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고층빌딩 防災 "이론은 만점, 현실은 글쎄?"

  • 입력 2001년 9월 17일 18시 48분


63빌딩 비상수직구조대
63빌딩 비상수직구조대
《“테러 다음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비상시 대피할 곳이 있나부터 확인했어요.” “한강이 보인다고 다른 층보다 훨씬 비싼 값에 입주했는데 괜한 짓 했나 싶어요.” 110층짜리 마천루 세계무역센터가 테러로 무너져 내리자 63빌딩(63층·251m), 무역센터(55층·227m), 아크로빌(46층·163m) 등 국내 고층건물 입주자들이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고층빌딩 안전관리 책임자들은 “만에 하나 ‘일’이 벌어져도 만반의 준비가 돼있으니 안심해도 된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다른 듯하다. 본보 취재팀이 전문가와 함께 15일 63빌딩, 무역센터, 아크로빌 등의 방재(防災)실태를 긴급조사한 결과 ‘이론은 만점, 현실은 기대이하’인 것으로 드러났다.》

▼고층빌딩 불안증후군▼

고층빌딩 관리회사들이 화재나 가스유출 등에 대비한 ‘재래식 방재시스템’ 외에 테러, 건물붕괴 등에 대비한 대책마련을 서두르고 있다.

그러나 서울 63빌딩에 사무실이 있는 미국계 기업에 다니는 이모씨(34)는 “사무실이 한국의 맨해튼이라는 여의도의 초고층 건물이라 세계무역센터와 비슷하다는 생각에 불안하다”고 말했다.

국내 주상복합건물 중 가장 높은 서울 강남구 도곡동 아크로빌 주민들도 미국 테러사건을 ‘강건너 불’로 보지 않았다.

50대 주부 하모씨는 “고위관료나 명사들이 많이 살고 있어 테러대상일 수도 있다고 우려하는 주민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고 김모씨(34·여)는 “관리실에서 전용 인터넷으로 보내준 ‘비상시 안전수칙’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본다”고 말했다.

아크로빌 헬리콥터 승강장

서울 강남구 대치동 ERA우성부동산 이상섭 사장은 “이번 사태로 초고층 아파트에 대한 매입문의가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엉성한 방재 시스템▼

취재팀과 함께 서울 강남구 삼성동 무역센터를 둘러본 도시방재전문가 김태환 교수(용인대 경호학과)는 “2월 대구 사제 폭탄사건에서 보듯 폭탄테러가 언제든지 가능한데도 대비가 소홀하다”고 지적했다.

먼저 보안. 전투경찰 2명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지만 출입자에 대한 신원파악 등 보안검색 기능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테러 전문가가 아닌 이들은 테러범을 가릴 능력도 없어 사실상 ‘시위용’이었다. 김 교수는 “폐쇄회로 TV(CCTV)로 건물 구석구석을 감시하겠지만 사각지대는 반드시 전문 보안인력이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

비상계단도 문제다. 1층 비상계단에서 사무실복도로 통하는 문을 열자 바로 열렸다. 다른 층도 마찬가지. 아예 출입문을 열어놓은 층도 많았다. 김 교수는 “비상계단 쪽에서 내부로 통하는 문이 열리면 테러범의 공격통로로 이용될 수 있고, 내부의 화염이나 연기가 계단을 타고 순식간에 번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무역센터 비상사다리

물건을 놓을 수 없게 돼있는 비상계단 공간에는 의자 소파 쓰레기통 화분 캐비닛 등이 가득했다. 어떻게 소방점검을 통과했는지 궁금했다. 식당 직원은 “낮에는 비상계단을 창고로 이용하지만 퇴근하면서 다 치운다”고 주장했다.

63빌딩도 사정은 비슷했다. 화재 등 비상시 내부에 갇힌 사람들이 탈출할 때 이용하는 비닐호스로 된 ‘비상 수직구조대’는 비닐로 덮여있었다. 수북이 먼지가 쌓이고, 곳곳에 담배꽁초가 버려져있는 걸로 봐서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것 같았다. ‘피난사다리’도 사다리 계단 간 틈새가 넓어 ‘숙련된 조교’가 아니면 ‘이론’처럼 대피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아크로빌 측은 고층에서 불을 피해 무모하게 뛰어내리다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럴듯한 시나리오를 갖고 있다. 고층 거주자는 옥상에 있는 헬리콥터 이착륙장으로 유도, 헬기로 구출한다는 것.

그러나 옥상 물탱크 주변 호스가 헬기장으로 올라가는 철제계단을 이리저리 감싸고 있어 착륙장으로 올라가는 것 자체가 ‘모험’이었다. 미끄러운 호스를 잘못 디뎌 실족사고를 당할 위험이 있었다.

아크로빌은 에어 매트리스를 3개 갖추고 있다고 자랑했지만 ‘공연히 공포감을 조성할 수 있다’는 이유로 주민들에게 기본적인 사용법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

건축설계사무소 모퍼스의 우대성 대표는 “방재훈련 때도 ‘사고가 나면 침착해야 한다’는 식으로 막연하게 말할 게 아니라 구체적인 매뉴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호갑·조인직기자>gdt@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