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철강/당진공장 르포]"기계 녹스는데 새주인 언제나…"

  • 입력 2000년 10월 2일 18시 40분


“아직 완전히 물건너간 건 아니잖아요. 열심히 일하다보면 좋은 소식이 있겠죠.”

충남 당진군 송악면에 자리잡고 있는 한보철강 A지구. 2일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봉강공장에서 만난 김창희씨(30)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97년 1월 한보철강이 부도를 맞을 때만 해도 입사 6개월짜리 신입사원이던 그가 이제는 경력 4년3개월의 중견사원이 됐다. 입사후 줄곧 크고 작은 ‘사건’을 경험해온 그는 한보철강 매각 차질 소식도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벌건 쇳물이 콸콸 흘러가는 공정을 지켜보다 “정부는 10월중에 법정관리 기업중 일부를 퇴출시킨다던데…”라고 독백하는 김씨의 얼굴엔 불안감이 배어 있었다.

정경유착 파문으로 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던 한보철강이 부도를 낸 지 3년9개월. 공장은 부도를 겪은 회사답지 않게 입구부터 깨끗하게 정리돼 있었다. 거대한 철강공장의 진홍색 지붕에는 대문짝만하게 쓰여진 ‘韓寶(한보)’라는 글자가 아직도 선명하다.

120만평 부지에 세워진 거대한 공장을 띄엄띄엄 걸어다니는 직원들 사이에서는 긴장감이 흐른다. 갑작스레 전해진 매각 중단소식 때문일까. 한두달 전까지만해도 분위기는 달랐다. 9월말이면 새 주인을 맞아 공장을 재가동하려는 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것. 휴직처리돼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230명의 동료를 다시 맞아들일 수 있다는 기쁨도 팽배해 있었다.

한보철강의 근로자대표기구인 ‘한가족협의회’의 구자도씨. “부도전 3000명중 떠나지 않고 남아있는 740명의 직원들은 매각 중단소식에 대단히 착잡해하고 있다. 부도이후 오르지 않은 임금, 보너스 830% 중 600%만을 받아 생활하는데도 어려움이 있다.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를 불러온 주범이라는 죄책감으로 열심히 일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장이 일부 정상가동되고 있는 A지구와 건설중 버려진 B지구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A지구의 봉강공장은 지난해 100만t 생산설비로 110만t의 철근을 생산하는 등 법정관리 아래서도 놀라운 생산성을 기록했다. 부도이후 적자를 이유로 멈춰진 핫코일생산공장은 싸늘하게 식은 용광로가 재가동만을 기다리고 있다.

3조3300여억원이 투자돼 74만여평 규모로 조성된 B지구의 사정은 처참하다. 25명의 보수인력이 끊임없이 설비를 점검하고 있지만 공장 플랜트 구석구석의 볼트와 너트는 뻘겋게 녹슬어가고 있다. 국내에는 포항제철과 한보철강에만 설치돼 있다는 코렉스로(爐)의 겉면에도 벗겨진 페인트 사이로 시뻘건 녹물이 흐르고 있었다. 마침 내린 비는 천장의 틈새로 새어들어 설비 기계에 빗물을 뿌렸고 무성한 잡초위에는 대형 기계부품이 나뒹굴고 있다.

B지구 설비보존팀의 한 직원은 “외국기업들의 실사에서 올해초까지 작업중단된 기계나 짓다만 설비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시간이 길어지게 되면…”이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네이버스 컨소시엄은 한보철강을 인수하면 98년 7월 이후 적자라는 이유로 중단됐던 A지구의 열연공장을 다시 돌린 뒤 1조6000억원을 투입해 B지구의 냉연공장을 가동하고 코렉스로도 완성할 계획이었다. 매각작업이 미궁에 빠진 지금 상태에서는 모든 계획이 백지로 돌아갈 수도 있는 것.

제철소장 최천식(崔千植) 전무는 “매각권한이 채권단에 있는 상황에서 한보철강 사람들이 뭐라 할 얘기는 없다”면서도 “법정관리에 들어가 있으므로 매각에 차질이 있다고 해서 생산에 당장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직원이나 임원들 모두 빨리 새주인을 찾아 날마다 가치를 잃어가는 생산설비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당진〓박중현기자>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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