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세상 풍경]2007년 여름, 한국 팩션에서 느끼는 쾌감

  • 입력 2007년 6월 9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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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출간된 ‘왕의 밀실’을 읽었다. ‘조선사 미스터리, 광해군 밀실의 반역 살인사건과 좌참찬 허균의 목숨을 건 수사잠행 4일간의 비록(秘錄)’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팩션(faction)이다.

출근길 시내버스 정류장에서도, 횡단보도에서 초록색 신호등을 기다리면서도 책장을 넘겼다. 이유는 간단했다. 긴장감 넘치고 재미있어서였다.

천둥 번개 치던 지난해 여름의 어느 날 밤, 또 다른 팩션 ‘뿌리 깊은 나무’를 읽을 때의 느낌이 되살아났다. 왕의 침전인 경복궁 강녕전에서 세종이 한글 창제 반대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장검(長劍)을 들고 펼치는 한판 승부. 그 긴박한 장면은 지금도 온몸을 서늘하게 한다.

팩션은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합친 말.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을 가미한 소설을 가리킨다. 살인사건을 설정해 추리소설 기법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내에서 팩션이라는 장르가 부각한 것은 2004년 ‘다빈치 코드’가 번역 소개되면서부터. 그 후 국내 작가들이 팩션에 관심을 기울이더니 지난해부터 그 성과물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지난해 초 ‘정약용 살인사건’이 출간됐고 지난해 여름 ‘뿌리 깊은 나무’ ‘훈민정음 암살사건’ ‘원행(園幸)’이 나왔다. 그리고 1년이 흐른 지금, ‘왕의 밀실’과 ‘백제 결사단’이 선보였다. 팩션이 여름 휴가철을 알려 주는 신호탄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 가운데 ‘뿌리 깊은 나무’와 ‘왕의 밀실’밖에 읽지 못했지만 그 독서의 쾌감은 대단했다.

그러나 책이 출간될 당시 우리 언론과 비평계의 관심은 의외로 적었다. 외국 팩션 소설에 대한 뜨거운 반응과는 대조적이다. 누군가는 “우리의 팩션이 ‘다빈치 코드’ ‘살인의 해석’ 등 외국 팩션에 비해 스케일이 작고 긴박감과 정교함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부인할 수 없는 대목도 있다.

하지만 우리 역사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고 팩션을 읽어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단순한 흥미가 아니라 우리 가슴을 저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뿌리 깊은 나무’가 지금까지 35만 부나 팔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뿌리 깊은 나무’를 읽은 뒤로 경복궁에 갈 때면 강녕전에 들러 눈을 감고 세종의 결투 장면을 떠올린다. 훈민정음 창제의 지난한 과정에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주말엔 경희궁의 숭정전을 찾아야겠다. 작품 속에서 광해군과 허균의 눈물, 자객의 피가 솟구쳤던 그 밀실이 숨겨진 숭정전. 물론 밀실이 실제로 존재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숭정전 앞에 서면 명청(明淸) 교체기, 명분과 실용 사이에서 처절하게 요동쳤던 17세기 초 조선의 역사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한국 팩션의 매력 아닐까.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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