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디지털시대, 일상을 다시 본다

  • 입력 2002년 9월 10일 18시 48분


명멸하는 2400개의 숫자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갖게 하는 미야지마의 메가 데스(MegaDeath)사진제공 아트선재센터
명멸하는 2400개의 숫자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갖게 하는 미야지마의 메가 데스(MegaDeath)사진제공 아트선재센터
《세계 미술계의 차세대 선두 주자로 꼽히는 일본의 설치작가 미야지마 다츠오(45)와 영국의 여성 조각가 레이첼 화이트리드(39). 두 작가의 전시가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11월10일까지 서울 종로구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는 미야지마전과 10월19일까지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화이트리드전. 미야지마는 디지털시대 숫자의 명멸을 통해 삶을 성찰해보는 작품을, 화이트리드는 일상을 낯설게 하는 방식을 통해 삶의 의미를 탐색한 작품을 선보인다.》

▼미야지마 다츠오전▼

인간은 숫자와 함께 살아간다. 숫자는 너무나 평범한 일상이 되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숫자에 무심하다. 그러나 미야지마는 숫자에서 삶과 죽음을 발견한다. 이번 전시는 ‘카운트 오브 라이프(Count of Life)’라는 주제에 걸맞게 숫자를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컴퓨터 모니터 몇 대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모니터의 지시대로 자신의 이름과 사망 예정일을 입력한다. 남아있는 생이 금세 수천만 초로 환산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하나 둘 그 숫자가 줄어든다. 숫자가 줄어들수록 점점 죽음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남아있는 내 수천만 초의 인생은 과연 무엇인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작품 제목은 ‘죽음의 시계’. 그러나 이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죽음의 시계는 삶의 시계로 변해간다. 하나 둘 줄어드는 숫자가 마치 심장 박동처럼 느껴진다.

2층 전시실의 ‘메가 데스(Mega Death)’. 36m×4m의 대형 벽면에 푸른색 발광 다이오드 숫자판 2400개가 설치돼있다. 그 숫자판에선 1부터 9까지의 숫자가 각각 점멸을 거듭한다. 밤하늘의 별빛처럼 환상적이다. 누군가 그 숫자판 앞을 죽 걸어가면 센서에 감지돼 갑자기 숫자판의 2400개 불빛과 실내 조명등이 꺼진다. 칠흑같은 어둠이다. 그것은 곧 죽음의 체험이다. 2분 남짓 암흑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다시 2400개의 숫자판이 하나둘 켜진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의 열림이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다.

첨단 테크놀로지에 동양적 사유를 가미하고, 사소하게 여겼던 숫자에 깊은 철학을 부여한 미야지마의 작가정신이 돋보인다. ‘메가 데스’는 지난 밀레니엄의 마지막해인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돼 세기말의 삶과 죽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수작으로 평가받았던 작품이다.

전시실의 유리창에 1부터 9까지의 투명한 숫자가 차례대로 명멸하는 ‘카운터 윈도우’,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한 숫자가 다양한 크기와 색으로 부유하도록 만든 영상물 ‘떠도는 시간’도 매력적이다. 02-733-8940

책꽂이와 책꽂이 사이의 빈 공간에 대한 주목을 통해 일상을 되돌아보게 하는 화이트리드의 ‘무제’. 사진제공 국제갤러리

▼레이첼 화이트리드전▼

화이트리드의 작품은 언뜻 보면 단순하다. 그러나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일상의 흔적을 예리하게 포착해내는 작가의 비범한 창의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대표작인 책꽂이 석고 형상물 ‘무제’. 책이 꽂힌 책꽂이와 책꽂이 사이를 석고로 씌우고 석고가 마르면 책꽂이와 책을 빼낸다. 책장의 흔적이 남고 책표지의 색깔이 은은한 흔적으로 남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뽀얀 작품은 담백하고 단정하다.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았던 책꽂이와 책꽂이 사이의 빈 공간에 눈길을 준 화이트리드. 그 비어있음에 생명력을 부여함으로써 사소한 일상을 되돌아보게 한다. 또한 책의 흔적을 보고 있으면 여기 꽂혀 있던 책은 무엇이고, 누가 이 책을 읽었을까, 잠시 생각에 빠지게 한다.텅빈 꽃병의 내부를 주조해 만든 작품도 눈길을 끈다. 꽃병 내부의 빈 공간을 작품으로 형상화함으로써 관객들을 비어있음에 대한 사색으로 이끈다. 02-735-8449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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