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여성성에 얹혀진 넉넉한 첫 모성

  • 입력 2008년 4월 4일 03시 00분


《‘엄마 뱃속에 몸을 웅크리고

매달려 가던 당신의 무서운

첫 고독이여.

그 고독을 나누어 먹던 첫사랑이여.

첫은 항상 죽는다.

첫이라고 부르는 순간 죽는다.…

당신의 첫, 나의 첫,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첫.’

(‘당신의 첫’에서)

김혜순(55) 씨는 대학 4학년

때인 197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처음 이름을 알렸다.

이듬해 계간 ‘문학과지성’에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동시대의 여성

시인들이 김혜순 공화국의 시민’

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그의 시의 위력은 컸다.

혹독한 강의로 많은 문인들을

길러낸 교수(서울예대)로서의

명성도 더해졌다.》

■ 등단 30주년 김혜순 시인 새 시집 ‘당신의 첫’

등단 30주년을 맞은 그가 선보인 새 시집 ‘당신의 첫’(문학과지성사)은 ‘김혜순 시학’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장이다.

‘같은 도형은 절대 그리지 않는다’는 평처럼, 늘 새로운 실험을 마다하지 않는 시인의 열정이 확인된다. 2일 만난 시인에게 “시의 편수(60편)는 다른 시집들과 비슷한데 책은 두툼하다(176쪽)”고 말을 건넸더니 “내가 말이 많아서…”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이 시들이 특히 마음에 드는데”라면서 짚어준 ‘전세계의 쓰레기여 단결하라’, ‘쌍비읍 징그러워’는 세 페이지에 이른다. ‘당신이 떠난 자리에 맥주병 두 개 담배꽁초 한 개 메모지 두 장./왜 내 전화를 먹니? 메시지를 먹니? 먹을 게 그렇게 없니?/당신은 통신 부르주아.’(‘전세계의 쓰레기여 단결하라’에서)라는 대목을 따라 읽다 보면 랩을 하는 것 같다.

“웅얼거림이 자연스럽게 시가 되지요. 뭐랄까, 이제는 시가 잘 맞는 옷이 된 느낌이에요.”

가장 여성적인 것을 표출하기 위해 시인은 구토, 피흘림, 고름 같은 극단적 이미지를 쓴다. 가령 ‘모래여자’가 그렇다. ‘사람들이 와서 여자를 데려갔다/옷을 벗기고 소금물에 담그고 가랑이를 벌리고/머리털을 자르고 가슴을 열었다고 했다…몸속으로 칼날이 들락거려도 감은 눈 뜨지 않았다.’

김혜순 시 특유의 치열한 여성성에 대해 그는 특유의 느릿하지만 열렬한 어조로 설명한다.

“사람들은 연애시 하면 한용운과 김소월 같은 남성 시인들의 시를 떠올립니다. 그 시들이 지극히 여성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니 여성적 정체성이 구별되기 위해선 무엇을 보여야 하나요?”

그는 ‘어머니의 밥상’ 어쩌고저쩌고 하는 남성들의 글을 제일 싫어한다. “어머니의 젖, 고기, 피, 심지어 창자, 똥, 오줌, 트림, 발길질마저 밥상에 받을 준비가 되어야 어머니의 밥상 운운하는 시를 쓸 수 있다”고 김 씨는 말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땅을 차지한 아빠, 오빠들과 맞서서’ 전투적으로 시의 공간을 만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새 시집을 묶으면서 시 쓰기가 편안해졌다고 말하는 시인. ‘당신의 첫’이라는 표제시에서 그 넉넉한 모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옛날 당신 몸 속으로 뿜어지던 엄마 젖으로 만든 수증기처럼 수줍고 더운 첫. 뭉클뭉클 전율하며 당신 몸이 되던 첫.’ 어머니는 모든 자식들의 ‘처음’을 갖는다. 그래서 사랑할 수밖에 없다. “신도 우리의 ‘첫’을 갖고 있겠지요. 그래서 인간을 미워하지 못할 겁니다.” 여성만이 붙잡을 수 있는 감각. 그는 과연 가장 ‘여성적인’ 시인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