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포커스]컨설팅업계 ‘군살빼기’ 추운 겨울

  • 입력 2002년 2월 14일 17시 45분


지난달까지 프랑스계 컨설팅업체인 캡제미나이 언스트영에 근무하던 L씨(34)는 얼마전 국내 정보기술(IT) 관련 기업으로 옮겼다.

본사가 누적된 손실을 이유로 서울사무소를 폐쇄한 게 작년 말. 70여명의 동료들은 다른 컨설팅업체를 찾아갔지만 L씨는 컨설턴트 일을 계속할지 여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다 전직을 결심했다. 그는 “4년 넘은 컨설턴트 경력을 포기하는 게 쉽진 않았지만 컨설팅업계 사정이 점점 어려워질 것 같아서…”라고 털어놓았다.

‘화려한 시절’은 가고,‘잔인한 계절’이 찾아온 것인가.

최근 몇 년간 한국에서 급성장 가도를 달려오던 컨설팅업계가 호된 시련을 맞고 있다. 구조조정이 마무리단계에 접어들어 컨설팅 물량이 줄어들면서 ‘구조조정을 먹고 살던’ 컨설팅 업계가 이젠 ‘스스로를 구조조정 해야 할’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브레이크 걸린 급성장세〓국세청에 따르면 1997년 1200억원 정도이던 한국내 외국계 컨설팅업계의 연간 매출액은 2000년 2100억원 정도로 급증했다. 매출액 집계가 제대로 안 되는 컨설팅업계 속성을 감안하면 실제 시장 규모는 훨씬 더 클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 업체를 포함할 때 실제 컨설팅시장 규모는 1조원 정도로까지 업계에서는 잡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급성장세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급격히 꺾이고 있다. 국내 기업과 금융기관 등의 구조조정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이 구조조정의 필수절차로 여기면서 컨설팅을 받는 것이 ‘유행’이었으나 이젠 그런 바람이 잠잠해졌다. 게다가 작년부터 새로운 수요 역할을 했던 전사적 자원관리(ERP)의 경우도 대부분의 기업이 이미 도입을 끝내 시장을 더욱 위축시키고 있다.

시장 규모는 정체된 반면 경쟁은 치열해졌다. ‘한국시장 전망이 좋다’며 너도나도 뛰어든 데다 삼성경제연구소 등이 ‘한국기업 컨설팅은 역시 토종업체가 유리하다’며 틈새를 파고들고 있다.

▽남의 머리 깎다 제 머리 깎아야〓인력을 늘리는 데만 익숙했던 컨설팅업체들은 이제 인력을 줄이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남의 회사에 대해 “인력을 줄이라”고 훈수만 했던 컨설팅업체들이 이제 자신의 ‘군살빼기’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확장기에 세웠던 신규채용 계획도 줄줄이 보류했다. 한 업체는 작년 말부터 감원 명단을 작성해 10% 이상의 인력이 ‘퇴사 대기’ 상태다.

프로젝트에 한번 참여한 컨설턴트는 일정한 기간 휴직케 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도 나왔다. 액센츄어는 작년 말부터 450여명의 컨설턴트를 대상으로 연봉의 20% 정도만을 지급하는 ‘순환휴직제’를 실시하고 있다. 직원들에게 재충전의 기회를 준다는 취지지만 이 제도를 통해 프로젝트가 줄면서 남아도는 컨설턴트 인력을 처리하고 있다. 현재 50여명의 컨설턴트들이 ‘휴가’중이다. 액센츄어측은 “한국의 IT컨설팅 시장은 여전히 성장 전망이 좋은 편이며 순환휴직제는 단순히 인력 구조조정 차원은 아니다”고 말하지만 ‘공격경영’ 기세가 많이 꺾인 것은 사실이다.

99년 4월 40여명의 컨설턴트 인력으로 한국 영업을 시작해 지난해까지 190여명으로 인력을 늘린 딜로이트도 올해엔 그때그때 해당 분야에 전문성을 갖춘 컨설턴트 한 두명씩만 충원하기로 했다.

‘저가 경쟁’도 심해지고 있다. 업체들은 할인정책이라고 강변하지만 많은 업체들이 30% 이상 비용을 깎아주는 사실상의 덤핑 수주에 나서고 있다.

한 IT전문 컨설팅업체는 컨설턴트 1인당 평균 하루 3000만원 안팎으로 책정하는 프로젝트 수주금액을 1000만∼2000만원으로 낮춰 수주하면서 컨설팅업계의 출혈경쟁을 유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극화와 합종연횡〓구조조정은 결국 양극화 현상을 심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흉년에는 가난한 사람이 더 고통을 받듯이 상위업체들은 시장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로 여기고 있다. 1급 고가전략을 고수하고 있는 매킨지는 두산중공업의 전략구매 건을 따내 매달 60억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반면 소규모 어느 업체는 ‘특수관계’를 통해 유지해왔던 기존 거래처가 떨어져 나갈 위기에 처하면서 생존의 갈림길에 서 있다.

보스턴컨설팅그룹 이병남 부사장은 “컨설팅업계가 어려움을 겪게될 올해는 업체간의 우열 구분이 명확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업계에서는 올해 안에 국내 외국계 9대 컨설팅업체 중 한 두개는 문닫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남은 업체도 합종연횡 등 대규모 짝짓기가 벌어질 것으로 관측돼 올해 컨설팅업계는 ‘어지러운 한해’를 맞을 전망이다.

이명재기자mjlee@donga.com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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