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판’에 새겼다, 조선의 기록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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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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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학진흥원, 10년간 5만8631장 수집… 오늘 학술대회

경북 안동시 한국국학진흥원의 권진호 목판연구소장이 2001년부터 문중의 기탁을 받아 관리하고 있는 책판들을 살펴보고 있다. 2008년말 기준으로 74개 성씨, 189개 문중이 5만여장의 책판을 맡겼다. 한국국학진흥원은 체계적인 학술연구 등을 거쳐 10만여 장의 조선시대 책판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청할 계획이다. 사진 제공 한국국학진흥원
경북 안동시 한국국학진흥원의 권진호 목판연구소장이 2001년부터 문중의 기탁을 받아 관리하고 있는 책판들을 살펴보고 있다. 2008년말 기준으로 74개 성씨, 189개 문중이 5만여장의 책판을 맡겼다. 한국국학진흥원은 체계적인 학술연구 등을 거쳐 10만여 장의 조선시대 책판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청할 계획이다. 사진 제공 한국국학진흥원
조선 후기 예학자 허전(許傳·1797∼1886)의 글을 모은 ‘성재선생문집’은 1891년에 나왔다. 당시 책 발간은 그 자체가 거대한 문화사업이었다. 책을 찍어내는 책판(목판)을 제작하는 데는 물력과 인력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회적 문화적 관계가 총동원됐다. 성재선생문집 간행을 위해 제자들이 모금한 금액은 1만578냥(약 12억7000만 원)이다. 이 과정에서 사회 문화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책은 책판 방식으로 발간되기 어려웠다.

한국국학진흥원이 개인과 문중으로부터 기탁 받아 모은 책판 5만여 장의 가치와 의미를 논하는 첫 학술대회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책판의 종합적 검토’가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주최로 24일 오전 11시 성균관대 600주년기념관 6층에서 열린다.

국학진흥원이 올해 10년째 수집한 조선시대 책판은 5만8631장이다. 국학진흥원은 고려의 팔만대장경처럼 조선의 기록문화를 상징하는 책판 10만 장을 모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할 계획이다.

개인 문집 제작용이 대부분
활판 비해 엄청난 비용-시간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추진


책판은 책을 만들어내기 위해 제작한 제작물이어서 그 자체에 문화적 의미가 깃들어 있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류준필 인문한국(HK) 교수는 미리 배포한 발표문 ‘19세기∼20세기 초 책판 제작의 사회·문화적 의의’에서 “책판은 다량의 책을 인출(인쇄)하는 기능을 하지만 책판 존재 자체가 사회 문화적 권위와 자산의 기능을 했다”며 “이 때문에 역으로 책판의 소유와 보존 여부가 문집 간행의 목적이 될 수 있었고, 문중과 서원에서 장판각을 건립해 책판을 보존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성재선생문집의 경우 책판 경비 모금에 200여 문중이나 참여해 유교문화권의 긴밀한 사회적 네트워크를 엿보게 한다.

국학진흥원이 수집한 책판의 70%는 이름 높은 선비들의 문집이었다. 2008년까지 수집한 482종, 5만1493장 중 문집이 346종, 3만9744장으로 가장 많았다. 나머지는 성리학과 예학에 관한 저서, 족보, 일기 등이었다. 지금까지 영남지역에서 문집의 발간이 많은 이유는 조상이나 선현의 글을 간행함으로써 문중의 명예를 선양하려는 결과로 해석해왔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신승운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장과 서정문 한국고전번역원 사업본부장(문학박사)은 발표문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문집류 목판의 성격과 가치’를 통해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이미 목활자가 등장해 현저하게 비용을 낮출 수 있는데도 19세기와 20세기에도 영남지역에서는 문집류 책판 제작이 활발했던 것이다. 서 본부장은 “책을 찍고 나면 금방 해체되는 활자 방식과 달리 책판은 오랫동안 보존할 지식을 책으로 남길 때 사용했다”며 “개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어감에도 책판 방식을 유지한 것은 기록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책판 방식에는 많은 사람이 비용을 대고 내용에 관여함으로써 유교사회의 독특한 향촌문화를 형성하는 데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책판이 수집됨에 따라 기존 문헌만으로 확인이 되지 않던 판본의 정확한 구분, 판각기술과 책판 나무 재질의 변천 등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신 원장은 “책판은 기록을 중시한 조선의 유교문화를 이해하는 단초가 될 뿐 아니라 지식의 축적과 유통의 원형을 지닌 문화적 자산”이라고 말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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