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여심 훔치는 초록빛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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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7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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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새 향수 ‘N° 19푸드르’ 파리 발표회 현장

“그는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않았다. 냄새를 들이마시고 그 냄새에 빠져 자신의 가장 내밀한 땀구멍 깊숙한 곳까지 전부 나무 냄새로 가득 채운 그는 그 스스로가 나무가 되어버렸다. 그리고는 나무인형, 피노키오가 된 것처럼 그 장작더미 위에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한참 뒤, 거의 30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 말을 내뱉었던 것이다. ‘나무’.”(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에서)

가브리엘 코코 샤넬 여사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샤넬 N°5’와 그 뒤를 이은 대담하고 열정적인 향취의 ‘샤넬 N°19’, 매혹적이다 못해 관능적인 ‘샤넬 코코’까지. 세기의 판매량을 이으며 승승장구하는 샤넬 하우스의 향수는 전 세계 여성들이 흠모하는 대상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소설 ‘향수’를 통해 말했듯이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향기가 있다. 세상 모든 존재는 향기를 통해 서로 닮아간다. 다양한 사연과 추억들이 피어나는 여름도 그렇다. 이 중에서도 8월 19일에 태어난 샤넬 여사의 생일을 딴 ‘N°19’은 유독 샤넬 여사를 많이 닮았다. 8월 41년 만에 ‘N°19 푸드르’로 리뉴얼해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샤넬의 향수 이야기를 프랑스 파리에서 전한다.

여름에 태어난 샤넬의 향기

어느 날 ‘코코’라는 이름으로 라벨을 이미 주문해 놓은 코코 샤넬은 그 이름이 이번 향수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는 ‘N°19’라는 이름을 붙였다. 왜 N˚19일까?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절친한 친구인 카르멘 테시에에게 그 이유를 털어놓았다.

“내 생일이 8월 19일이잖아. 별자리는 사자자리인데 난 정말 사자와 같아. 상처를 받을 것 같으면 나 자신을 보호하려고 발톱을 보이고 으르렁대지. 하지만 솔직히 남들이 나를 공격하는 것보다 내가 남을 공격하는 일이 나에게는 훨씬 어려운 일이야.”
상쾌하고 섬세한 자연향… 코도 눈도 기분도 즐겁게 해

테시에는 향수를 더 뿌리며 “그럼 이 향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데?”라고 물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 향수 때문에 길거리에서 어떤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건 적이 있어. 리츠칼턴 호텔에서 나오는데 어떤 사람이 내 어깨를 만지는 느낌이 나서 돌아보니 낯선 사람이기에 재빨리 무시해 버리려고 하는데 이 사람이 미국인 억양으로 이렇게 말했어. ‘실례합니다만 저와 함께 있는 두 여인이 당신이 뿌린 향수가 무엇인지 궁금해합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지. ‘그러면 저를 따라오세요.’ 나는 그들을 샤넬 부티크로 데리고 갔고 그들은 그곳에서야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됐어.”

샤넬이 농장을 운영한다고? 샤넬은 100% 천연재료로만 향수를 만든다는 원칙을 가장 중시한다. 재료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프랑스 남부 그라스에서 직접 재스민, 장미 등을 키워 브랜드를 대표하는 향으로 담아내고 있다.
샤넬이 농장을 운영한다고? 샤넬은 100% 천연재료로만 향수를 만든다는 원칙을 가장 중시한다. 재료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프랑스 남부 그라스에서 직접 재스민, 장미 등을 키워 브랜드를 대표하는 향으로 담아내고 있다.
1970년 샤넬 여사의 생일인 8월 19일 N°19이 태어났다. 8년 후, 샤넬 여사는 세상을 떠나 N°19은 샤넬 여사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만든 향수라는 타이틀을 하나 더 달게 됐다. 이 초록빛 향수는 샤넬의 대표 향수 N°5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출시 이후 40여 년간 전 세계 여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N°19이 샤넬의 조향사 자크 폴주, 부조향사 크리스토퍼 셸드레이크 씨와 만나 41년간 지켜온 포뮬러(원료 제조방식)를 버리고 새로운 조합으로 다시 태어났다.

5월 16일 전 세계 기자 100여 명이 샤넬의 새로운 향기를 맡기 위해 프랑스 파리 N°19 푸드르 발표회장으로 모여들었다. 발표회장으로 향하는 문을 열자 칠흑처럼 어두운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윽고 벽 한쪽에는 아이리스(붓꽃) 형상을 하얀색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으로 나타났다. 검은색과 하얀색은 샤넬의 대표 색상. 꽃과는 거리가 먼 이 두 가지 색으로 이탈리아 남부 지방의 아이리스가 봄바람에 흔들리듯 암흑의 공간을 꽃밭으로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41년만에 다시 태어난 N°19 푸드르


LED 조명의 아이리스 꽃밭을 지나자 N°19 푸드르가 기자의 눈앞에 나타났다. 투명한 유리용기에 담긴 초록빛 향수. 작은 새싹의 색을 닮은 향수 빛깔만 봐도 눈이 즐거웠다. 손가락 길이의 시약 종이를 N°19 푸드르에 담갔다가 가볍게 흔들며 향에 후각을 집중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푹신한 파우더 구름처럼 섬세한 향이라고 할까. 향수 전문가들이 시향하듯 향이 퍼지는 톱노트, 미들노트, 베이스노트 순서대로 향을 느껴봤다.

처음 코를 자극한 향은 초록빛 향수 색만큼이나 강렬한 상쾌함이었다. 풋풋한 풀 향기는 예전보다 연해졌지만 프랑스 남부 그라스 지방에서 키운 네롤리(아로마의 일종)와 상큼한 만다린(감귤과의 꽃)의 자극적인 향이 코를 즐겁게 했다. 이내 아이리스 팔리다 향이 느껴지면서 아이티에서 건너온 베티베르 뿌리의 건조한 듯한 향이 더해졌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 귀족 여성들의 화장대 한쪽을 차지한 파우더 케이스와 짙은 립스틱이 차례로 떠올랐다. 샤넬의 대표 조향사 폴주 씨는 “아이리스로 대표되는 오리지널 향에 현대적인 파우더 향을 더해 재구성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N°19 푸드르의 주원료인 아이리스 팔리다의 뿌리.
N°19 푸드르의 주원료인 아이리스 팔리다의 뿌리.
샤넬의 향수는 사람이 만드는 인공적인 향이지만 재료만큼은 100% 자연에서 얻는다. N°19 푸드르는 자연의 정수만 뽑아냈다. 폴주 씨는 “N°19 향수병이 담고 있는 모든 꽃들을 풀어낸다면 아마 몇 t의 꽃송이가 터져 나오지 않을까”라고 표현했다. 파우더 느낌을 더하기 위해 N°19에 쓰인 아이리스 팔리다 종은 정작 꽃에 향이 없다. N°19 푸드르 파우더 향의 비밀은 바로 뿌리. 발표회장에도 보라색 아이리스 꽃잎 대신 동글동글한 연근 모양을 닮은 아이리스 뿌리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뿌리를 있는 그대로 향수에 쓸 수는 없다고 한다. 수확 후 뿌리의 껍질을 벗겨 말린 것을 증기 추출해 진액을 얻게 된다. 무려 13t의 뿌리를 수확해 8t의 건조된 뿌리를 얻고 이 어마어마한 양에서 겨우 1kg만을 얻게 된다는 것. 패션만큼이나 향수에서도 샤넬 여사가 중시했던 장인정신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패션 브랜드에서 나오는 향수이지만 향수병은 여성용 향수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절제된 극도의 단순미를 추구했다. 각이 지고 추상적인 병 디자인은 러시아 옛 왕궁 한쪽에 놓인 테이블 위 소품처럼 느껴진다. 폴주 씨는 “1970년 N°19을 처음 선보였을 때 프랑스에서는 여성들의 사회 활동 폭이 넓어지고 있었고 향수도 도전적인 향을 담았다”며 “41년이 지난 지금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약하고 있는 여성들의 진취적인 삶을 모티브 삼아 현대적인 의미로 N°19을 재해석한 것이 N°19 푸드르”라고 설명했다.

파리=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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