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그들은 왜 가로수길에 열광하는가

  • 입력 2008년 3월 21일 02시 57분


《패션잡지 기자에서 스타일리스트로 변신한 박명선(37) 씨는 트렌드에 민감한 사람들과 자주 만난다. 이들과 만나는 장소를 정하는 게 그에겐 무척 스트레스다. 요즘 뜨는 장소를 안다는 것으로 유행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 패션 관련 일을 시작했던 1990년대 중반만 해도 모든 약속이 강남구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에서 이뤄졌어요. 그러다 청담동, 도산공원을 거쳐 최근에는 가로수 길로 변했죠. 앞으로는? 글쎄요….”

박 씨의 약속 장소는 한국의 트렌드세터(trend setter·의식주와 관련된 유행을 창조, 수호, 대중화하는 사람)들이 열광하는 길거리, 한국의 패션과 음식 소비의 유행이 시작되는 지점과 일치한다. 한국 사회에서 ‘강남의 길’은 단순히 걸어 다니는 곳에 그치지 않는다. ‘신세대’ ‘X세대’ ‘오렌지족’ ‘야타족’ ‘참살이(웰빙)족’ ‘브런치족’ 등 수많은 족들이 강남의 길을 통해 태어났다. 우리 사회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키워드가 바로 강남의 길에서 시작된 것이다. 오늘, 한국 사람들은 어떤 거리에 열광하는가. 》

강남역에서 신사동까지

트렌드세터들의 발자취

○ 길 따라 유행 따라

‘강남역(1990년대 초반)→압구정동 로데오거리(1990년대 중반)→청담동(1998∼2000년대 초반)→도산공원 앞길(2004∼2006년)→가로수길(2007년 이후)→?’

논현동에서 태어나 개포동, 대치동에서 자란 ‘강남키드’ 엄소민(32) 씨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려본 ‘유행지도’다. 또 다른 강남키드 김경모(37) 씨도 같은 지도를 그렸다.

강남역이 뜨기 전까지 청춘 남녀가 몰리는 곳은 명동이었다. 강남역 일대에 음식점과 나이트클럽들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강남 시대’가 열렸다. 뉴욕제과나 타워레코드는 약속장소의 대명사가 됐다. 귀에 헤드폰을 꽂고 잘 차려입은 남녀들이 저녁마다 쇼윈도 앞으로 몰려들었다.

“강남역 뒷골목에는 유명 연예인이 DJ로 나서 음악을 믹싱해주던 ‘딥 하우스’ 등 유명한 나이트가 많았어요. 학교가 끝나면 뉴욕제과 앞에서 음악을 들으며 친구들을 기다렸죠.”(김경모 씨)

나이트 문화를 주도한 건 ‘X세대’였다. 1970년대 전후 태어나 부모세대가 이뤄놓은 경제성장과 삼촌세대가 피 흘리며 쟁취한 정치 민주화의 열매를 따 먹기만 하면 되는, ‘배부른’ 세대였다. 이들은 출세나 정치에 무관심했다. 다만 개성을 최고 가치로 여겼다.

트렌드세터들이 강남역을 벗어나 로데오거리로 몰린 때는 1994년 전후다. 거리에는 잇달아 보세옷가게와 트렌디한 포장마차들이 들어섰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패션에 관심 있는 여성들은 ‘샤넬풍’ ‘루이비통풍’ 수입의류와 액세서리들을 이곳에서 샀다. 엄소민 씨는 “통유리로 된 카페에 앉아 있으면 여기저기 호출기가 울렸고, 테이블마다 놓인 전화기로 하루 종일 친구들과 수다를 떨었다”고 회상했다.

압구정동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게 ‘오렌지족’. 강남지역에 뿌리내린 부유층 2세들은 부모 돈으로 외제 자동차를 굴리며 ‘야타족’이 돼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겼다.

이후 청담동이 뜨면서 상류층 마케팅이 본격화됐다. 해외 유학 경험이 있는 강남키드와 ‘딴따라’에서 ‘현대판 귀족’으로 신분 상승한 연예인들이 타깃이었다. 발레파킹이 되고, 대리석이 깔리고, 소믈리에가 와인을 서비스하는 고급 음식점, 패션 부티크와 바들이 성업했다. 퓨전 요리, 웰빙 음식점, 앤티크 가구, 젠 스타일의 발상지이기도 했다.

‘브런치족’과 함께 뜬 곳은 도산공원 거리다. 늦은 아침을 의미하는 브런치는 한때 20∼30대 여성들이 주말마다 즐겨야 하는 ‘머스트 해브(must have)’ 아이템이 됐고 음식값이 턱없이 비싼 청담동을 도산공원 거리가 대체했다.

사람 냄새 진한 이국풍 거리

자유와 情이 흐르고

그러다 지난해부터 가로수길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여태껏 유행했던 어떤 강남길보다 독특하고 유행의 패러다임을 바꾼 길이다.

부동산컨설팅회사 ‘포시즌씨앤에셋’의 정성진 사장은 “강남은 60∼70%만 개발돼 있어 아직도 유행하는 거리가 바뀔 여지가 크다”고 말했다.

○가로수길이 뭐기에?

명동에서 청담동까지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과시욕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가로수길은 과시보다는 그저 즐기기 위한 공간이 많다.

이곳은 주차시설이 거의 없다. 고급자동차를 타고 격식을 갖춘 식당에서 서비스를 받는 대신 걸어 다니며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아 들어가 원한다면 하루 종일 있어도 된다.

와인바 ‘쿠바’에서는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친한 사람들과 오붓이 즐기는 느낌이 들도록 방석을 깔고 앉을 수 있는 자리도 있다. 카페 ‘블룸앤구떼’처럼 봄이면 통유리로 된 문을 활짝 열어젖힌 카페가 즐비해 마치 정취 있는 유럽의 길거리를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


▲ 영상취재 : 동아일보 사진부 박영대 기자

외향만 가져온 게 아니다. 이곳 가게주인들은 해외유학파가 많아 라이프스타일까지 가져와 일요일엔 문을 닫는 가게도 있다. 가족과 즐기려고. 모자 가게 ‘모굴’의 고훈 씨는 일본에서, 소품 가게 ‘엑서사이즈 드 스타일’의 강수정 씨는 프랑스에서, 블룸앤구떼의 이진숙 조정희 씨는 런던과 파리에서, ‘카페 별’의 안진선 씨는 미국에서 유학했다.

장삿속이 왜 없겠는가만 자신이 즐기고, 잘할 수 있는 무엇을 소비자들과 함께 ‘즐기고 싶다’고 생각하는 주인도 많다.

장난감과 외국 책을 파는 ‘마이 페이버릿’의 부부 성미정 배용태 씨는 13년 된 등단 시인이다. 좋은 책을 고르고 의미 있는 장난감을 골라 ‘안목이 있는’ 손님들에게만 판다. 카페 ‘앨리’에서는 손님이 앉았던 실내가구들을 판다. 쿠바와 ‘사루비아’에서는 가게를 꾸며놓은 장식용 소품을 판다. 즐겨보고 좋으면 사라는 것이다.

신진 디자이너들이 아이디어를 실험하기 위해 낸 숍도 많다. 디자이너 이상봉 씨 밑에 있던 이석태 씨는 곧 이 길에 ‘KAAL’ 매장을 연다. “이곳은 예술적이고 자유롭고 고즈넉해서 좋다”고 이 씨는 말했다.

제일모직 해외상품3팀 전찬웅 팀장은 일본 라면집 ‘라멘구루’를 운영한다. 그는 “출장차 즐겨 찾았던 일본의 골목 라면집 분위기와 맛을 한국에 소개하고 싶었다”며 “몇 개월 뒤 직원들을 일본에 연수시켜 업그레이드된 실력을 선보이겠다”고 말했다.


▲ 영상취재 : 동아일보 사진부 박영대 기자

지난해 12월 ‘가로수길이 뭔데 난리야’라는 책을 낸 광고대행사 TBWA의 제작전문 임원인 박웅현 ECD는 “외국 문화의 겉모습만 따라하던 한국의 트렌드세터들이 가로수길에 이르러 드디어 속 내용을 즐기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가로수길의 정서는 ‘강북의 정서’ 혹은 ‘빈티지’다. 낡은 것에 대해 친밀하게 느끼고 가족끼리, 친구끼리 오붓하게 교감하는 것에 열광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비슷한 정서의 부암동 길에도 강남 키즈들의 발길이 잦다. 지난해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커피프린스1호점’의 촬영장소가 됐던 카페 ‘산모퉁이’, 서울시향의 플루트와 오보에 연주자였던 음악인 부부가 예술가 공동체 성격으로 운영하는 카페 ‘아트 포 라이프’가 대표적이다. 아트 포 라이프의 용미중 사장은 “장애인 후원을 위한 콘서트와 저녁을 즐기는 ‘토요음악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분당과 강남권 고객이 많다”고 말했다.

○유행을 주도하는 것 혹은 사람

유행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트렌드세터라 이들이 유행을 주도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 밑에는 이들이 움직이게 만드는 사람 또는 무언가가 있다.

한 축은 부동산이다. 청담동이 이제는 뜨지 않는 장소가 된 것은 너무 오른 부동산값 때문이다. 경희부동산 고효남 사장은 “청담동이나 압구정동에서 가게를 열었지만 매출이 기대만큼 오르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가로수길에 대한 문의전화가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로수길도 이미 대로변에는 땅값이 크게 올랐다. 최근 2년 새 상승폭은 보증금은 평균 50%, 월세는 평균 30% 정도다. 무엇보다 2006년 대로변 가게 33m²(10평) 기준으로 3000만 원 선이던 권리금은 1억 원 수준으로 올랐다.

부동산값은 괜히 움직이는 게 아니다. 유행을 읽어내는 큰손들이 투자를 먼저 시작해야 한다. 가로수길을 제일 먼저 움직인 사람들은 가수 ‘싸이’의 어머니 김영희 씨와 스타일리스트 신경옥 씨로 알려져 있다. 김 씨는 가로수길에 ‘코지’ ‘콰이19’ ‘모던밥상’을 운영하고 있다. 신 씨는 취향대로 ‘19번지’, ‘정든집’, ‘그랜드마더’, 블룸앤구떼 등을 스타일링해 거리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 영상취재 : 동아일보 사진부 박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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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하임숙 기자 artemes@donga.com

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

사진=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디자인=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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