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실핏줄」고졸 여사원,IMF삭풍에 『흔들』

  • 입력 1998년 6월 14일 18시 42분


해질무렵 거리에 나가 길을 걸으면, 이 도시엔 아름다운 냇물이 흐른다.

하나둘 켜지는 가로등 아래, 썰물처럼 흐르는 여직원의 퇴근 행렬. 젊음 특유의 재잘거림으로 거리마다 소근대는 시냇물∼.

여성직장인 중 다수인 고졸여사원. 학력과 성 차별 속의 고단한 하루. 유니폼을 벗고 개성의 젊음으로 돌아가는 퇴근길에는 싱그런 꿈이 넘실댔다.

그러나 IMF시대, 이들의 퇴근 발걸음마저 ‘여름 삭풍’에 휘감긴다.

“한학기만 더 다니면 되는데….” S그룹 계열사 박미영씨(23). 오후6시만 되면 지하철역을 향해 뛰는 발걸음이 숨가쁘다. 야간대학 4학년. 지난해까지는 ‘30분 일찍 퇴근’을 회사에서 양해했으나 올들어선 ‘퇴근시간 엄수’ 지침은 물론 툭하면 떨어지는 야근지시. ‘학교와 회사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무언의 압력. 아무리 서둘러도 지각과 결석은 밥먹듯 반복되는데, 저녁밥을 챙겨먹은 기억은 아득하다.

박씨만의 얘기가 아니다. 야간대학을 다니는 여직원들은 전부라 해도 무방할만큼 대부분이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중단위기다. 일부러 학교에서 먼 지점으로 발령내는 증권사도 한둘이 아니다. 자퇴나 휴학하는 여직원이 속출.

‘해고1순위는 당신들’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여직원들. 생산직은 단결력으로, 전문직은 전문성으로 대응한다지만 이들은 파편화돼 있다.

“가장 벼랑 가까이 서 있는 게 고졸여사원이다. 공공기관을 포함한 상당수의 직장에서 고통분담 구조조정의 생색을 내기위한 희생양으로 여직원을 지목하고 있다.”(한국노동연구원 선한승박사)

세상은 이들의 상황에 별 관심이 없다. 숱한 학자들과 미디어가 여성의 경제활동을 얘기하지만 대상은 주로 대졸여성, 가끔씩은 생산직.

고졸여직원은 지갑 속을 노리는 출판사나 화장품회사의 광고에서나 주빈(主賓)일 뿐.

건설회사 경리사원 김모씨(22). “여고시절 ‘대학간판보다는 보람있는 일과 실력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매일 들었다. 막상 사회에 나와보니…. 매스컴과 어른들은 간판이 중요한 게 아니라지만 실제로 그렇다고 믿는가?”

H건업 성정아씨(23·K대 디자인과). “갓 스물을 넘긴 어느날 퇴근길에 ‘우리에게 노동은 신성한 자아실현의 도구가 아니라 호구지책이구나’라는 자괴감이 들었다. 야간대학에 간 것도 학력컴플렉스를 이기고 뭔가 다른 길을 뚫어보고 싶어서다.”

LG커뮤니카토피아연구소 김종길박사(사회학). “여직원은 우리경제의 대뇌 실핏줄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보조적 업무에 종사하다보니 계층 상승, 신분변화 갈망이 클 수밖에 없다. ‘결혼을 통한 신데렐라’를 꿈꾸기도 하고 대학진학을 통해 새출발을 모색하기도 한다. 하지만 IMF사태는 학력 재력에 따른 계층의 벽을 더욱 높게 만들고 있다.”

〈이기홍기자〉lk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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