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경제시대]회사도 가계도 적자…年末이 우울하다

  • 입력 1997년 11월 23일 19시 53분


『웬 국제통화기금(IMF)? 누가 국제전화 통화를 많이 했나.기금까지 들먹이게』 의류업체 영업과장 P씨(37)는 22일 밀린 결제서류를 마무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도 「IMF 구제금융」을 화제로 떠올리면서 일할 생각을 하지 않는 동료직원들에게 이렇게 농담을 내뱉었다. 『나라가 빚 좀 얻어다 쓰겠다는 건데 왜들 호들갑을 떨고 그러는지…. 우리가 빚지는 건 아니잖아』 P씨 생각은 솔직히 그랬다. 우리나라가 국제기구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다는 게 창피한 일이긴 하지만 기업처럼 국가간에도 채무관계는 생길 수 있다고 믿었다. P씨는 기업 연쇄부도도 문제지만 올들어 내수가 위축되면서 판매실적이 영 시원치 못한게 더 걱정이었다. 「판매진작 방안」을 만들어 보고하라는 웃분 지시에 맞춰 일하는 게 당장 급했다. 어느날 IMF는 그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당장 회사 간부회의에서 「IMF 대응책」이 심도깊게 논의됐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정부가 긴축정책으로 선회하면 가뜩이나 불황인 내수시장이 더 침체될 것이라는 우려가 컸던 모양이다. 그러다 보면 회사도 인원을 정리하든지, 수당을 줄이든지 초긴축정책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해외출장은 되도록이면 삼가고 가능한 한 팩스 등으로 업무를 처리하라는 지침이 구체적으로 나왔다. 다음달로 예정돼있던 P씨의 미국출장도 불투명해진 셈이다. 문득 「이럴 때 정리되면 재취업도 안될텐데…」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아내는 올해 월급이 동결되자 실망하는 빛이 역력했었다. 그때 『남들은 회사가 망하는데 우리 형편은 그래도 괜찮다』며 위로했었는데 IMF변수로 영 뒷맛이 개운치않다. 다음달 크리스마스 전후로 계획했던 결혼 10주년 해외여행도 포기해야할 것 같다. 달러값 폭등으로 나라가 뒤숭숭한데 해외여행은 사치같았다. 아내에게 여행계획을 미리 말 안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금도 걱정이다. 정부가 초긴축상황에서 물가안정을 위해 세금을 올릴 경우 그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들이 지게되는데 얇아진 월급봉투로 어떻게 살아가라는 것인지. 집을 늘릴 계획도 뒤로 미뤄야할 것 같다. 집값의 3분의1 정도를 대출받으면 될줄 알았는데 당장 생활비 쪼들릴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초긴축정책에 맞춰 돈이 적게 풀리면 시중금리가 올라갈 게 뻔한데 대출은 아예 포기하는 게 나을 성 싶었다. 정부와 정치권이 잘못해서 나라경제가 부도직전까지 몰렸는데 그 부담을 국민이 죄다 뒤집어 쓰는 것 같아 억울했다. 『못나도 우리나라, 잘나도 우리나란데 우리마저 포기하면 안돼. 다시 한번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겠지. 우리 국민은 「한다면 꼭 하는」 사람들이니까』 회사문을 나서면서 P씨는 이렇게 마음을 추스렸다. 〈이강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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