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독서]철학의 숲까지 거닐었던 시인 김수영

  • 입력 2000년 9월 15일 19시 01분


시인 김수영
시인 김수영
왜 지금, 아니 아직까지도 김수영인가.

한마디로, 김수영의 문학은 ‘역사의 교량’이 아니라 ‘교량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학과 삶의, 문학의 형식과 내용의, ‘내용의 형식성’과 ‘형식의 내용성’의 치밀한 변증법을 통해 건설된, 살아있는, 아니 미래를 자양분 삼는 ‘길〓교량’의 문학이며 문학의 ‘길〓교량’이며, 끝내는 (후대의 업적으로써) ‘역사의 교량’과 ‘교량의 역사’를 공(空)으로 통합하는 문학이다. 아니다 길이다. 아니다 교량이다…. 그리하여 어떻게 되는가.

그의 시에서 철학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지만, 형식으로 된 철학이 다시 내용을 압도한다. 그것이 그토록 매력적인 ‘위태로움의 미학’을 낳는 것. 그때 시는 다시 철학의 두뇌가 아니라 몸이다.

서양 계몽주의 철학의 근대적인 한계를 ‘예술 세계로의 모험’으로 극복, 현대철학의 장을 연 것은 니체였다. 그후 들뢰즈 등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현대 철학사의 역사는 예술, 특히 시와 음악이 지닌 ‘이성을 포괄―극복하는 능력’(의 명징성)을 철학의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전화(轉化)시키려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았다.

▼관련기사▼

[테마독서]김수영의 시세계

조선시대, 즉 근대화 이전 한국문화의 한 특징적인 징표는 시와 철학, 그리고 정치경제학의 혼재였다. 그것은 갈수록 시대착오적인 혼재였다. 음풍농월과 경세철학이 혼동되었으니까. 김수영은 그런 전통적 ‘서정시’의 맥을 과감하게 자르고 진정한 한국 근대시 혹은 현대시의 장을 연 시인으로 평가된다. 이것은 시에서 철학이 삭제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구분과 결합’의 변증법을 통해 시의 의미가 심오해지는 동시에 의미의 감각이 첨예화하고 그 동시성이 공간적으로도 겹쳐진다는 뜻이다. 서양의 경우 보들레르가, T S 엘리어트가, 아니 모든 현대시인들이 그랬다.

‘철학자’ 김상환은 1200장이 넘는 연구서에서 ‘시인’ 김수영을 어떻게 ‘론’하고 있을까? 시와 철학의 ‘시적인’ 겹침을 포괄하는 철학적 겹침은 어떤 내용일까? 이것은 새로우면서도 벌써, 아니 이미 흥미로운 질문이겠다.

‘풍자와 해탈 혹은 사랑과 죽음―김수영론’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시적 자유와 존재 사유, 2부 모더니즘의 체험, 3부 사유의 금욕주의. 이 중 ‘겹침’에 대한 본격적인 접근은 1부다. 우선 소제목 자체가 그렇다. ‘교량술로서의 작시’, ‘풍자와 해탈 사이’, ‘詩와 時’, 그리고 급기야 ‘詩의 視’ 등등. 1부는 대체로 촘촘한 철학적 해석, 그리고 (이것이 더 중요한데) 특히 ‘교량술로서의 작시’에서 철학이 시에게 길을 내주는 대목이 장관이다. 이 대목이야 말로 책의 장점이자 매력일 것이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김수영과는 다르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김수영의 ‘사유의 일관성’을 ‘현명한 관념론의 길’이라 부르고 있는데, 꽤나 재미있는 표현이지만 역시 ‘치열한 변증법의 길’이라고 고쳐쓰고 싶다. ‘시와 교양술’ 첫줄의 ‘김수영은 시를 썼다기 보다 시에 대한 시를 썼다’라는 선언도 마찬가지. 이것은 언뜻 사소하지만 그것이 풍자〓사랑, 해탈〓죽음의 등식, 혹은 의사 등식에 이르면 (풍자 사랑 해탈 죽음 각각에 대한 심오하고 역동적인, 그리고 시적 상상력이 풍부한 분석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것으로 화한다. ‘시인으로서’ 철학하는 태도가 ‘신인으로서’ 철학하는 태도로 둔중해지는 격. 김수영에게 중요한 것은 여기서도 그 사이 ‘교량술’이 아니었을까.

2부는 다소 저널리스틱한 글을 모아서 통일성이 떨어진다. 반면 3부는 한 제목으로 한 잡지에 두 달 간격으로 4회 연재한 것. 시를 포괄하려는 철학의 과욕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난다.

풍자를 사랑으로, 해탈을 죽음으로 전화시키는 것은 80년대식 ‘진보파’의 보수주의를 연상시킨달까…. 들뢰즈와 데카르트가 만나는 게 그 지점이던가.

▼'풍자와 해탈 혹은 사랑과 죽음 - 김수영론'/ 김상환 지음/ 민음사/ 320쪽, 1만2000원▼

김정환 (시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