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들 "혼자이고 싶을땐"

  • 입력 2002년 2월 7일 15시 46분


최고경영자(CEO)의 생활은 고독한 ‘결정의 연속’이다.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짜여진 스케줄에 그대로 노출된다. 이들은 혼자이고 싶을 때 어디를 찾을까. 그곳을 들여다봤다.

▼대우자동차 이종대 회장

대우자동차 이종대 회장(61)은 퇴근 후면 어김없이 찾는 곳이 있다. 이른 저녁이든 새벽이든 상관이 없다. 바로 자택 2층 딸이 쓰던 방이다. 지난해 10월 딸을 출가시킨 뒤 텅빈 이 공간은 이 회장에게는 어찌보면 선방(禪房)인지도 모른다. 이 방에 들어서면 아코디언을 빼내 든다. 3년 전 지인의 권유로 무심코 시작한 아코디언 다루기는 이제 이 회장에겐 생활이 돼버렸다. 밤마다 아코디언을 켜는 바람에 이웃집에서 항의해 얼마 전에 방음장치를 했다. 덕분에 ‘일상과의 단절’은 더욱 완벽해졌다.

“대우자동차 법정관리인 자격으로 대우차 매각을 맡으면서 솔직히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어요. 지난해 대우차 직원 1700여명을 정리해고할 때는 자다가 벌떡 일어나곤 했죠. 아마도 눈을 뜨고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매일 생각하고 고민하고 토론하다 보니 잠잘 때까지 고민이 이어진 것 같아요. 일상을 그대로 안고 잠이 들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딸의 방에 들어가 1∼2시간씩 아코디언을 켜곤 했다. 이 시간만은 일상의 고민과 번뇌가 사라졌다. 그저 혼자만의 공간에서 음률을 느낄 뿐이다. ‘광야를 달리는…’이란 가사로 알려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과 우리 가곡 ‘동심초’는 이 회장이 즐겨 연주하는 곡이다. 아코디언을 켜기 시작한 뒤 이 회장은 ‘그나마 깊은 잠’을 잘 수 있다고 말한다.

대우자동차 매각은 진행형이다. 본계약을 앞두고 걸림돌이 남아 있다. 하지만 본계약이 늦어도 3월까지 마무리되면 이 회장은 훌훌 털고 떠날 생각이다. 목적지는 중국 톈진(天津)음악대학. 아코디언을 좀더 체계적으로 배워 혼자만 빠져들 수 있는 공간을 넓히기 위해서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뭐 할거냐고요. 지금 생각으로서는 아마 아코디언을 들고 노인들 앞에서 연주할 것 같아요. 함께 느끼고 싶거든요.”

▼우리금융그룹 윤병철 회장

우리금융그룹 윤병철 회장(65)은 사람과 사람이 부닥치는 것 만큼 힘든 일은 없다고 했다. 4개 은행을 자회사로 둔 금융지주회사인 우리금융그룹의 회장에다 최고경영자(CEO) 모임인 한국CEO포럼 공동대표,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 회장 등 그가 맡은 직함만 10개가 넘으니 이런 말이 나올 만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점점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혼자 생각하는 것을 쉽사리 얘기할 수도 없고 모든 얘기를 듣다 보면 어느새 난 사라지고 없어요.”

94년 발레후원회 회장으로 국립발레단이 기획한 ‘해적’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던 윤 회장은 공적자금이 투입된 우리금융그룹의 정상화 때문에 공연을 볼 시간도 내기 힘들어졌다. 대신 틈만나면 걷는다.

윤 회장은 “새벽 해가 떠오를 때쯤 나서는 ‘구반포 둑길’이 나 자신을 맞닥뜨릴 수 있는 시간이자 공간”이라고 말한다. 요즘은 서울 서초구 구반포 아파트촌에 숨겨진 작은 오솔길을 찾아내 걷는 취미가 생겼다. 오솔길을 무심하게 걷다 보면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가는 날도 있다. 대부분은 혼자다. 부인이 따라 나설 경우에는 저만치 앞서서 간다.

“잘 풀리지 않는 업무를 여러 측면에서 정리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좋습니다. 너무 바쁘게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윤 회장은 우리금융그룹 회장으로서의 임무가 끝나면 두 가지 하고 싶은 일이 있다. 하나는 금융인으로서 금융 인프라를 단단히 하고 싶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후원인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아직도 메세나 활동에 미련이 많이 남습니다.” 어쩌면 공연무대는 그가 언젠가는 돌아가고 싶은 또 다른 ‘구반포 둑길’인지도 모른다.

▼화이버텍 최금주 사장

‘파이버글래스 쟁반’으로 주방시장에서 입지를 굳건히 한 화이버텍의 최금주 사장(49). 지난해에는 일본시장 공략으로 50억원 매출을 돌파하면서 여성경제인의 날에 산업자원부 표창을 받았던 최 사장은 여성경제인 사이에서 ‘만능 스포츠우먼’으로 불린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당연히 운동이나 등산을 할 것이라는 기자의 예상은 쉽게 빗나갔다.

“여성 기업인으로서 정말 힘들 때 풀어버릴 공간은 거의 없어요. 혼자 재래식 시장을 찾으면 달라요. 쓸데없는 물건을 사기도 하지만 그보단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을 통해서 ‘나’를 다시 발견한다고나 할까요?”

요즘 최 사장은 밀려오는 외제품에 대항할 거냐, 아예 수입제품도 취급할 것이냐를 결정해야 하는 기로에 있다.

“CEO가 제일 고독할 때가 결정의 순간입니다. 가족이나 친구, 임원들, 아무도 도움이 안되죠. 오직 혼자 결정해야 합니다. 그땐 어딜 찾느냐고요?”

최 사장은 혼자 차를 몰고 남한강변으로 간다고 했다. 칠흙 같은 강물을 마주 대하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떻게 할거냐’고. 끝없는 대화 속에 결론이 난다. 그녀만의 ‘절대 공간’에서 그녀만의 최고의 결정이 내려지는 것이다.

박현진 기자 wit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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