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속의 에로티시즘]게이필름 페스티벌

  • 입력 2002년 2월 28일 14시 22분


영화 '졸업'의 한 장면을 패러디한 게이필름 페스티벌 광고
영화 '졸업'의 한 장면을 패러디한
게이필름 페스티벌 광고
화가 마르셀 뒤샹은 모나리자의 코 밑과 턱에 수염을 그려 넣은 어린 아이의 장난 같은 해프닝을 작품이라고 선보였다. 레디메이드(Ready-made) 아트라 불리는 이 같은 작업은 이미 완성된 작품에 약간의 트릭을 가미함으로써 원본이 품고 있던 콘텍스트를 벗어난 새로운 의미의 콘텍스트를 형성했다. 뒤샹은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사물을 묘사하는 테크닉이 아니라 작가가 생각하는 관점이란 점을 알리려 했던 것이다.

베끼기와 패러디의 차이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두 가지 모두 원본과 드잡이를 한다는 점에선 같은 길을 걷지만, 전자는 낯익은 얼굴을 낯익게 보여 주는 김 빠진 베낌인 데 비해 후자는 ‘낯익은 낯섦’을 던져 주는 창조적 베낌이란 점에서 다르다. 패러디가 가진 강점은 이처럼 원본의 아우라(Aura·氣)는 간직하되 새로운 의미를 형성해내는 데 있다. 이때 원본은 풍자의 대상이 되거나 희화화되기까지 한다. 그런 관점에서 패러디는 유머와 해학의 기능을 함께 가지는 특징을 지닌다. 특히 광고에서 그 점이 두드러진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렸던 게이필름 페스티벌 광고를 예로 들어보자. 이 광고는 영화 ‘졸업’의 유명한 한 장면을 패러디하고 있다. 로빈슨 부인(앤 밴크로프트)이 딸의 남자 친구인 벤 브래덕(더스틴 호프먼)을 유혹하는 바로 그 장면이다. 늘씬한 각선미가 화면 앞에 걸리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브래덕의 표정을 잡은 촌철살인의 한 컷은 알몸을 보여줄 때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에로틱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었다. 여백을 남겨둠으로써 시청자들이 상상할 공간을 마련해 놓았기 때문이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풋내기를 유혹하는 병든 사회, 대학은 졸업했지만 요지경 속인 사회의 굴레를 졸업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

광고에선 로빈슨 부인의 에로틱한 각선미가 양말을 신은 남자의 두툼한 다리로 대치되어 있다. 레디메이드 된 원본에서 하나의 요소만을 바꿔치기 함으로써 전혀 다른 내용의 의미망을 형성한다. 그 단순한 치환은 그러나 게이필름 페스티벌이라는 새로운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알리는 놀라운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한눈에 메시지가 쉽게 들어오는 것은 그만큼 원본이 가진 힘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강력한 패러디는 강력한 원본에서 나온다. 물론 창조적 베낌이어야 한다는 강력한 전제가 선행되는 한에서 그렇다. 김 홍 탁

광고평론가·제일기획 크리에이티브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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