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 비하인드 스토리

  • 입력 2009년 2월 17일 18시 53분


2002년 1월 떼를 쓰다시피 해 들여다 본 서울 종로구 혜화동 김추기경 숙소내 침실. 평범한 침대와 옷장이 놓여 있을 뿐 검소하고 단촐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2002년 1월 떼를 쓰다시피 해 들여다 본 서울 종로구 혜화동 김추기경 숙소내 침실. 평범한 침대와 옷장이 놓여 있을 뿐 검소하고 단촐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17일 오전 출근길에 김수환 추기경의 시신이 모셔진 명동성당에 들렀다. 기자가 아니라 한 명의 시민으로 찾아간 것이다. 유리관 속에 모셔진 추기경의 모습이 참 장해 보였다. "주여 하느님의 어린 양. 하느님께서 대한민국을 위해 오래전부터 예비해 두신 선한 목자. 시대의 예언자이자 광야에서 고독하게 진리를 외친 주의 종. 천국 문을 활짝 열어 추기경 김수환 영혼을 받아 주시고 상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추기경과는 1980년대 중반 종교 담당 기자 시절부터 20여 년의 교분이 있다. 10여 차례 단독 인터뷰를 했고,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지난해 2월 18일 병석의 추기경을 불시에 찾아가 인터뷰를 한 것이 그분이 언론과 가진 마지막 인터뷰가 됐다. 수척한 모습, 팔에 꽂은 링거와 보청기를 꽂은 귀, 기운이 없는 목소리 등 예전 같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 공식 인터뷰가 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대로 돼 버렸다. 마지못해 인터뷰는 허락했지만 사진 촬영만은 결코 허락하지 않겠다는 추기경님을 설득해 밤 11시가 돼서야 사진을 찍고 기사를 넘겼던 무례를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아프다.

기자로서 추기경을 처음 뵌 것은 1987년 1월 26일 명동성당에서 봉헌된 서울대생 박종철 군 추모 미사 강론에서였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는 '6·10항쟁'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다. 추기경은 이날 강론에서 '작심한 듯' 군부독재 세력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동아닷컴 백완종 기자

"이 정권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라고 묻고 싶습니다.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라는 게 있습니까. 총칼의 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물은 것처럼 '네 아들, 네 제자, 네 국민인 박종철 군이 어디 있느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가슴이 쿵쿵 뛰고 전화로 기사를 송고하면서 목소리가 떨렸다. 추기경이 어디론가 끌려가는 것이 아닌 가 두려웠다. 시위는 날로 격화됐고, 마침내 '넥타이 부대'가 가세했다. 정권은 결국 '6·29 항복 선언'을 내놨다.

많은 이들의 생각과는 달리 '추기경 김수환'의 명성과 카리스마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1968년 46세의 나이로 대주교 승품과 함께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되자 천주교 내부에서부터 불만이 터져 나왔다. "대구 옹기장수 아들이자 서울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서울대교구장이 되느냐"는 얘기들이 오갔다. 일부 주류 원로신부들은 연판장을 돌리기도 했다. 교구 재정도 부실했다. 당시만 해도 보수 성향이 강했던 한국 가톨릭은 개혁 성향의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1년 뒤 그는 한국인 최초로 추기경에 서임됐으나 여전히 고통을 겪었다. 추기경은 회고록에서 서울대교구장 부임 이후 10년을 회고 하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원로신부님들이 교회 민주화 운동을 이해해 주지 않고 다른 목소리를 내신 것이다. 그분들 중에는 개인적으로 가까운 데다 때로는 형님 같은 신부님도 계셨다"고 말할 정도였다. 정부와 함께 추기경을 모함하는 탄원서를 만들어 교황청에 보낸 세력도 있었고, 고향인 대구에서는 "같은 TK끼리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공격하는 이도 있었다. 24시간 정보형사가 따라 붙었고 도청이 지속됐다. '40년 불치병'이 된 고질적인 불면증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성모병원에 세무사찰팀이 들이닥치기도 했다.

하지만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1974) '3·1 명동사건'(1975) '동일방직 노조 탄압사건'(1978) '오원춘 사건'(1979) 등 굵직굵직한 시국 사건에서 추기경은 항상 정의의 편에 섰고, 이로 인해 천주교회에 대한 신뢰도도 높아졌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당시 그는 장례식장에서 "이제 대통령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주님 앞에 선 박정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1980년대 들어 추기경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모시고 '한국 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행사'와 '순교복자 103위 시성식' (1984)을 개최하고, '제44차 서울 세계 성체대회'(1989)를 성공적으로 치러내 한국 가톨릭의 대내외적 위상을 높였다. 그는 서울대교구장 재임 시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웠던 순간은 역시 '광주의 5월'이었다고 회고하곤 했다.

하지만 추기경은 눈물 많은 로맨티시스트였다. '태조 왕건'과 '여인천하' 같은 사극을 즐겼고, 영화관에서 '서편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쉰들러 리스트' '포레스트 검프' '비욘드 랭군' 등을 관람했다. 애창곡은 '사랑으로' '애모' '사랑을 위하여' '등대지기'였다. 추기경은 또 검소, 소박했다. 1998년 5월 서울대교구장 착좌 30주년 기념인터뷰에서 그는 "월급 65만 원에 보너스가 400%인데 이 중 20만~30만 원을 매달 헌금하고, 경조사비가 좀 든다"고 말했었다. 2002년 1월 떼를 쓰다시피 들어가 본 숙소는 기자가 사는 32평 아파트보다도 작고 검소했다. 책상과 소파 서재 외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고 평범한 침대가 놓여 있었다. 신발의 깔창이 오래돼 깊숙이 파여 있어 안쓰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추기경은 또 종교 화합과 대화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강원룡 목사, 법정 월주 스님 등과 교분을 나눴고, 한경직 목사의 빈소를 참배했으며, 서울 성북동 길상사 개원법회에서 축사를 하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 들어 그는 일부 세력으로부터 '보수주의자'라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추기경이 서있는 자리는 한결같았으나 재야(在野)에서 재조(在朝)가 된 '완장 찬' 세력들이 한때 자신들을 가장 옹호, 지지해 준 어른을 몰아세운 것이다. 추기경은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추기경 스스로도 "내가 아직도 이런 얘기를 해야 하나 해서 슬플 때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부화뇌동하며 추기경을 공격하는 언론도 있었다. 2003년 6월에는 동아일보의 대면 인터뷰 제의를 사양하면서 편집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노무현 대통령이 난국을 타개할 만한 능력이 있는지 본질적인 의문이 생긴다"고 말하기도 했다. 2006년 2월 22일 정진석 추기경이 후임 추기경으로 서임되자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대한민국 민주화에 대한 추기경의 공헌은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을 합한 것보다 더 크고 위대하며, 미국 민주주의에 링컨 대통령이 있다면 한국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20여 년간 추기경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고 내린 결론이다.

오명철전문기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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