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읽기]<22>왜 사람들은 벚꽃놀이를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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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4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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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흩날리는 꽃잎, 그 너머 파란 하늘을 보라하네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토요일 밤 밀린 원고 하나를 마무리하느라 늦게 사무실을 나섰다. 이미 대중교통은 끊어진 지 오래라 한적한 광화문 거리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로등에 비친 벚꽃나무가 무릉도원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일순간 피곤함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던 중 택시 한 대가 나의 낭만을 깨운다. 차를 타자마자 운전사 아저씨는 ‘토요일인데 이렇게 손님이 없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린다. 서울 사람들 대부분이 이곳저곳으로 꽃구경을 간 것 같다고 화답했다. 내 말에 동의하면서 그는 한낮의 경험을 들려준다. 차가 너무 많아 여의도 윤중로로는 진입하기도 힘들었다는 것이다. 이어서 벚꽃 구경도 못하는 신세타령이 이어진다. 이미 자신의 두 아이는 대학을 졸업했지만, 한 아이가 아직 대학을 다닌다고 했다. 이전에는 택시 운전으로 충분히 자식들을 교육시키고 집도 장만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이제 머나먼 과거 일이라고 한숨을 깊게도 내쉰다. 아무리 마음의 여유가 없어도 하루 날을 잡아 꽃들이 지기 전에 꽃놀이를 다녀오시라고 덕담을 건네며 택시에서 내렸다.

일제강점기를 거친 탓인지 유독 봄맞이 행사로는 벚꽃놀이가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그렇지만 과거 봄을 알리는 전령사는 벚꽃이 아니라 복숭아꽃, 즉 도화(桃花)였다. 4월 복숭아꽃이 활짝 필 때, 우리 조상들은 ‘도화타령’을 아름답고 구슬프게 불렀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도화라지 도화라지. 네가 무삼에 도화라고 하느냐. 복숭아꽃이 도화라지

봄철일세 봄철일세. 각색 꽃들이 난만하게 피었네. 어화 노래나 불러보세

이화도화 만발하고, 행화춘절이 다시 돌아왔구나. 더덩실 춤추며 놀아보세

도화일지 꺾어들고, 춘풍화류를 희롱이나 하잘꼬. 얼씨구 좋다 멋이로다

도화유수 맑은 물에, 일엽편주를 두둥실 띄우고, 좋은 풍경에 즐겨보세

에헤요 어허야 얼씨구 좋다. 좋고 좋네. 어화 이 봄을 즐겨보세

무릉도원(武陵桃源)이나 도원경(桃源境)이란 표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중국의 시인 도연명(陶淵明), 즉 도잠(陶潛·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등장하는 말이다. 어느 어부가 물고기를 잡다가 물길을 따라 내려오는 복숭아꽃의 향기에 취한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이 그는 복숭아꽃이 떠내려오는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 너무나 살기 좋고 아름다운 곳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곳이 무릉도원, 혹은 도원경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도화나 벚꽃이 만드는 무릉도원과 같은 풍경의 이면에는 농업경제의 팍팍한 삶이 도사리고 있다. 꽃놀이를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사일에 매진해야만 했다. 그래서 복숭아꽃 향기에 취해서 마시는 한잔의 술은 전쟁터로 나가기 직전의 화려한 축하연과 같이 비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경기민요 도화타령의 밝은 리듬 뒤에 아련히 느껴지는 애잔함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복숭아꽃이든 벚꽃이든 공통점이 있다. 바람이 불기라도 하면 너무나 쉽게 꽃잎들은 허공에 흩날려 버린다. 화려하고 장엄한 광경이기는 하지만, 또한 슬프도록 덧없는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바로 이 순간, 우리는 하늘을 가득 채우며 날아오르는 꽃잎들 사이로 파란 하늘을 보게 된다. 바로 그 파란 하늘이야말로 우리가 꽃놀이에서 얻으려는 것 아니었을까? 어쩌면 꽃잎들은 하늘을 보라고 우리 앞에 화려한 장관을 연출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도화원기’의 어부가 꽃잎을 따라가다 무릉도원에 이르는 것처럼 말이다. 아름답게 날리는 꽃잎을 따라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면 앞으로 해야 할 모든 일들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바로 이것이 4월을 들썩이게 하는 꽃놀이를 통해 우리가 얻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수직적 몽상’을 이야기했던 가스통 바슐라르☆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탑 근처나 나무 근처에서 높이의 몽상가는 하늘을 꿈꾼다. 높이를 생각하는 몽상, 수직성을 향하는 우리들의 본능은 공동생활의 범속함에 의해 혹은 수평적인 생활상의 여러 가지 의무에 의해 죽어 있는 본능을 기르고 있다. 인간을 수직화시키는 몽상은 수많은 몽상 가운데서도 가장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다른 장소를 꿈꾸는 것처럼 잘 꿈꾸기 위한 확실한 방법은 없다. ―‘초의 불꽃(La Flamme d'une Chandelle)’

바슐라르는 인간이 수평적인 삶을 영위하는 존재라고 이해한다. 수평적인 삶은 우리가 앞이나 옆, 혹은 뒤만 바라보며 사는 모습을 묘사하는 개념이다. 수평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 사람, 자동차, 건물 등등일 것이다. 수평적 삶은 결국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 즉 공동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공동생활은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다양한 관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성이라면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직장 후배로서, 직장 선배로서, 아니면 동네 아저씨로서 다양한 방식으로 삶을 영위해야 할 것이다. 여성이라면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시어머니로서, 아니면 동네 아줌마로서 복잡한 삶을 능숙하게 살아내야 한다. 너무나 많은 배역을 능숙하게 수행하기 위해 대부분 사람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만 하다. 맡은 배역마다 정해진 역할이 있고, 타인들로부터 욕을 먹지 않을 정도로 그 역할을 나름대로 수행해야만 한다.

수평적 삶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달성하기보다는 타인이 원하는 것을 달성하기 바쁘다. 그렇기 때문에 수평적 삶은 숨이 막힐 정도로 갑갑함을 우리에게 줄 수밖에 없다. 이럴 때 가끔 우리는 하늘을 올려다보기 마련이다. 마치 물속에 빠져 숨이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싶은 강한 욕망이 꿈틀거리는 것도 바로 이 순간이다. 어쩌면 이것은 자유를 꿈꾸는 인간의 본능적인 감각일지도 모른다. 거미줄처럼 얽혀서 우리를 옥죄는 모든 관계망을 찢고 자유를 되찾고 싶은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수평이 아니라 수직을 꿈꾸는, 바슐라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높이를 생각하는 몽상’에 빠져들게 된다. 집 뒤의 산에 올라가 자신이 살던 마을과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던 적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렇다. 자신이 지금까지 얼마나 아옹다옹하면서 살았는지를 자각하기 위해, 우리는 높은 고도감이 필요한 법이다.

바슐라르의 말처럼 서양의 경우 교회나 성곽의 탑, 혹은 힘차게 솟아 있는 나무가 하늘을 올려다보라고 유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면, 동양의 경우 벚꽃이나 복숭아꽃이 그런 역할을 대신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벚꽃과 복숭아꽃이 탑이나 나무보다 더 심오하지 않는가?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은 하늘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우리가 땅 위 수평적 세계에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하늘을 가득 채우며 우리에게 푸른 하늘이 있음을 가르쳐주었던 꽃잎들은 아름다운 운무를 마친 뒤 조용히 그리고 비장하게 땅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 가끔이라도 하늘을 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의 수평적 세계를 영원히 떠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수평적 세계를 살아낼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일 뿐이다. 높은 산에 올라가면 우리는 자신의 삶을 낯설게 성찰할 수 있는 차이☆☆, 혹은 고도감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산에 오래 머무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에서의 생활도 친숙한 생활, 즉 수평적 삶으로 변모할 테니까 말이다.

우리 조상들은 도화타령을 부르며 새로운 농사철을 맞이하는 힘을 얻으려고 하였다. 벚꽃놀이를 떠나는 우리 이웃들도 무의식적으로나마 조상의 지혜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하루하루 살기가 버겁거나 혹은 미래에 더 큰 고난이 예견될수록, 우리는 흩날리는 벚꽃들 사이로 무릉도원처럼 펼쳐놓은 푸른 하늘을 가슴 한쪽에 품을 필요가 있다. 아이를 교육시키기 위해 팍팍한 생활을 하고 있던 택시 운전사 아저씨가 벚꽃놀이를 가고 싶다고 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입시준비로 여념이 없는 중고등학교 학생들, 치열한 경쟁으로 잿빛이 되어 있는 KAIST 학생과 교수들, 학비 마련과 수업을 병행하느라 지쳐 있는 대학생들, 고용 조건이 불안정한 우리 직장인들, 가족을 돌보느라 지쳐 있는 모든 어머니들, 그리고 멀리 대지진과 방사능 공포에 경황이 없는 이웃 나라 사람들. 이럴 때일수록 꽃들이 열어 놓은 푸른 하늘을 조금이라도 올려다볼 일이다. “에헤요 어허야 얼씨구 좋다. 좋고 좋네. 어화 이 봄을 즐겨보세!”

<강신주 철학자·‘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철학, 삶을 만나다’ 저자>
::바슐라르☆(Gaston Bachelard·1884∼1962)::

우리에게는 문학비평가로 유명하지만, 사실 과학철학에 크게 이바지한 철학자다. 과학 활동의 본질을 해명하다가 바슐라르는 인간이 가진 상상력, 즉 몽상의 힘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통찰했다. 후에 그가 지수화풍(地水火風), 즉 땅, 물, 불, 그리고 바람과 관련된 인간의 상상력을 해명하려고 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저서로 ‘새로운 과학정신(Le nouvel esprit scientifique)’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La terre et les r^everies du repos)’ 등이 있다.

::차이☆☆(差異·difference)::
낯선 곳으로 여행 가서 그곳에 익숙해지면, 우리는 자신이 떠나온 곳을 낯설게 성찰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차이의 경험이다. 차이의 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자신이나 익숙한 것을 반성할 수가 없다. 전혀 이질적인 다른 나라에 갔을 때에만 우리는 자신이 어떤 언어를 쓰고 있었는지, 지금까지 무엇을 먹고 입었는지, 나아가 자신의 사유 패턴까지도 낯설게 성찰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차이의 경험은 매우 친숙해진 자신을 성찰하는 데 불가피한 것이다. 독서나 여행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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