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불황 카르텔'로 활로 모색

  • 입력 2000년 11월 1일 18시 33분


9월21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전경련 긴급회장단 회의. 고유가와 자금경색 등 현안에 대한 논의가 끝날 무렵 손길승 SK 회장이 진지한 표정으로 운을 뗐다. 그는 “어느 업종, 어떤 회사가 어려운지는 기업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잘 알지 않느냐. 협조할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가며 모두가 사는 길을 찾아보자”고 말했다. 손회장은 ‘어려운 업종’의 예로 화섬을 꼽았다.

듣기에 따라서는 기업간 ‘빅딜’(대규모 사업교환)을 재개하자는 제의로 해석될 만한 발언. 하지만 한 참석자는 “과잉재고로 고민하는 분야가 있다면 생산량 등을 정할 때 협의해보자는 뜻으로도 들렸다”며 ‘불황 카르텔’을 염두에 둔 것으로 받아들였다.

전경련 손병두 부회장은 1일 “경기가 급격히 나빠져 기업마다 이 위기를 어떻게 이겨나갈지 걱정이 많다”며 “전경련 산하 산업위원회에서 불황 카르텔을 포함해 다양한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재계, 불황 카르텔로 활로 모색〓불황 카르텔은 일시적인 불경기를 극복하기 위해 기업들이 가격이나 생산량을 공동으로 조절하는 일종의 담합행위. 수요 감소와 공급 과잉이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경기순환상 불가피하게 나타난 현상일 경우 설비폐쇄와 같은 극단적 방법 대신 기업간의 자율 조정으로 위기를 벗어난다는 개념이다. 전통적 의미의 카르텔과는 달리 담합의 취지가 ‘순수’하다는 점에서 서구에서는 예외적으로 인정되기도 한다.

재계가 불황 카르텔의 적용 대상으로 꼽는 분야는 철강 화섬 유화 등 최근 과당경쟁으로 인해 채산성이 악화된 몇몇 업종.

화섬업계는 SK케미칼과 삼양사의 통합법인인 휴비스가 1일 공식 출범했지만 여전히 공급과잉에 시달리고 있다. 철강은 건설경기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으면서 철근 등의 수요가 크게 줄었고 자동차 내수 위축으로 차체에 쓰이는 냉연강판 등의 판매가 격감했다. 유화업계도 국제유가 급등으로 원가 부담이 커져 고전하는 실정.

전경련 관계자는 “상당수 기업들이 내심 불황 카르텔의 필요성을 느끼지만 공정거래위원회를 의식해야 하는데다 업계 내부의 경쟁도 치열해 선뜻 공론화를 못하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불황 카르텔은 대안인가〓불황 카르텔이 새 대안으로 부각되는 이유는 외환위기 이후 정부 주도로 추진된 빅딜이 일부 성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부작용을 낳았다는 반성 때문. 전경련 이승철 지식경제센터 소장은 “빅딜은 복수의 경쟁업체가 단일법인으로 통합되고 생산설비도 집중되는 탓에 나중에 경기가 살아나도 독점구조가 그대로 유지된다”며 “이는 기업간 경쟁을 가로막아 장기적으로 산업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장애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불황 카르텔은 업종별로 경쟁체제를 유지하면서 ‘불경기 탈출’이라는 제한된 범위 내에서 조건부로 손을 잡기 때문에 경기가 회복되면 곧바로 원상 복귀가 가능하다는 설명.

그러나 가뜩이나 경기가 안 좋은 상황에서 불황 카르텔을 허용할 경우 기업들이 무리하게 가동률을 낮춰 생산―소비―공급이 연쇄적으로 감소하는 악순환을 초래할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재계 관계자는 “불황 카르텔이 논의되는 것 자체가 실물경제의 심각성을 반영하는 현상”이라며 “연말과 내년 상반기 재계의 화두로 떠오를 공산이 크다”고 분석했다.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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