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스케치]회색공장 사이 문화의 꽃, 어색해서 더 매력적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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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성수동, 가보셨나요

서울 성수동의 대림창고 앞에 방문객들이 줄을 서 있다. 대림창고는 1960년대부터 정미소와 창고로 쓰였던 낡은 건물을 행사장으로 개조한 곳이다. 패션쇼와 제품 출시 행사 등이 열린다.
서울 성수동의 대림창고 앞에 방문객들이 줄을 서 있다. 대림창고는 1960년대부터 정미소와 창고로 쓰였던 낡은 건물을 행사장으로 개조한 곳이다. 패션쇼와 제품 출시 행사 등이 열린다.
11일 오후 7시 서울 성동구 성수역 인근. 지하철역 3번 출구를 나와 수제화 가게와 아파트형 공장, 자동차정비소, 금형공장을 지나 도착한 카페의 외관은 낡고 거칠었다. 카페 옆에 있는, 녹슨 철문이 달린 물류창고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골목길에는 드럼통이 늘어서 있었다.

‘자그마치’ 카페의 모습. 해외 유명 브랜드의 조명이 전시돼 있는 이곳에선 ‘젊은 건축가 포럼’ 등의 세미나가 잇달아 열린다.
‘자그마치’ 카페의 모습. 해외 유명 브랜드의 조명이 전시돼 있는 이곳에선 ‘젊은 건축가 포럼’ 등의 세미나가 잇달아 열린다.
‘자그마치’란 이름을 가진 이 카페에선 수입 신발 브랜드가 주최한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카페 안엔 스팽글(반짝거리는 얇은 장식 조각)을 단 캔버스화 등 실험적인 디자인의 운동화들이 놓여 있었다. 골목에선 쇳조각 깎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카페로 들어온 소음은 DJ가 틀어대는 클럽 음악에 묻혀버렸다. 패션 디자이너들과 바이어들은 삼삼오오 모여 칵테일을 마시거나 춤을 췄다.

이처럼 낡은 공장과 문화 공간의 ‘어색한 동거’가 오히려 매력을 뿜어내는 동네, 이곳은 성수동이다.

회색빛 공장이 가득했던 성수동 일대는 요즘 힙스터(트렌드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들이 몰리는 핫 플레이스로 변신 중이다. 레스토랑과 카페, 갤러리는 물론이고 디자이너들의 작업실과 소셜벤처기업들이 속속 성수동에 둥지를 틀고 있다. 성수동이 다른 카페골목 동네와 다른 점은 단순히 가게나 업체가 들어서는 것을 넘어 협업과 공유를 매개로 사람들 사이의 커뮤니티가 활발히 형성되고 있다는 데 있다.

회색지대, 문화지대로

자그마치 카페는 문화 공간을 표방한다. 디자이너와 사진가, 건축가들이 ‘동네’나 ‘건축’을 주제로 세미나를 종종 연다. 카페 한쪽에서는 프로젝터로 영화를 상영하며 지난해 11월 열린 과자 전시회에는 이틀 만에 4000여 명이 다녀가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다.

카페 안에서는 이탈리아 ‘아르테미테’, 핀란드 ‘아르텍’ 등 다양한 브랜드의 조명이 사람들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다. 그 사이사이로 다양한 디자인 서적이 눈에 띈다. 카페 주인장인 정강화 건국대 산업디자인전공 교수(조명설계 전문가)의 취향과 관심사를 반영한 것이다. 정 교수는 서울시 야경계획 등 다수의 공공디자인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학교에서 멀지 않은 성수동 일대에 자연히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러다 2013년 11월 카페를 열었다.

“서울시 유일의 준공업 지역인 성수동에는 기술가들이 몰려 있어요. 이분들은 문화적인 잠재력이 뛰어난 ‘자산’이지만 그동안 부각이 안 됐었죠. 우리는 이런 기술자들, 즉 장인의 작업에 예술가들의 창조적 협업을 더해서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낼 겁니다. 우리 카페 이름(자그마치)에 담긴 ‘대단해 보인다’는 뜻처럼요.”

정 교수는 카페를 성수동 사람들의 구심점으로 삼아볼 예정이다. 올해 목표는 주변의 인쇄소와 제조업체, 식품회사 등의 디자인 작업과 브랜딩을 도와주는 것이다. 예술가들의 역량과 성수동 공장의 기술을 결합해 새로운 상품을 만들 계획도 세우고 있다.

자그마치에서 20∼30m 떨어진 지점에는 ‘대림창고’라는 글씨가 흰색 페인트로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붉은 벽돌 건물이 있다. 1960년대부터 정미소와 창고 등으로 쓰였던 건물을 행사장으로 개조한 곳이다. 이 건물은 미국 자동차업체 ‘포드’가 올해 1월 스포츠카 ‘올 뉴 머스탱’의 발표회를 여는 등 럭셔리 브랜드들의 행사장으로 쓰이고 있다. ‘버버리’와 ‘샤넬’ ‘앱솔루트’도 이곳에서 행사를 열었다.

‘송지오’ ‘앤디앤뎁’ ‘슈콤마보니’ 등 패션 브랜드들은 아예 이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패션업계의 한 관계자는 “성수동은 과거와 현재의 접점이 맞닿아 공간을 재해석할 수 있게 해주는 곳”이라고 말했다.

디자인 협동조합인 ‘보부상회’를 찾은 사람들이 독립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보부상회에서는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전시·판매한다.
디자인 협동조합인 ‘보부상회’를 찾은 사람들이 독립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보부상회에서는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전시·판매한다.
문화 예술 실험이 이뤄지다

공장 지대였던 성수동 일대가 변화하기 시작한 건 2011년경부터 젊은 예술가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도심과 비교적 가까우면서 임차료가 상대적으로 싸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다.

“홍대에서 오랜 작업 후 새벽에 허기를 달래러 거리로 나가면 쓰레기로 뒤덮여 있었어요. 행인들은 젊은 사람 일색이었고요. 반면 성수동에 이사 와서는 여유로움을 많이 느끼죠. 서울숲에서 나무 크기와 생김새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죠.”(김다정 일러스트레이터)

“차가 안 막히면 서울 웬만한 곳으론 20분 안팎에 이동할 수 있습니다. 미팅 가거나 재료 사러 갈 때 편하죠. 홍대와 광흥창에 살다가 2011년 성수동으로 왔는데 후회하지 않아요.”(이광호 금속작가)

젊은 예술가들이 몰리는 만큼 갖가지 ‘실험’이 이뤄진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독립 디자이너들이 만든 ‘보부상회 디자인 협동조합’이다. 이 조합은 디자이너들의 제품을 중간 유통망 없이 직접 판매한다. 성수동의 청바지 워싱공장을 개조한 보부상회에서는 주얼리, 화분, 한지 제품, 신발, 쿠션, 조명, 지갑, 가구, 목공예품, 일러스트 등 다양한 소품들이 전시·판매된다.

“독립 디자이너가 시중에 물건을 팔려면 유통업체에 상당한 수수료를 떼어줘야 해요. 우리가 뭉쳐서 제품을 함께 알리고 직거래 판로를 뚫어 보자는 취지에서 조합을 만들었어요. ‘공정한 방법’으로 디자이너들의 권리와 행복을 찾는 게 최종 목표죠.”(황병준 보부상회 이사장)

보부상회 조합원은 50명에 육박한다. 이들은 방문객들과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도자기 만들기와 플로리스트 과정 등 다양한 워크숍을 열고, 소규모 공연도 한다. 수익 중 일부는 다른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데에 쓰인다.

젊은 예술가들이 안착하자 카페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카페에서도 다양한 실험이 이뤄지게 됐다. 이것이야말로 성수동이 가로수길과 도산공원 근처, 경리단길 등과 차별화되는 점이다.

‘디웰살롱’에서 참가자들이 영화를 본 뒤 토론하고 있다. 디웰살롱은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자는 뜻에서 만들어진 공간으로 성수동 일대 사회적 기업가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디웰살롱’에서 참가자들이 영화를 본 뒤 토론하고 있다. 디웰살롱은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자는 뜻에서 만들어진 공간으로 성수동 일대 사회적 기업가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커지는 소셜클러스터

최근에는 뚝섬역 8번 출구 인근도 ‘소셜클러스터’(사회적 기업이 모여 있는 곳)로 변모하고 있다. 카페 ‘디웰(D-Wel)살롱’에선 10일 성실화랑의 김남성 대표가 ‘디자이너가 멸종 위기의 동물을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었다. 대학생과 디자이너, 교수, 사회적 기업가 등 20여 명이 동그랗게 모여 앉아 강의를 경청했다.

김 대표는 삼성전자가 개발한 ‘착한 배터리팩’을 디자인한 인물이다. 배터리팩에 반달가슴곰, 황제펭귄 등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동물 그림을 넣어 자연보호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생명을 충전하다(Charge the Life)’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디웰살롱의 모임은 ‘세상을 1%씩 변화시키는 사람’을 초청해 사회적인 이슈를 놓고 토론을 벌이기 위한 것이다. 가끔 영화 상영회도 열린다. 이달 12일에는 로드킬(동물이 차에 치여 죽는 일)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상영한 후 영화감독이 참석자들과 맥주잔을 기울이며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디웰살롱은 3층짜리 다세대주택을 개조해 만든 곳으로 위층에는 사회적 기업가를 꿈꾸는 사람들이 합숙을 하는 커뮤니티 하우스인 디웰하우스가 있다. 현대가의 정경선 씨가 대표로 있는 비영리재단인 ‘루트임팩트’가 두 곳을 운영한다.

디웰살롱 주변에는 저소득층 중고생을 가르치는 ‘공신닷컴’과 사회적 이슈를 예술과 연계하는 ‘위누’, 차량 공유 서비스 업체인 ‘쏘카’ 등 다양한 소셜벤처들이 몰려들고 있다.

예비창업가들을 위한 협업(코워킹) 카페인 ‘카우앤독(CoW&DoG)’도 눈여겨볼 만한 곳이다. 이곳의 이름은 ‘함께 일하면서 좋은 일을 하라(Co-Working & Do Good)’는 영어 문장의 약자다. 별칭은 ‘개나소나 카페’로 소셜벤처 육성기업인 ‘소풍’이 ‘예비창업가들이라면 아무나 와서 정보를 공유하고 협업하라’는 취지에서 마련했다. 회사 관계자는 “지금 같은 추세라면 성수동이 소셜벤처의 실리콘밸리가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현재 성수동의 키워드는 ‘우연한 만남에서 찾을 수 있는 뜻밖의 재미’를 나타내는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 할 수 있다. 지난해 성수동 공장과 대학생 간 협업 프로젝트인 ‘메이드 인 성수’를 기획한 장영철 WISE건축사무소장은 “성수동이라는 지역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인연’들이 기존과는 다른 가치를 만들려는 흥미로운 실험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성수동의 ‘러스티드 아이언 인 덤보’ 카페 전경. 카페 이름은 공장지대였다가 문화지대로 변모한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덤보’에서 따온 것이다.
서울 성수동의 ‘러스티드 아이언 인 덤보’ 카페 전경. 카페 이름은 공장지대였다가 문화지대로 변모한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덤보’에서 따온 것이다.
▼뉴욕 브루클린 ‘덤보’… 베이징 798 예술구… 서울엔 성수동▼

문화지대로 변신 ‘도심 재생’의 아이콘들
서울 성수동에는 ‘러스티드 아이언 인 덤보’란 카페가 있다. 카페 주인은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맨해튼다리 아래 지역을 가리키는 ‘덤보(Dumbo·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란 말에서 이름을 따왔다. 미국의 덤보도 낡은 공장과 창고를 갤러리로 개조해 문화지역으로 변모한 곳이다.

성수동에서 진행 중인 ‘도심 재생’은 세계 각국의 주요 도시에서 이미 여러 차례 일어난 현상이다. 낡은 기차 차고를 개조해 만든 프랑스 파리의 ‘라 알프레시네’에서는 장 폴 고티에와 지방시 랑방 등의 패션쇼가 열린다. 냉전시대에 무기공장과 창고 밀집지역이던 중국 베이징(北京)의 ‘798 예술구’도 지금은 갤러리들이 들어선 문화지대로 꼽힌다. 영국 런던의 ‘테이트모던 갤러리’는 화력발전소가 대형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곳이다.

일제강점기 성수동 일대에는 대형 창고들이 들어섰다. 김영규 성동구 자치행정과 마을공동체팀장은 “예전에는 뚝섬나루터에 한강변과 중랑천에서 운반되는 농산물과 목재를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1960년대 준공업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성수동은 본격적인 공장지대로 변했다. 1960년대의 철공장과 염색공장, 도금공장을 시작으로 1970년대에는 가발공장이, 1980년대에는 봉제공장이 차례로 들어섰다. 1990년대 들어서는 구두공장과 인쇄업체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성수동의 제조업은 2000년대 들어 경쟁력을 잃으며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2005년 서울시가 성수동에 서울숲을 조성하며 유동인구가 늘기 시작했다. 한 채에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서며 유명해졌고, 서울숲 주변에 현대자동차 본사가 들어서고 뉴타운 사업까지 진행된다는 풍문이 돌면서 땅값이 급등하기도 했다. 결국 이 사업들이 무산되고 부동산 경기 침체까지 겹치자 성수동 개발붐은 주춤하게 됐다.

이는 성수동 일대에 의도치 않은 활력을 가져오는 계기가 됐다. 편리한 교통에 비해 싼 임차료 덕에 카페와 디자이너 작업실, 사회적 기업 등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성수동 사람들은 임차료 걱정을 가장 많이 하고 있다. 한 카페 주인은 “건물주가 임대료 인상을 요구해 또 다른 지역으로 밀려날까 걱정”이라며 “성수동 특유의 문화 생태계가 지켜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성수동#힙스터#소셜클러스터#대림창고#자그마치#보부상회#디웰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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