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기업 퇴출 원칙 불투명, 우량기업도 멍든다

  • 입력 2000년 10월 19일 19시 16분


“정부가 부실기업 퇴출작업에 늑장을 부리는 탓에 건전한 기업마저 골병이 든다.”

중견 A그룹 임원은 19일 “정부와 채권단이 부실기업 판정을 놓고 오락가락하는 바람에 가뜩이나 뒤숭숭한 자금시장 분위기가 더욱 흉흉해졌다”며 “일이 잘못돼 연쇄도산으로 번지기라도 하면 책임은 누가 지느냐”고 목청을 높였다.

부실기업 판정 발표가 늦춰지고 일부 대기업에 대해서는 당초 원칙이 흔들리자 재계가 정부의 어설픈 일처리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재계의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일부 기업들이 금융감독원 실무자들에게 항의하면서 조속한 처리를 촉구하는 보기 드문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기업은 실험대상이 아니다”〓재계가 가장 문제삼는 대목은 퇴출방침 발표에서 실제 시행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이 너무 길다는 점. 어느 회사가 퇴출될지 해당기업조차 모르는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일부 우량그룹 계열사를 뺀 거의 모든 기업들이 자금조달 통로를 잃었다는 것이다.

전경련 관계자는 “정부가 정책시행에 따른 시장의 혼란을 별로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공식 발표에 앞서 ‘살생부’에 오를 기업의 기준과 구체적인 윤곽 등을 채권은행과 미리 협의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심리적 공황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는 지적.

B그룹 관계자는 “부실기업 퇴출은 ‘원칙에 입각한 속전속결’이 기본인데 정부는 가장 기초적인 행동지침을 지키지 않았다”고 말했다. 전경련 김석중 상무는 “부실기업 퇴출을 이벤트하듯이 요란하게 진행한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가세했다.

▽이제라도 원칙 지켜야〓재계는 부실기업 판정이 원칙대로 처리되지 않을 경우 한국 정부의 구조조정 의지에 대한 외국인투자자들의 불신을 심화시켜 연말이나 내년초 ‘제2의 외환위기’가 닥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우려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어느 기업이 얼마나 부실한지는 시장에서 이미 다 알고 있다”며 “정부가 어느 정도의 혼란을 각오하고서라도 원칙대로 부실기업 정리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회생 가능성이 있는 기업은 당연히 살려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기업까지 시장 충격을 걱정해 처리를 미룰 경우 더 큰 부작용이 빚어진다는 것.

재계는 “이번 부실기업 퇴출작업은 정부의 무리한 정책으로 기업들이 피해를 본 또 하나의 사례로 기록될 것”이라며 “업계의 애로에 귀를 기울이는 기업친화적 정책만이 경제 불안을 치유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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