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우수입' 위기의 한우시장]실태와 대책

  • 입력 2002년 12월 19일 18시 28분


경기 화성시 태평목장에서 농민들의 반대로 사료를 구하지 못하자 호주에서 들여온 ‘블랙앵거스’종 소들이 볏짚을 먹고 있다.
경기 화성시 태평목장에서 농민들의 반대로 사료를 구하지 못하자 호주에서 들여온 ‘블랙앵거스’종 소들이 볏짚을 먹고 있다.
《한국인에게 ‘누렁소’ 한우는 ‘고기’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농가의 가장 큰 재산이자 듬직한 일꾼이었고 또 가족이었다. 이런 한우시장에 최근 들어 변화의 바람이 매섭게 불고 있다. 내년 1월부터 본격화되는 ‘생우(生牛) 수입’으로 위기에 직면한 한우 시장을 종합 점검한다.편집자註》

“아예 소 떼를 길거리에 풀어 버려 생우(生牛)가 시장에 나오는 것을 결단코 막겠다.”

대통령 선거 투표 하루 전인 18일 오후 경기 화성시의 태평목장 진입로.

전국 한우협회가 설치한 ‘컨테이너 감시 초소’에서는 추위가 아니어도 한기(寒氣)가 저절로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 농장에는 9월 말 국내에 들여온 어른 어깨 높이의 호주산 생우 송아지 563마리가 사육되고 있기 때문.

축산농민들은 이 목장이 생우를 들이자마자 농협과 사료업체 등에 호소해 사료를 공급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다. 생우 수입은 한국 땅에서 한우(韓牛)가 사라지는 ‘신호탄’이라는 게 농민들의 주장이다.

반면 수입업체들은 한국 축산농들의 반발을 적법한 수입을 막는 ‘불법 집단행동’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주무 부처인 농림부는 양쪽의 눈치만 보며 어정쩡한 입장이다.

▽뿌리 깊은 반목과 불신〓농림부 관계자들은 세계무역기구(WTO) 협상에 따라 수입량 제한을 명문화할 수는 없지만 검역 시설을 더 짓지 않겠다고 거듭 약속했다. 이럴 경우 검역의 한계 때문에 한 해 생우 수입량은 전국 한우 마릿수의 0.01%에 못 미치는 8500여마리로 제한된다. 시장에 영향이 없는 양이다.

그러나 농민은 정부의 약속을 믿지 않는 눈치다. 정부는 87년 호주산 소 7만7000여마리를 번식용과 도축용으로 들여왔다가 전량 도축해 소값 파동을 불러온 전례가 있다. 당시에도 검역시설이 모자랐지만 현장 검역을 동원했던 만큼 검역시설 운운은 ‘립서비스’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이런 불신은 지난해 9월 호주 생우가 처음 국내로 들어오자 농민들의 집단 행동으로 폭발했다. 정부는 우여곡절 끝에 수입 생우를 사들여 도축하는 수준으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올 9월 다시 생우가 수입됐고 축산농들과 정부의 반목은 깊어가고 있다.

▽소 없는 외양간이 늘고 있다〓이 같은 축산정책에 대한 불신은 한우시장의 위축을 부추겼다. 한우 농가는 96년 말 51만3000가구에서 지난해 말 23만5000가구로, 올 10월 말 현재 21만8000가구로 줄었다.

수입업자들은 생우를 수입해 텅 빈 외양간을 채울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농민들은 오히려 한우 몰락에 쐐기를 박는 ‘직격탄’이라고 주장한다.

농민부터가 한우의 경쟁력을 자신할 수 없어서다. 올 9월 현재 한우 고기의 1등급 판정 비율은 34.9%. 한우 100마리 가운데 60% 이상은 호주산 생우와 비슷한 2, 3등급의 고기로 판정되고 있다. 결국 가격 경쟁력에서 밀리는 2, 3등급 한우는 설 자리를 잃는 셈이다. 축산기술연구소 이상철 박사는 “한우의 이상적인 경쟁력을 100점이라고 봤을 때 현재는 65점 안팎에 불과하다”고 진단했다.

특히 생우를 국내에 반입해 6개월 이상 키우면 수입산보다 값이 높은 국산 쇠고기로 유통할 수 있다. 비록 호주 등 수출 국가를 원산지로 표시하지만 한우와 같은 국산 정육코너에 비치할 수 있다. 호주 생우 값은 수입 비용을 합산해도 한우의 60%대 수준에 불과하다. 누구라도 군침을 흘릴 만한 사업이다.

▽이상할 만큼 넘쳐나는 한우 고기〓농민과 전문가들은 한우 도축량과 현재 한우 소비량과는 큰 차이가 난다면서 한우로 둔갑한 육우(수젖소 고기 등) 또는 수입육이 상당량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서울대 수의학과 황우석 교수는 “한우고기가 시장에 넘쳐나는데 결국 가짜가 많다는 것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

농협중앙회 서울축산물공판장 임남빈 경매실장 역시 “도매 정육점 등에서 수입육을 한우로 많이 둔갑시키고 있다”면서 “또 등심 200g에 2만원 이하의 한우 고깃집은 가짜라고 보면 무리가 없다”고 말했다.

▽고비를 어떻게 넘을 것인가〓중요한 것은 불신을 해결하는 것. 농민들은 ‘칼자루’를 쥔 정부가 먼저 성의를 보일 것을 주문하고 있다. 한우협회 장기선 부장은 “수입 개방은 대세라는 것을 농민도 인정한다”고 전제한 뒤 “한우 유통질서를 확립하고 민관합동의 한우경쟁력 프로그램이 마무리되는 2005년까지 한 해 수입물량을 8500여마리로 유지해달라”고 주문했다.

한우 사육을 규모화하고 육질을 고급화하는 노력도 시급하다. 고급육 생산의 토대인 한우 수소의 거세를 유도하고 150여개로 난립 중인 국내 한우 브랜드들에 대해서도 ‘품질 인증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대 황우석 교수는 “거세를 하면 소의 성장기간이 60% 가까이 느는 만큼 이 비용을 상쇄하는 가격지지 정책과 만성적 공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한우를 180만마리로 유지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450kg 호주 생우와 한우가격 비교
가 격비 고
한우332만6000원더디 자람
호주생우222만원빨리 자람. 관세, 운송비 등 비용 포함

한국쇠고기 시장의 각종 지표들
구분(단위)95년 2000년 2001년 2002년9월 현재
쇠고기 수입량(t)14만800022만300016만600022만
쇠고기 자급률(%)51.452.842.834.3(연말 추정치)
한우 사육 마릿수259만4000159만140만6000146만1000
사육 농가51만900029만23만500021만8000

이헌진기자 mungchii@donga.com

박 용기자 parky@donga.com

박형준기자 lovesong@donga.com

▼논산 우시장 가보니▼

18일 오전 5시반, 충남 논산시 부적면에 자리잡은 우시장의 문이 열렸다. 전국에서 모여든 소들이 흰 콧김을 내뿜으며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상인들의 발걸음도 바빠졌다. 먼저 소의 엉덩이 살을 보며 영양상태를 살폈다. 갈비뼈를 꾹꾹 누르면서 적당히 지방이 붙어 있는지도 점검했다. 발품을 파는 만큼 남들보다 더 좋은 소를 살 수 있다. 좋은 소를 고르면 가격 흥정이 오간다. “9300원 어때?” “무슨 소리, 9700원은 너끈하게 받을 수 있는 놈인데.”

최근 한우 암소 시세는 1㎏에 9500원 정도. 3년 전만 해도 5000원이었던 소 값이 2배로 뛴 상태다. 하지만 이 시세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96년 소 값이 ㎏당 2700원까지 떨어졌던 것처럼 사육 마릿수가 늘어나면 값이 폭락할 수도 있다.

농민들은 덜 키운 소를 우시장에 내놓기 일쑤다. 논산 우시장에서 암소 3마리를 판 김진성씨(44·충북 영동군)는 “한달 후 8000원에 시세가 형성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절반 정도 자란 소를 그냥 팔았다”며 “소 가격을 예측할 수 없으므로 시세가 좋을 때 빨리 넘기는 게 상책”이라고 말했다.

호주에서 들여온 송아지도 근심거리다. ‘싸리골 목장’을 운영하고 있는 조태범씨(42·충남 부여군)는 “호주산 송아지가 싸게 들어온다면 목장 주인들은 모두 호주산 송아지로 바꿀 것”이라며 “그러면 한우는 자연히 씨가 마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소 100여마리를 사육하는 박광우씨(63·충남 논산시 연무읍)는 “호주산 송아지 수입이 불가피하다면 적어도 유통 과정은 정부가 철저하게 감시해야 한다”며 “호주산 육우가 한우로 둔갑하는 순간 한우 농가는 끝”이라고 말했다.

박형준기자 lovesong@donga.com

▼일본 시장개방 대처▼

호주와 미국의 쇠고기 수출업체들은 한국 및 일본을 ‘황금시장’으로 여기고 있다. 이들 국가의 세계 3대 수출국에는 두 나라가 모두 포함된다. 따라서 수출업체들은 한국인과 일본인 입맛에 맞는 상품을 따로 생산하는 등 활발한 시장 공략을 하고 있다.

일본은 91년 4월 생우시장을 개방했다. 일본 역시 개방 초기 해마다 1만여마리의 생우가 수입되면서 고유 품종(和牛·화우)이 급속히 사라져 갔다. 1990년대 중반 일본 농림수산성이 ‘고급화’와 ‘투명화’로 ‘화우 지키기’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흐름을 바꿨다. 또 개방 이후 검역시설을 늘리지 않는 정책을 취해 수입량이 확대되지 않도록 했다.

이와 함께 송아지 때부터 품종 고급화를 시도했다. 유전 형질을 철저히 관리, 지역 브랜드를 가진 소는 외부로 유출시키지 않았다. 덕분에 흑모화종(黑毛和種), 갈모화종(褐毛和種) 등 일본인 누구나 인정하는 우수한 품종의 화우가 개발됐다.

유통시장의 투명성도 높였다. 한 예로 농림수산성은 지난해 말부터 슈퍼마켓에서 파는 소고기에 ‘추적코드’를 찍게 했다. 이것만 있으면 품종, 사육 사료, 도축장 등에 대한 정보를 추적할 수 있다.

영남대 자연자원대 조석진 교수는 “일본은 화우 시장과 수입육 시장이 완전히 구별된다”면서 “비록 수입육보다 15배 비싸더라도 특별한 날에는 화우를 먹겠다는 소비자들이 많아 일본 축산 농가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박 용기자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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