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신간]'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 입력 2000년 9월 22일 18시 33분


귀가를 서두른 가을 저녁 이기철의 열 번 째 시집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를 읽는다. 잊혀져 가는 것들에 대한 소중한 추억을 불씨처럼 되살리면서 그의 시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대화처럼 들린다. 지난 세대에도 그러했지만 그가 떠올리는 이미지들은 결코 삶의 전면에 부각되지 않는 작은 풀꽃과 돌맹이와 나뭇잎 같이 이름 없는 것들이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찾아온 편지처럼 그의 시들은 가을밤 나뭇잎의 향기같은 고요한 명상을 불러일으킨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가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은 유태인 학살을 목격한 독일 문단의 격한 질문이지만, 게놈 프로젝트 이후에도 서정시가 존재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디지털적 정보화 시대의 현란한 만화경을 바라보는 우리들이 던져보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낮고 친근한 대화적 어법으로 전개되는 이기철의 시는 세상살이에 시달리는 독자들에게 안도감과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이 점에서 그의 서정시는 시대의 역류를 희망한다. 이 역류가 사랑과 그리움과 자연에 대한 동경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식물적 상상력을 근거로 발효된 것이다. 식물적 상상이란 공격적이며 파괴적인 충동이 아니다. 그의 시가 일상적 체취를 짙게 풍기면서도 일상과 안이하게 타협하지 않는 것은 도시의 빌딩과 뒹구는 고철더미들이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성을 망각시키는 것들임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력 30년에 열 번 째 시집을 내는 순간에도 그는 한 그릇 밥과 한 그릇 국의 따뜻함을 노래하는 진실한 시인이 되고자 소망한다. 시를 찾아 헤매는 동안 발이 붓고 마음의 창고에는 눈물이 쌓여가지만, 좋은 시인이 그렇게 쉽게 될 리 없다. 뛰어난 시인이 되기를 포기한 그가 깨달은 것은 이기는 일보다 지는 일이 더 아름답다는 자각이다. 돌밭과 자갈밭에 뿌린 눈물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고 있지만 시는 그로 하여금 부스럼 투성이의 지식을 내던지고 지는 일이 더 아름다운 일임을 깨닫게 해준다. 이기철의 시를 통해 우리들의 누추한 삶 또한 삶의 아름다움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그의 시를 읽는 우리의 즐거움이자 기쁨이다.

사람의 이름이 가슴으로 들어와 마침내 꽃이 되는 것을 아는데 걸리는 반생의 시간은 미움도 보듬으면 노래가 되는 것을 깨닫는데 소요된 아픔의 시간일 것이다. 그가 마침내 어둠을 밝히는 별까지 걸어가야 한다고 강조할 때 그의 서정시는 나약한 자기변명이나 자기탐닉적 감상을 떨쳐버리는 호소력을 갖는다. 경건한 마음으로 사물을 투시하는 서정시인이 될 때 그는 새와 벌레들의 실핏줄까지 환히 들여다보는 명징한 시를 쓰게 될 것이며, 우리 모두가 겪는 외로움이나 슬픔의 감정들은 그의 시를 빌어 하늘의 별이 될 것이다.

불 켜지 않아도 마음이 환한 가을밤 흰 종이 위에 유언장처럼 외롭게 쓰인 이기철의 서정시들은 낮고 작고 조그만 목소리로 우리들과 함께 가을밤을 지새우는 벗이 될 것이다.

최 동 호 (시인·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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