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속의 아버지는 뛰어넘어야할 절대권위

  • 입력 2002년 2월 19일 15시 46분


투르게네프
투르게네프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은 주의 명령으로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친다. 그가 제단 장작 위에 어린 이삭을 묶어 놓고 칼로 막 찌르려고 할 때 주가 나타나 말한다.

‘아브라함아, 그 애에게 손대지 마라.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다.’

비기독교 신자에게도 잘 알려진 성경 창세기의 이 대목은 신에 대한 절대 복종을 상징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의 아버지 상이 겹쳐 있다.

즉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 아브라함에게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는 아버지 상이라면, 아브라함도 사랑하는 아들 이삭에게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는 아버지상인 것이다’(워킹 더 바이블, 브루스 페일러 저).

아들에게 아버지는 기성의 권위를 대변하는 존재다. 성경은 아브라함-이삭의 일화를 통해 종교적 순종이라는 형식 속에 기성 세계에 대한 절대 복종이란 메시지를 녹이고 있다.

그러나 문학이란 궁극적으로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이듯 문학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관계는 성경에서처럼 순종과 경배보다는 갈등과 대립의 구도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절대 권위인 아버지의 성벽을 넘어서려는 투쟁의 과정은 문학의 가장 흔한 모티브 중 하나였다. 수많은 작가들에 의해 다양하게 변주(變奏)되면서 하나의 장르를 형성했을 정도다.

아버지를 누르고 주신이 된 제우스신의
얘기는 부권에 대한 갈등과 투쟁의 원형을
보여준다

성경과 함께 서구 문학의 또 하나의 뿌리인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이런 대립-갈등의 원형이 드러나 있다. 주신(主神) 제우스가 올림포스산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이자 억압자인 크로노스를 꺾고서야 가능했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아버지에 대한 원초적 적의를 소포클레스의 비극에서 빌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이름 붙였다. 특히 시민사회가 형성되고 낡은 질서에 대한 혁명의 열기가 높던 19세기에는 이런 반(反)기성의 경향이 뚜렷해졌다.

러시아 소설가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의 주인공 바자로프는 반항적 젊은이의 대변자였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니힐리즘의 신봉자로 자처한 그는 “지금 이 시간엔 부정하는 것이 제일 유익하다. 그래서 우리는 부정하는 거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떨어져 나가려고 하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들은 외롭다. “나는 뒤에 처져 남고, 그(아들)는 자꾸 자꾸 앞으로 가버렸다”고 탄식한다.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나 미국 작가 샐린저의 ‘호밀 밭의 파수꾼’은 부모 세대와 기성문화에 비참하게 희생되거나 반항하는 청년문화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모든 대립은 결국 정반대되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기 마련이다. 부정과 대립 속엔 서로에 대한 관용과 이해의 욕구가 숨어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단절과 불일치에도 굳게 손을 잡은 니콜라이와 아르카지 부자(아버지와 아들)처럼 기성세대와 신세대는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공존의 관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명재기자 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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