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싱크탱크]<2>한국개발연구원(上)

  • 입력 2003년 6월 17일 19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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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를 예측하고 한국정부의 무(無)대책을 신랄하게 비판해 주목을 받았던 경제분석가 스티브 마빈은 1998년 7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년 말 내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한국의 정책브레인) 집단 안에 지금 무엇이 이뤄져야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작년에는 많이 의심했다. 하지만 지금은 의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있다.”

그가 말하는 ‘사람들’이란 누구일까. 이어지는 그의 말.

KDI 연구위원들이 신문을 펴놓고 경제동향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심상달 선임연구위원, 김중수 원장, 조동호 북한경제팀장, 우천식 지식경제팀장, 설광언 선임연구위원, 전홍택 부원장, 최경수 연구위원, 김동석 연구위원, 유정호 경제정보센터소장, 성소미 법·경제팀장, 노기성 국제교류협력센터소장, 김준경 연구조정실장, 김재형 공공투자관리센터소장. 김미옥기자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작년(97년)에 발표했던 보고서들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 4월(98년)에 발표된 보고서는 정말 너무 좋았다. 어떻게 불과 4개월 사이에 이렇게 커다란 변화가 있었을까. 아마 작년에도 KDI의 젊은 친구들은 정말 좋은 보고서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공개되지 못했을 것이다.”

▽무슨 변화가 있었을까=그가 찬사를 아끼지 않은 보고서는 KDI가 98년 4월 발표한 ‘경제위기 극복과 구조조정을 위한 종합대책’을 말한다.

공적자금 100조원 투입, 선(先) 금융구조조정, 사회안전망 확충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이 보고서는 작성 직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게 보고돼 외환위기 극복 대책의 ‘기본틀’이 됐다.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종합 청사진’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KDI가 97년에는 왜 침묵했을까.

96년 반도체 가격이 폭락하면서 경상수지 적자가 빠르게 증가하자 KDI는 원화 평가절하(환율 인상)를 여러 차례 정부에 건의했다.

이에 대해 당시 재정경제원은 “딴죽 걸지 말라”며 신경질적 반응을 보냈다. 97년 1월 KDI 조찬모임에 참석한 청와대 고위관계자도 “환율 인상은 수용하지 않겠다”며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모임이 끝난 뒤 KDI 연구위원들의 입에서는 “(외환위기를 겪은) 멕시코처럼 가겠네요”라는 탄식이 이구동성으로 터져나왔다.

물론 이것만으로 KDI가 국책연구기관으로서 국가적인 경제위기를 사전에 경고하고 대책을 내놓아야 하는 역할을 다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KDI는 정부 공식통계에 집착해 사태를 낙관적으로 보았던 것도 사실이다.

▽거시경제의 파수꾼=국가 주도의 경제개발이 막을 내리면서 KDI의 역할 가운데 가장 비중이 커진 부문은 거시경제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그에 맞는 정책적 대응을 권고하는 것이다.

이에 관한 한 KDI의 ‘권위’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를 보자.

KDI는 작년 10월 2003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5.3%로 전망했다.

지금 보면 너무 낙관적이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지만 당시에는 국내외 대부분의 경제전망기관을 통틀어 가장 비관적인 분석이었다.

여기에는 국책연구소가 너무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으면 경제주체들의 심리가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진짜 전망’보다 ‘발표 전망’이 높아진 말 못할 속사정도 있다. 그런데도 청와대에서는 “KDI가 선거를 망치려 하느냐”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올해 들어 경기가 예상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나빠지자 4월 10일 KDI는 2조∼3조원대의 추경예산 편성과 금리의 신축적인 운용(금리 인하)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때는 이라크전쟁과 북한 핵문제 등 불확실성이 너무 커 경기흐름을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정책은 KDI가 건의한 대로 전개된다.

조금 지난 이야기지만 금리가 연 12% 수준이던 98년 6, 7월경 추가 금리인하 반대 여론이 압도적인 상황에서 저금리로 물꼬를 돌린 것도 KDI다.

KDI의 조동철(曺東徹) 연구위원은 8월 중순경 고금리 옹호론을 하나하나 반박하는 보고서를 만들어 재정경제부에 전달했다. 한국은행 총재를 직접 찾아가 금리 인하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추가 금리인하에 부정적이었던 한은은 한달 반 뒤 콜금리를 1.0%포인트 전격 인하하고 추가 금리인하 방침을 밝혔다. 이때를 기점으로 주가와 경기는 상승세로 돌아섰다.

▽KDI를 이끄는 주역들=김중수(金仲秀) 원장은 1983년부터 10년간 선임연구위원으로 활동한 뒤 이직과 재입사를 반복했다. 이후 대통령경제비서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준비사무소장, 한국조세연구원 원장, 경희대 아태국제대학원장 등을 지냈으며 2001년 8월 원장으로 KDI에 네 번째 입사했다. 미국 와튼계량경제연구소(WEFA)에서 근무할 때 2년 동안 거의 매일 오전 4시에 퇴근했을 정도로 일 욕심이 많고 완벽을 추구한다.

전홍택(全洪澤) 부원장은 한은 조사부와 한국금융연구원에서 근무했고 KDI에서 금융팀장 북한경제팀장 연구조정실장을 지냈다. 행정 수완이 뛰어나고 KDI의 ‘안살림’을 총괄하고 있다.

연구기획과 지원을 책임지고 있는 김준경(金俊經) 연구조정실장은 연구소 경비원들이 가장 싫어하는 인물. 행정을 맡기 전에는 매일 오전 4시에 출근해 연구에 매달렸다. 밤잠을 방해받은 경비원들의 항의에 나중에는 창문을 잠그지 않고 퇴근했다가 현관 대신 창문으로 출근했다.

부원장을 지낸 유정호(兪正鎬) 경제정보센터소장은 KDI 최고참. KDI는 “어느 곳보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토론 분위기를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데 유 소장이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일등공신’이다.

김재형(金在亨) 공공투자관리센터 소장은 매년 사업규모가 500억원 이상인 공공사업의 타당성 평가를 정부에서 위탁받아 그중 절반을 기각해 국가예산을 절약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공공사업 예비타당성 조사 수행방안에 관한 아이디어가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조동철 거시경제팀장은 KDI의 ‘간판 스타’로 거시경제 전망의 국내 최고권위자 가운데 한사람.

나동민(羅東敏) 금융경제팀장은 97년 당시 연구위원이던 이덕훈 우리은행 행장, 최범수 국민은행 부행장, 함준호 연세대 교수 등과 함께 ‘KDI 4인방’으로 금융개혁위원회에 참여해 금융구조조정의 틀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문형표(文亨杓) 재정복지팀장은 공무원연금 적자구조개편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신변의 위협을 받고 한때 해외로 피신한 일화가 있다. 지금도 연기금 적자 문제만 나오면 열기를 뿜는다.

우천식(禹天植) 지식경제팀장은 미국 크렘슨대에서 조교수를 지낸 준재(俊才)형. 장기비전연구를 책임지고 있으며 교육개혁에 관심이 많다.

성소미(成素美) 법·경제팀장은 KDI의 첫 여성팀장. 공정거래법 제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2001년 쓴 ‘한국의 벤처: 평가와 전망’은 벤처기업 연구의 학문적 토대를 닦았다는 평. 그의 남편인 애런 한씨는 하버드대 교수에서 벤처기업가로 변신해 화제를 모았다.

조동호(曺東昊) 북한경제팀장은 원래 노동 분야를 전공했으나 10년 이상 북한경제 연구에 몰두해 이 분야의 권위자로 꼽힌다.

천광암기자 iam@donga.com

▼KDI가 배출한 인사들 ▼

한국개발연구원(KDI)은 1971년 설립됐다. 33년의 역사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박사급 연구위원 가운데 정년퇴직자가 단 한 명도 없다. 다른 부문에서 쉴 새 없이 스카우트 손길이 미쳤기 때문이다.

KDI는 33년간 정계 관계 학계 금융계 기업계 등에 수많은 인재를 공급해 왔다.

우선 KDI 출신으로 정부에서 차관급 이상 고위 공직자를 지낸 인물만 13명에 이른다.

김만제(金滿堤) 전 경제부총리, 사공일(司空壹) 전 재무부 장관, 구본영(具本英) 전 과학기술처 장관, 최광(崔洸) 전 보건복지부 장관, 서상목(徐相穆)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 5명은 KDI를 떠난 뒤 장관을 지냈다.

강봉균(康奉均) 의원은 정보통신부 장관, 재정경제부 장관을 먼저 하고 KDI 원장을 지냈지만 옛 경제기획원 근무 시절 KDI에 파견 근무한 인연이 있다.

김기환(金基桓) 전 상공부 차관, 박영철(朴英哲)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박세일(朴世逸) 전 대통령정책기획수석비서관, 정진승(鄭鎭勝) 전 환경부 차관, 김대영(金大泳) 전 건설부 차관, 양수길(楊秀吉) 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사, 이동걸(李東杰) 현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등도 KDI 출신이다.

KDI 출신 대학교수는 150명이 넘는 것은 확실하지만 너무 많아서 정확한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KDI 김준경(金俊經) 연구조정실장은 “KDI 설립 초기만 해도 미국에서 현대식 경제학을 전공한 국내 교수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면서 “KDI가 미국에서 좋은 인력을 뽑아와 대학에 공급한 공로도 높이 평가 받을 만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대선에서는 노무현(盧武鉉) 후보와 이회창(李會昌) 후보의 경제 분야 ‘특급 참모’가 모두 KDI 출신이어서 화제를 모았다.

KDI 국제정책대학원의 유종일(柳鍾一) 교수는 노 후보의 ‘경제 가정교사’를 맡으면서 선거공약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KDI 연구위원 출신인 유승민(劉承旼) 여의도연구소장은 2000년부터 대선 때까지 모든 분야에 걸쳐 이 후보의 ‘싱크탱크’로 활동했다.


천광암기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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