목 학점이나 대학 평가, 학부제 등에 대해 일률적으로 기준을 정하는 것은 그 자체가 규제이다.

정부와 기업, 대학은 요즘 창의적 공학교육 프로그램, 연구현장 교육 연수, 현장실습 학점제 인증 확대 등을 추진하고 있다.

현장과 실습 중심의 공대 커리큘럼을 만들고 이를 잘 따르는 공대생에게 취업 등의 인센티브를 주려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공대생들의 실무 능력을 기르고, 기업들의 재교육 비용을 줄여준다.

기업의 사고도 바뀌어야 한다. 대학에 대한 지원을 선심으로 생각해선 곤란하다. 좋은 인재를 얻기 위한 장기 투자로 인식하고 대학 지원을 늘려야 한다.

근본적으로 이공계 위기를 해결하고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열려면 제조업에 다시 활력을 불어 넣어야 한다.

이공계 일자리가 충분치 않으면 이공계 기피 현상은 계속 될 수밖에 없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 공학교육 부재(不在)의 근본적 치유책이다.

또 정보기술(IT), 생명공학기술(BT) 등 신기술과 전통 제조업이 융합된 ‘2.5차 산업’의 발전도 이공계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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