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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만6620장’.지난달 20일 약 5년 만에 우리 곁에 돌아온 종묘 정전(正殿)에 새로 올린 기와의 숫자다. 2020년 안전 문제로 보수에 들어갔던 정전은 기존 기와 중 상태 좋은 약 5000장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갈아야 했다. 기와 한 장당 완성에 걸리는 기간은 평균 1개월. 4년 가까이 쉼 없이 빚고 굽고 말리고, 다시 부수고 빚는 과정을 반복해 정전 지붕은 본모습을 되찾았다. 여름 땡볕에도 900∼1000도를 오가는 가마 앞에 불을 때며 이를 이뤄낸 건 김창대 제와장(53)이다. 국가무형유산 제91호 보유자인 그는 1998년 일면식도 없던 한형준 제와장을 찾아가 무작정 매달렸다. 그렇게 사제의 연을 맺은 두 사람은 당시 명맥이 끊기다시피 했던 전통 기와 제조법을 되살렸다. 그리고 2008년 화마로 잃어버린 숭례문 복원에 수제 기와을 얹으며 우리 문화의 소중한 가치를 드높였다. 정전에 이어 현재 사직단 기와까지 제작하며 종묘사직(宗廟社稷)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는 김 제와장을 지난달 30일 오후 종묘에서 만났다.》―오늘 오전에도 작업하셨다고요.“새벽 4시까지 전남 장흥 작업장에서 가마를 때다 왔지요. 불을 균일하게 유지해야 고른 기와가 나오거든요. 마침 오늘 사직단 현장에 올 일이 있어서…. 기와는 만든다고 끝이 아닙니다. 결국 건축물에 제대로 올라가야 매조지는 거니까요. 현장과 소통하는 게 무척 중요합니다. 겸사겸사 종묘도 들렸습니다.” ―올해 종묘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지 30년 됩니다. 뿌듯하겠습니다.“웬걸요. 올 때마다 걱정만 가득합니다. 행여 실수한 건 없는지, 종묘에 모신 왕들께서 노여워하시진 않길 바라며 고개를 숙입니다. 오늘도 ‘아, 그건 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하고 아쉬운 게 떠오르네요. 4년 동안 정전 기와 작업하며 신가한 경험을 했어요. 희한하게 가마 불 때는 날이면 기온도 바람도 딱 맞아떨어졌어요. 하늘이 보살펴 주시는구나 싶었지요. 그런데 제가 부족했을까 봐….” ―종묘가 지닌 무게감이 컸나 봅니다.“아무렴요. 다른 기와 작업 때도 제일 신경 쓰이는 건축물이 사당 같은 제례 공간이에요. 조상님을 모시는 곳이잖아요. 하물며 종묘 아닙니까. 물론 더 자긍심을 갖고 일하기도 했어요. 돈벌이로 여겼으면 맡지도 않았겠죠. 평생 닦아 온 재주로 우리 문화유산을 정비한다는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책임감은 말로 못 합니다.” ―이런 큰 공사를 마치면 이문도 남는 거 아닙니까.“그런 거 바라면 이 일 못 합니다. 요즘에야 사정이 좀 나아져서 겨우 적자나 면하는 수준입니다. 국가유산청도 신경을 많이 써 주시니까요. 숭례문 때 생각하면 훨씬 나아졌죠. 그땐 정말 마이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숭례문 복원하고 손해를 보셨다는 건가요.“이런 얘기 조심스럽긴 한데, 처음부터 스승님하고 각오하고 했던 일이에요. 당시 전통 기와는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며 실전되다시피 한 상태였어요. 그걸 스승님 혼자 되살리려 버티고 계셨던 건데, 숭례문은 적당히 해선 안 되잖아요. 안 그래도 비통하게 잃었는데, 제대로 살려내야 할 거 아닙니까. 옛 문헌 등을 다시 뒤지고 뒤져서 전통에 가장 가까운 방식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수없이 실험하고 실패하고 또 시도했겠어요. 스승님이 2013년 숭례문 기공식 끝내고 한 달 뒤에 돌아가셨어요. 모든 걸 다 쏟아부으신 거죠.” ―돈도 안 되는 일을 왜 계속하신 겁니까.“이게 ‘제 일’이니까요.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스승님이 걸으신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도 싶었어요. 저도 관두고 싶은 순간이 많았죠. 도자 전공이니 번듯한 작품 만들면 좀 근사하게 살 수도 있으련만. 내일은 관둬야지 하고 잠들었다가도, 다음 날이면 새벽같이 가마 앞에 나와 앉아 있어요. 하얗게 피어나는 불꽃을 보고 있으면, 또 마음을 빼앗기고 몰두하는 거죠. 그러다 30년 세월이 흘러버렸네요.” ―수제 전통 기와의 장점은 뭡니까.“비용 생각하면 기계로 찍는 기와가 효율적이죠. 시간도 인력도 몇 배는 줄어드니까. 공장 기와가 더 단단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문화유산엔 우리 전통 기와가 가장 잘 어울려요. 미학적인 측면만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정전을 대규모로 수리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건축물이 무거운 하중에 짓눌려 사고가 날 위험이 컸기 때문이에요. 1970, 80년대 하나둘 교체해 올린 공장 기와들 영향이 큽니다. 전통 기와보다 2배 가까이 무겁고 둔탁하죠. 선조들이 수제 기와를 올린 건 다 이유가 있었던 거지요.” ―원래 회화 전공이라고 들었습니다.“미술 배울 땐 수채화로 입문했어요. 근데 부산공예고교(현 한국조형예술고교)에 가며 도자에 관심을 가졌죠. 실력도 나쁘지 않아 모교에 9급 공무원으로 취직했어요. 근데 우연히 스승님 나오시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홀딱 반해버렸어요. 부산에서 살던 놈이 장흥까지 물어물어 찾아갔죠. 근데 어찌나 박정하게 대하시는지. 3개월 꼬박 매달리니 겨우 받아주셨어요.” ―왜 매몰차게 대하셨을까요.“제 미래가 걱정되셨던 거죠. 당신이야 평생 해 온 일이라지만, 젊은 놈이 밥 벌어먹고 살지 못할 게 뻔했거든요. 공무원이니 편하게 살 수 있는데, 왜 힘든 길을 가려 하느냐고 하셨어요. 그땐 젊은 혈기에 큰소리 땅땅 쳤죠. 할 수 있다고, 걱정 말라고. 기와로 성공해 보이겠다고.” ―그렇게 뛰어드니 천직인 걸 알았군요.“아이고, 웬걸요. 여러 번 도망가려고 했습니다, 하하. 그저 하다 보니 오기가 생겨서…. 기와 한 장 굽는 데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아십니까. 그저 빚고 굽는 게 아닙니다. 크게는 16단계, 세밀하게는 39단계를 거칩니다. ‘쨀줄질’ ‘고마괘기’ 같은 전통 방식은 설명드려도 이해하기 어려울 테고 …. 쉽게 말해 5가지 흙을 용도에 맞게 배합하고, 가마에서 일곱 빛깔을 띠도록 구워 내고, 그걸 자연 바람에 제대로 말려내야 하죠. 형태에 따라 암키와 수키와 암막새 수막새 장식기와, 크기 따라 소·중·대·특대와 등등 맞춤해서 만들어야 합니다.” ―왜 도망가지 않았나요.“누군가는 해야 하잖아요. 1980년대만 해도 수제 기와하는 곳이 몇 있었지만, 이젠 저랑 제 동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종묘 제안이 왔을 때 고민이 많았습니다. 동료랑 소주 한잔하며 자신 없다고 속내를 털어놓았죠. 뭣보다 육체적으로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습니다. 이 작업 하는 4년 동안 다른 청탁은 일절 받지도 못 해요. 6일마다 가마에 불을 때며 매달려야 하는데, 자칫 실수라도 할까 봐 그것도 두려웠고요.” ―결과가 나쁠까 봐 걱정됐던 건가요.“그런 점도 없진 않겠지만, 기와라는 게 올린다고 끝이 아니거든요. (정전을 가리키며) 오늘처럼 맑은 날에 찬찬히 보세요. 기와마다 색깔이 죄 다르지 않습니까. 수제로 구웠기 때문에 하나하나 독특한 색을 지닌 거예요. 이게 5년은 지나야 풍우를 받으며 전체적인 조화를 이뤄요. 그 사이에 금 가거나 깨지는 건 하나씩 교체하면서 세월을 겪어내야 진정한 기와가 완성되는 거죠. 근데 행여 그걸 잘못 만들었다고 보시는 분들도 있을까 걱정됐죠.” ―말씀대로 기와는 흙과 나무에 따라 다 다르다면서요.“기와 작업은 사람이 하는 일은 50%밖에 안 돼요. 불 때는 나무가 40%, 흙이 10%입니다. 셋이 조화를 이뤄야 제대로 된 기와가 나옵니다. 무슨 흙을 어떻게 섞느냐, 소나무를 때느냐 편백나무를 때느냐에 따라 굳기도 색도 달라집니다. 가마 온도를 전체적으로 균일하게 맞추는 건 수십 년 경험을 쌓아야 가능하죠. 이젠 제자들도 믿고 맡길 정도까지 된 게 다행입니다.” ―제와에 관심 있는 후학들에게 당부할 게 있을까요.“뭐든 욕심부리지 말라고 하고 싶네요. 문화유산을 보수하고 지키는 것도 결국 사람과 사람 간의 일입니다. 서로 대화하며 물 흐르듯 해야 해요. 독불장군처럼 굴면 아무것도 되지 않죠. 하나 더 보태자면, 기본을 지키는 겁니다. 좋은 흙을 찾고, 좋은 나무를 쓰고, 정성껏 가마를 때면 결과는 나옵니다. 괜히 이것저것 딴거 하려 들면 문제가 발생해요.” ―정전이나 숭례문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하고픈 말은 없나요.“딱히 그런 게 있겠습니까. 각자 마음대로 즐기시면 되죠. 그저 ‘좋네’ ‘괜찮네’ 하고…. (김 제와장은 잠시 울컥했다.) 혹시라도 고생한 사람들이 있겠구나 여겨주시면 고마운 거죠. 스승님 묘가 장흥 작업장에서 멀지 않습니다. 정전 기와 작업 끝나고 술 한 잔 따라 드리며 절 올렸어요. ‘그 힘겨운 세월 동안 스승님이 버텨주신 덕에, 저도 이어받아 세상에 도움 되는 일을 하고 삽니다’ 하고요. 앞으로도 제 힘이 필요한 곳이면, 지금까지 배운 대로 지금까지 공부한 대로 보탬이 되면서 살겠습니다.”김창대 제와장(製瓦匠)△1972년 부산 출생△1990년 부산공예고 도예과 졸업△1997년 부산동의공업대 산업디자인과 졸업△2009년 한국전통문화대 졸업△2009년 국가무형유산 ‘제와장’ 전수교육조교△2019년 제와장 보유자 인정정양환 문화부장 ray@donga.com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1960년대 제주를 배경으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섬세한 감정선과 진심 어린 서사로 해외에서도 여전히 인기가 뜨겁다. 지극히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동남아시아는 물론 중남미, 중동 등에서 화제를 모으며 또 한 번 ‘K콘텐츠’의 저력을 증명했다. 이른바 이러한 ‘한류(韓流)’가 가진 파급력의 원천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최근 동아일보와 화상 인터뷰를 가진 샘 리처드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사회학과 교수(65)는 현지에서 ‘한류 전도사’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주목받고 있는 한류 연구자다. 한국 문화 등을 분석하는 그의 유튜브 강연 영상은 최다 조회 수가 170만 회 이상을 기록할 정도로 국내외에서 관심이 높다. 미 펜실베이니아주 자택에서 인터뷰에 응한 리처드 교수는 “얼마 전부터 ‘폭싹 속았수다’를 보고 있다”라며 “K콘텐츠가 지닌 감성의 깊이와 사회적 맥락의 결합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다.》―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를 배경으로 한 가족 이야기다. 교수는 어떤 계기로 이 드라마를 보게 됐고, 외국인의 시선에서 어떤 점이 인상 깊었나. “한국인 친구들뿐 아니라 외국인 동료들로부터도 추천을 받았다. 이야기가 제주의 특별한 정서를 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단순히 제주에서 찍은 드라마가 아니라, 그곳 사람들의 감정과 언어, 공동체 의식을 이야기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인상 깊었다.” ―최근에는 소소한 일상과 감정에 집중하는 한국 드라마들도 해외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왜 이런 ‘잔잔한 이야기’가 사랑받는다고 보는가. “한국 드라마는 가족, 우정, 사랑처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정서를 건드린다. 특히 중동이나 아시아 지역에서는 성적인 요소가 적고, 전통적 가치가 중심인 K드라마에 강한 유대감을 느낀다. 서구 콘텐츠와는 결이 다르고, 바로 그 ‘다름’이 강력한 매력 포인트다.” 실제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 중동에서도 인기를 끌며 42개국에서 ‘톱 10’에 들었다.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서도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콘텐츠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고 한다. 한류가 어떻게 세계 사람들의 감정에 다가가고 있을까. “그건 정말 중요한 지점이다. 요즘 사람들은 단순한 정보보다 감정에 반응한다. K콘텐츠는 슬픔, 희망, 그리움 같은 보편적인 감정을 아주 섬세하게 전달한다. 이건 단순히 스토리의 문제가 아니라 음악, 연기, 편집까지 감정의 결을 세밀하게 다루는 기술에서 나오는 힘이다.” ―한류는 20여 년 동안 세계로 뻗어 나갔다. 그 시간 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다고 보나. “20년 전과 현재의 K콘텐츠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유사한 콘텐츠가 많아졌을 뿐, 그 중심을 이루는 정서적 기반과 메시지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류’의 본질은 무엇인가. 교수님은 여러 자리에서 ‘사회적 책임(Social Responsibility)’이 한류를 움직이는 근간이라고 말했다. 최근엔 한국 사회의 질서, 안전, 공동체 의식도 K컬처의 힘이라고 설명했다. “사회적 책임은 단순히 도덕적인 개념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서로를 돌봐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예를 들어 서구에서는 노숙자 문제나 빈곤이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한국은 그것을 사회 전체의 과제로 인식한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기보다, 구성원 모두가 책임을 나눈다는 문화다. 바로 이런 점이 K콘텐츠에도 녹아들어 외국인들이 ‘이건 다르다’고 느끼게 되는 거다.” ―공동체 의식에서 ‘나보다 우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한국적 사고방식이 외국인들에게는 어떤 점에서 특별하게 다가갈까. “K팝 아이돌을 예로 들어 보겠다. 서구에서는 스타 한 명이 중심이 되지만, K팝 그룹은 전체가 함께 움직이고, 리더조차도 전면에 나서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건 곧 ‘나보다 우리’를 우선시하는 문화이자, 집단을 위한 책임감의 표현이다. 외국인 입장에서는 이게 굉장히 색다르면서도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구체적인 사례를 든다면 어떤 게 있을까. “K팝 그룹이 주로 개인이 아닌 팀 전체로 활동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방탄소년단(BTS)이나 블랙핑크 등 K팝 아티스트는 대체로 그룹이 인기를 끈다. 특별한 한 사람이 두드러지기보단 그룹 전체가 주목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리더 문화는 한국 문화의 공동체 의식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다. 그룹에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사회적 책임과 같다.” ―한국 문화가 아시아나 미국, 유럽에선 인기를 끌고 있지만, 아프리카 등에선 아직 덜 알려져 있다는 시각도 있다. 이런 지역별 차이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나. “그건 물리적 거리보다도 ‘정서적 연결의 유무’에 더 가까운 문제라고 본다. 아프리카는 문화적 자립도가 높고, 유럽과의 연결이 더 깊다. 반면 한국과는 직접적인 문화적 접점이 적다. 그래서 아프리카보다는 감정 구조나 가치관이 더 비슷한 중동 지역이 현실적인 성장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K드라마가 성적인 요소가 적고, 보다 전통적인 가치관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류가 더 넓은 지역으로 퍼지기 위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특히 어떤 지역에 주목하면 좋을지 궁금하다. “확장만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어디와 더 깊이 연결될 수 있는가’를 봐야 한다. 아프리카 진출은 어렵고 비효율적일 수 있다. 중동은 가치관, 서사, 가족 중심 문화가 한국과 닮았고, 성적 묘사가 적은 콘텐츠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거기서 기회를 봐야 한다.” ―K드라마와 음악이 확산하는 데 유튜브나 넷플릭스 같은 플랫폼의 힘도 컸다. 어떤 방식으로 기여했을까. “넷플릭스는 단연 핵심이다. 사용자가 K드라마를 한두 편만 봐도, 알고리즘이 관련 콘텐츠를 계속 추천한다. 유튜브는 접근성이 넓고 다양한 한국 문화를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보완적이다. 틱톡은 요즘 세대의 K뷰티, 음식, 패션 등을 짧고 강렬하게 전달하면서 빠른 확산에 적합하다.” ―요즘은 인공지능(AI)이 음악이나 영상 같은 콘텐츠 제작에도 쓰이고 있다. AI가 앞으로 한류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 “기술 발전은 한국 성장의 원동력이다. 한국은 자동차, 가전제품, 컴퓨터, 통신 기술에서 독창적인 발전을 이뤘다. 그래서 AI는 한류의 다음 성장 엔진이 될 수 있다. 한국은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수용하고, 실제 응용 능력도 높다. 콘텐츠 큐레이션, 팬 맞춤형 경험, 창작 도구로서 AI는 매우 유용할 것이다. 빠른 성장보다는 ‘점진적 확장’의 시대로 전환하고 있는데, 그 흐름을 기술이 자연스럽게 이끌 수 있다.” ―앞으로 한류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어떤 점을 가장 신경 써야 할까. “가장 큰 위험은 ‘한국적이지 않은 것’을 만들기 시작할 때다. 글로벌 트렌드에 맞춘다고 하면서 한국 특유의 감성과 문법을 버리면 더 이상 한류라 부르기 어렵다. 자기복제를 하더라도 그 안에 반드시 ‘독특한 불꽃(unique flare)’, 즉 한국에서만 나올 수 있는 감성과 정교함이 담겨 있어야 한다. 영화, 드라마, 음악 등 전 세계의 다른 모든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만들지 말라. 사람들은 한국 문화를 기대하고 한국 문화가 아닌 것을 원하지 않는다.” ―올해 2월 강의 내용을 담은 책 ‘스위트 스팟’이 국내에도 출간됐다.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썼나. “한국은 제가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나라다. 그동안 강연이나 수업을 통해 한국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 왔지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스위트 스팟’은 단순히 개인의 성장만을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라, 한국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사회적 고민과 감정을 함께 담아 보려 했다. 책을 통해 대화를 더 이어가고 싶었다.” ―한국 사회와 한류를 오랫동안 지켜봐 온 외국 학자로서 한국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까. “한국은 세계에서 보기 드문 역동성과 섬세함을 동시에 지닌 나라다. 너무 빠르게 달려온 만큼, 이제는 잠시 속도를 늦추고 자신만의 호흡으로 걸어가도 좋다고 생각한다. 문화도 마찬가지다. 전통과 감성이 어우러진 한국 콘텐츠는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 이제는 더 많이 바꾸기보다, 더 깊이 있게 전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면 한국 문화는 더 오래, 더 넓게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다.”샘 리처드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사회학과 교수△1960년 미국 오하이오주 출생△1983년 미국 털리도대 학사△1985년 미국 털리도대 석사△1992년 미국 럿거스대 사회학 박사△1990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사회학과 교수△2011년~강의 녹화한 유튜브 채널 ‘SCC 119’ 운영. 구독자 38만 명. 누적 조회 수 1억 회 이상△2023년~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석좌교수△2025년 2월 저서 ‘스위트 스팟’ 한국 출간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정양환 문화부장 ray@donga.com}
“나 맨날 맨날 백 환 줘. 나 물질 좀 안 나가게. 나도 죙일… 내 새끼만 쳐다보고 살아 보게.”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꽤나 여러모로 얘깃거리를 몰고 다닌다. 어여쁘지만 한이 서린 제주 바다. 1960년대부터 이어진 지난한 서민들의 삶. 문예 소설을 마주한 듯 찰진 대사까지. 그래도 꼭 하나를 꼽자면 단연 화제의 꽃은 ‘엄마’다. 언제건 어디서건 “폭삭 속았던”(수고 많았다는 뜻의 제주말) 우리네 어머니들을 제대로 화폭에 담아냈다. 특히 주인공 애순(아이유)의 엄마는 등장만 해도 먹먹하다. 배우 염혜란 씨가 열연한 광례. 그야말로 눈물 버튼이다. 억척스러운, 아니 억척스러울 수밖에 없던 시절. 자식 잘되길 바라며 모든 걸 쏟아붓는 인생. 죽음을 앞두고도 딸내미 입에 먹을 거 넣어 주려는 그 마음. 뉘라서 울컥하지 않을까. 온라인 맘카페에선 “광례 보다가 꺽꺽대고 통곡했다”는 글들이 수시로 이어진다. 실은 얼마 전까진, 맘카페에선 다른 엄마가 뜨거운 입방아를 타고 넘실거렸다. 개그맨 이수지 씨가 연기한 “제이미(Jamie)맘 이소담 씨”다. 유튜브 채널 ‘핫이슈지’에서 지난달 4일 선보인 영상은 이달 18일 기준 조회수 836만 회가 넘었다. 사교육에 열성인 강남 엄마들을 일컫는, 이른바 ‘대치맘’ 패러디. 화제를 넘어 사회적 논쟁까지 불러일으켰다. 누군가는 한국의 과도한 교육열을 적확하게 짚어냈다며 환호했다. 반면 아이의 앞날을 위해 애쓰는 진심을 너무 비꼬았단 지적도 만만찮다. ‘엄마=희생’은 당연하지 않아60년대 초 애순맘과 2025년 제이미맘은 각자의 시공간이 무척 다르다. 60여 년 세월만큼 처한 상황도 동떨어진다. 한데 시대를 관통하는 공감대는 있다. 그 시절 어머니도, 지금 이웃집 엄마도 자식 위한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목숨 걸고 물질하는 해녀에 비할 바는 아니어도, 아들 기다리며 운전석에서 김밥으로 끼니 때우는 정성도 폄훼할 순 없다. 그래서 더 안쓰럽기도 하다. 세상은 나아졌는데 엄마들의 어깨는 여전히 뻐근하다. 물론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건 본능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희생이 당연하진 않다. 프랑스 철학자 엘리자베트 바댕테르는 책 ‘만들어진 모성’에서 “현대 사회는 19세기부터 생산의 극대화를 위해 육아의 중요성이 제기됐다”며 “노동력을 길러내려 여성에게 모성애를 강요하고 양육을 전담하게 했다”고 짚었다. 근대화 과정에서 남성은 노동, 여성은 가사와 육아를 주로 책임지게 하는 ‘사회적 기제’가 작동했단 얘기다. 그런 맥락에서 12일 개봉한 영화 ‘침범’은 모성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난폭한 성향의 딸을 키우는 엄마 영은(곽선영). 갈수록 책임감보다 두려움이 앞서는 그는 자꾸만 혼란스럽다. 영은의 심장을 파고드는 상실감은 숭고한 모성을 부정하는 반사회적 일탈일까.모성이 볼모가 되는 세상 어머니는 위대하다. 모성애는 아름답다. 하지만 사회가, 문화콘텐츠가 그런 엄마의 희생을 영웅화하고 신화화할수록 세상 어머니들은 숨 쉴 틈을 잃어간다. 제이미맘이 입는 바람에 몽클레어 패딩이 꺼려지는, 타인의 시선에 유독 취약한 우리 사회에선 더욱 그렇다. 이미 한국은 육아에 대한 집단적 공포가 켜켜이 쌓이다 못해 문드러지고 있지 않나. “귀신이 무섭나? 자식이 무섭지. 나는 막판까지 저승 돈 벌어와, 이승 자식 쌀독 채워 놓을랍니다.” 엄마 광례는 그렇게 떠나간다. 딸 애순이 약속한 진주목걸이는 구경도 못 한 채. 정부와 사회가 복지 정책으로 해결할 문제를 엄마들에게 떠맡기는 한, 한국이 망할 징조라는 ‘출산율 0.7’은 더 떨어질지도 모른다. 수고 많았단 인사치레는 이제 그만하자. 그 수고를 덜어줘야 한다. 정양환 문화부장 ray@donga.com}
“Drill, baby, drill(뚫어라, 또 뚫어라).” 예정된 수순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화석연료 사랑은 첫 재임 때부터 유명했다. 7월 공화당 전당대회 때도 ‘수능 금지곡’처럼 돌고 돌았던 이 말은 트럼프 에너지 정책의 포고령과도 같다. 워싱턴포스트(WP)가 예견하듯, 텍사스든 알래스카든 이제 파헤쳐질 일만 남았다. 실은 ‘드릴 베이비 드릴’은 트럼프 당선인의 신조어는 아니다. 2008년 마이클 스틸 전 메릴랜드 주지사가 석유 및 천연가스 시추 확대를 강조하며 처음 쓴 슬로건이다. 이후 세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가 갖다 쓰더니, 지난해부터 트럼프 당선인이 본인 유행어로 만들었다. 하긴, 누가 봐도 간결하게 머리에 탁 꽂히는 메시지니 그의 입맛에 딱 맞지 않나. 무엇보다 당선인에겐 그걸 ‘현실화할’ 힘이 차고 넘친다. 지체했다간 망할 것처럼, 트럼프 인수위원회는 뚫고 뚫으려 착착 준비에 들어갔다. 더그 버검 노스다코타 주지사를 ‘에너지 차르’라며 내무장관에 지명했고, 미 환경보호청(EPA) 청장은 리 젤딘 전 하원의원을 지명했다. “지구온난화는 과학적 근거가 없다”며 친(親)화석연료 정책을 앞장서서 주장해온 이들이다. 화룡점정은 에너지장관에 지명한 크리스 라이트 리버티에너지 최고경영자(CEO). 천연가스 추출 공법을 개발한 인물로, 기후변화 대응을 “소련 공산주의 같은 짓”이라고 폄하해 왔다. 트럼프 당선인과 측근들은 왜 이리 화석연료에 집착하는 걸까.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4월 플로리다주 사저 마러라고 리조트에선 미 석유업계 거물들이 참석한 비공개 만찬이 열렸다. 트럼프는 이 자리에서 선거자금 10억 달러(약 1조4100억 원)를 지원하면 그들을 옥죄던 각종 규제 철폐를 약속했다고 한다. 가뜩이나 “해수면은 원래부터 오르락내리락했다”는 철학을 가진 당선인에게 이런 거래는 임도 보고 뽕도 따는 셈이다. 특히 화석연료로 값싼 전력을 확보하면 트럼프 당선인이 주창한 미 제조업 부활에 엄청난 득이 된다. 석유와 천연가스로 생산한 에너지를 수출해 골치 아픈 무역적자를 메울 수도 있다. 공화당 대선 공약집 ‘의제(Agenda) 47’에서도 “미국을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에너지 보유국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트럼프의 전략은 이미 먹혀드는 분위기다. 전쟁으로 러시아산 천연가스의 매입이 어려워진 유럽연합(EU)은 미국산 수입을 늘리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최근 한 인터뷰에서 “대미 무역수지 관리를 위해 미국산 에너지 수입을 확대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WP에 따르면 호주와 노르웨이 등도 미국 기조에 맞춰 화석연료 개발에 나서고 있다. 어딘들 지금 트럼프 눈치 안 볼 나라가 있겠나. 그가 원하는 걸 얻는 동안 세계는 어디로 흘러갈까. 지난달 유엔 세계기상기구(WMO)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지구의 평균 온도 상승 폭은 1.54도였다. 기후위기 대응의 마지노선이라는 1.5도를 넘어섰다.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 2기 4년 동안 온실가스 배출량이 40억 t 이상 늘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금 겪는 이상기후는 다가올 날들에 비하면 ‘아보하’(아주 보통의 하루)일 수 있다는 뜻이다. 그 뚫린 상처는 우리가, 우리 아이들이 감내해야 한다.정양환 국제부 차장 ray@donga.com}
“트럼프 댄스(Trump Dance)가 폭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CNN방송) 처음엔 조롱의 대상이었다. 지난달 14일(현지 시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타운홀 행사. 유세 중이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은 갑자기 음악을 틀어달라더니 무려 40분 동안 말도 없이 춤을 췄다. 실은 춤이라 부르긴 민망한, 둠칫둠칫 어깨를 들썩이는 수준. 경쟁자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조차 X에 “(정신) 건강이 괜찮길 바란다”고 했을 정도였다. 미 음악계에서 이게 댄스인지, 꿈틀거림(wriggling)인지 갑론을박이 오갈 정도로 놀림거리였던 몸짓. 하지만 세상은 모를 일이다. 대선 뒤 트럼프 댄스는 삽시간에 승리의 세리머니로 둔갑했다. 특히 여러 스포츠 선수들이 따라 하며 소셜미디어에 숱한 밈(meme)이 쏟아지고 있다.시작은 미국프로미식축구리그(NFL)였다. 10일 플로리다주 탬파에서 열린 탬파베이 버커니어스와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대결. 포티나이너스의 닉 보사 선수가 태클 성공 뒤 어정쩡한 춤을 선보였다. 지난달 인터뷰에서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모자를 썼다가 정치 중립 위반으로 벌금 1만1255달러(약 1565만 원)를 냈던 그였기에 뭘 하는 건지 누구나 알아봤다. 보사는 이후 샌프란시스코크로니클에 “모두가 내게 트럼프 댄스를 원했을 것”이라며 “그저 호응에 응했을 뿐”이라고 했다. 던져진 불씨는 온 들판에 퍼져갔다. 종합격투기(UFC) 헤비급 챔피언 존 존스는 16일 뉴욕 경기 승리 뒤 트럼프 댄스를 춰 현장에서 지켜보던 트럼프 당선인을 흐뭇하게 했다. 이후 NFL의 저데리어스 스미스와 브록 바워스, 캘빈 리들리도 동참했다. 심지어 미국이 자랑하는 축구스타 크리스천 풀리식(AC밀란)까지 18일 국가대표전에서 따라 했다. 보사와 존스 외엔 모두 “정치적 의도 없이 재미 삼아 췄다”고 해명했지만, 이미 불길은 활활 타올랐다. 친(親)트럼프 매체 폭스뉴스는 신이 났다. 진행자 제시카 탈로브는 “스포츠 스타들의 솔직한 의견 표명은 환상적”이라며 “트럼프 당선인과 스포츠계의 재결합(reunion)이 시작됐다”고 반가워했다. 사실 트럼프 당선인은 소문난 스포츠 애호가다. 골프광이자 뉴욕 양키스의 열혈 팬이고, 복싱 사이클 레슬링 등 여러 종목을 후원해왔다. 데이나 화이트 UFC 대표가 강성 트럼프 지지자가 된 건 UFC가 초창기 스포츠계에서 따돌림당할 때 트럼프 당선인이 적극 도와줬던 게 결정적 계기였다. 하지만 트럼프 당선인은 첫 재임 동안 스포츠계와 원만하지 않았다.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언동과 정책으로 많은 스타들이 등을 돌렸다. 미국프로농구(NBA)의 르브론 제임스와 스테픈 커리는 대표적 트럼프 혐오주의자들. 미 프로 스포츠는 우승하면 이듬해 백악관 방문이 관례이나, 상당수 NBA와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응하지 않았다. 그때마다 ‘절대 참지 않는’ 트럼프 당선인은 폭언을 퍼부었다. 내년 트럼프 2기 행정부는 탈로브의 말대로 ‘데탕트(D´etente)’가 이뤄질까. 일단 6월 16년 만에 우승했던 NBA 보스턴 셀틱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다고 한다. 농구는 리그 시작이 빨라 이달 22일 ‘조 바이든 대통령이 있는’ 백악관을 방문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년 프로야구 LA 다저스다. 핵심 멤버인 감독 데이브 로버츠와 슈퍼스타 무키 베츠는 트럼프 초대를 거절한 전력이 있다. 역시나 세상 일은 알 수 없다. 어쩌면 우린 오타니 쇼헤이와 트럼프 당선인의 어깨동무를 볼 수도 있다. 다만 기억해야 할 게 있다. 마음의 응어리는 오래간다. 특히 트럼프 당선인은 그걸 쉽게 잊을 사람이 아니다. 함께 춤을 춰도 언제 발을 밟을지 모른다. 그게 스포츠건 아니건.정양환 국제부 차장 ray@donga.com}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가 돌아왔다.”(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수정의 밤’은 유대인에겐 잊지 못할 날이다. 1938년 11월 9일 독일. 나치가 유대인 가게와 사원을 습격해 91명이 숨졌다. 그날 밤거리는 부서진 유리창 파편이 수정처럼 반짝였다고 한다. 아픈 역사가 언급된 건 7일(현지 시간)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집단 폭행 때문이다. AFC 아약스와 마카비 텔아비브 FC의 유럽축구연맹 유로파리그(UEL) 경기 뒤 이스라엘 원정팬들이 거리에서 린치를 당했다. 30명 이상 다쳤고 중상인 5명은 병원에 실려갔다. 정황을 보면, 이 사건은 축구 탓이 아니다. 아약스가 5 대 0으로 이겨 홈팀이 열받을 리 없다. 이스라엘 정부는 즉각 “친(親)팔레스타인 아랍계 이민자들”을 가해자로 지목했다. 딕 스호프 네덜란드 총리도 “반유대주의 폭력 행위”로 규정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까지 “비열한 짓”이라 성토한 사태. 한데 막을 방법은 없었을까. 영국 가디언은 12일 “낌새가 상당했지만 각 정부 당국 등이 간과해 사태를 키웠다”고 전했다. 시간을 되돌려, 어쩌면 이번 피해를 막을 수 있었던 ‘3번의 기회’를 살펴보자. ①시합 몇 주 전=네덜란드는 아랍계 이민자가 20만 명이 넘는다. 가자 전쟁 발발 뒤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도 줄기찼다. 이에 일부 이스라엘 극렬팬들은 몇 주 전부터 소셜미디어에 적의를 드러냈다. 미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이스라엘군 만세”라며 분탕질도 모의했다. 축구는 훌리건(hooligan) 역사가 깊다. 때문에 사고 칠 기미가 보이면 경기장 입장을 막고 24시간 감시한다. 영국 등은 악성 팬을 흉악범 취급해 출국부터 불허한다. 반면 이스라엘 정부는 어떤 조치도 없었다. ②시합 이틀 전=우려는 현실이 됐다. 암스테르담 경찰에 따르면 5일 몇몇 이스라엘 팬들은 “팔레스타인에 죽음을” 등을 외치고 다녔다. 시내에서 팔레스타인 국기를 찢고 불태웠다. 여러 아랍계 택시 기사가 손찌검을 당했다. “가자엔 학교가 필요 없지. 아이들이 (죽어서) 없거든”이란 노래를 합창하는 모습이 틱톡에 올라왔다. 이때 공권력이 강력 대응했다면 어땠을까. 심지어 세헤르 칸 암스테르담 시의원은 “이슬람 커뮤니티가 분노했다”며 대책을 촉구했다. 그러나 시 당국은 “개인적 일탈”로 치부했다. ③시합 날=칸 의원 경고대로 아랍계는 들끓었다. 중동 출신이 많은 택시노조는 항의 집회를 열었다. 온라인에선 이슬람 청년들의 보복 맹세가 잇따랐다. 오토바이로 ‘치고 빠지는(hit and run)’ 수법까지 사전 공유됐다. 그런데도 원정팬 보호장치는 헐거웠다. 같은 날 손흥민 소속팀 토트넘 홋스퍼 FC와 갈라타사라이 SK의 UEL 이스탄불 경기는 달랐다. 영국 관중은 축구장에서 10여 km 떨어진 곳에 모여 경찰 호위 아래 전세버스로 이동했다. 출입구와 매점, 화장실도 홈팬들과 따로 썼다. 관람석은 투명 벽으로 차단됐다. 종료 뒤엔 튀르키예 쪽이 다 떠날 때까지 대기시켰다. 이후 버스로 탔던 장소에 내려줬다. 폭력을 옹호할 맘은 없다. 범죄는 처벌받아 마땅하다. 다만 관계 기관들이 미리 대처했다면 이 지경에 이르진 않았다.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아놓고, 남 탓 하는 위정자들은 그만 보고 싶다. 인재(人災)는 언제나 예고편이 쏟아진다. 그걸 묵살한 대가는 선량한 이들이 떠안는다. 정양환 국제부 차장 ray@donga.com}
“코스트코는 환상(fantasy)을 판다.”(미국 뉴욕타임스·NYT) 이게 무슨 소릴까. ‘꿈과 희망의 나라’ 디즈니랜드도 아니고. 창고형 할인매장인 코스트코가 고객에게 환상을 선사한다니. 가본 이들은 알지만, 백화점 같은 세련미와는 동떨어진 꾸밈새를 떠올리면 선뜻 수긍하기 어렵다. 이를 이해하려면, 40년 전인 1984년 미국 알래스카주에서 개장했던 코스트코 매장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1983년 창업한 코스트코는 이듬해 앵커리지에서 자신들의 ‘나아갈 길’을 발견한다. 혹독한 추위 속에 몇 시간씩 운전해야 식료품 가게를 찾을 수 있던 주민들에게 화려한 장식이 뭔 소용이겠나. 몇 달을 두고 먹을 거대한 양(mammoth quantities)의 땅콩버터와 토마토소스가 필요할 뿐. 픽업트럭 가득히 짐을 싣고 돌아가며 ‘이제 한동안 걱정 없이 살겠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하는 것. 그게 코스트코가 주는 환상이자 착시다. NYT에 따르면 코스트코의 이런 이미지는 팬데믹 때 더 큰 힘을 발휘했다. 전무후무한 비접촉의 시대. 집 앞까지 배달하는 온라인 쇼핑몰이 가장 큰 이득을 챙겼지만, 코스트코도 만만치 않았다. 어떤 일이 닥칠지 몰라 주방 가득 생필품을 채워 둬야 하는 이들에게 코스트코는 머리에 “첫 번째 선택지”처럼 떠올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트 나들이는 배달로 충족시킬 수 없는, 콧바람을 쐴 기회로 여겨진 것도 장점이었다. 코스트코가 소비자에게 심은 환상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미 경제지 포브스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합리적(reasonable) 소비자’란 만족감을 얻는다”고 했다. 단지 저렴하게 구매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10만 원 쓰겠다고 왔다가 20만 원을 썼더라도, 여기서 사면 과소비가 아니란 ‘인식(psyche)’을 갖는 게 중요하다. 미 브랜드 컨설턴트 제러미 스미스는 “코스트코의 상술은 사람을 홀리는 마법 같은 게 아니다”라며 “소비자와 기업이 가치를 공유한다고 믿는 문화를 형성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지난해 미 코스트코에서 가장 빠른 판매율을 올린 상품은 1온스(약 31.1g) ‘금괴(gold bar)’였다. 생필품도 아닌데 이토록 인기가 많았던 건 ‘코스트코에선 금괴도 합리적으로 판다’는 믿음 덕이었다. 당시 금값이 오른단 보도가 이어졌지만, 막상 일반인들은 어떻게 금에 투자할지 모르는 경우가 상당하다. 하지만 코스트코에선 편하게 장 보듯, 좋은 조건으로 금을 살 수 있단 기대가 소비를 부추겼다. 코스트코도 이제 중요한 시기를 맞고 있다. 8월 기준 세계 15개국 890개 매장을 가진 코스트코는 올해 아마존, 월마트에 이어 글로벌 3위의 유통업체로 올라섰다. NYT는 “메이저 빅3로 자리를 굳힐지 갈림길에 섰다”고 평했다. 특히 코스트코 영업이익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회원비를 지난달에 올리며, 견고했던 고객 충성도(loyalty)가 시험대에 올랐단 평가가 나온다. 최근 한국에서 논란이 됐듯 ‘해외에선 미국과 달리 현지와의 상생을 외면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점 등은 개선이 필요하다. 세계 유통업계가 경기 불황으로 비명을 지르는 지금, 코스트코는 앞으로도 고객들에게 환상을 안겨줄까. 코스트코가 1985년 선보인 핫도그 세트는 지금도 가격이 1.5달러(한국에선 2000원) 그대로다. 신뢰는 깨어지기 쉽다. 하지만 지켜낼수록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정양환 국제부 차장 ray@donga.com}
“김치가 이븐(even)하게 익었네.” 깜짝 놀랐다. 얼마 전 식사 자리. 연배 지긋한 지인이 최신 유행어를 던질 줄이야. 넷플릭스 ‘흑백요리사’가 인기긴 했던 모양이다. 요리 예능이 이리도 남녀노소 입에 오르내리다니. 괜스레 그날 나온 생선회도 이븐하게 싱싱한지 곱씹었다.태평양 건너 미국도 요즘 음식으로 화제 만발인 이가 있다. 이른바 ‘길거리 요리 감별사’ 키스 리(Keith Lee)란 흑인 청년이다.올해 미 대선 경합주 중 하나인 미시간주 출신인 그는 스물일곱 살. 하지만 틱톡 팔로어만 1800만 명이 넘을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하다. 레게 머리를 한 그가 “맛있다”고 엄지를 치켜세우면, 다음 날 식당은 수백 명씩 줄을 선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리가 호평한 음식점은 매출이 평균 900%나 늘어난다. 한데 그가 소셜미디어에 올린 평가 영상들은 낯설다 못해 황당하다. 일단 동네 어디나 있음 직한 소탈한 식당을 간다. 가볍게 인사 몇 마디 건네다가 주문한다. 근데 식당에선 먹질 않고 꼭 포장해 나온다. 그대로 차에 탄 뒤 음식을 꺼내 한 입 베어 문다. 그러곤 별 묘사도 없이 맘에 드네 마네 하다가 점수를 매긴다. “10점 만점에 몇 점.” 요식업계는 충격을 넘어 몸서리를 쳤다. 정당한 채점이 아니란 항변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음식 비평은 진입 장벽이 높은 편이다. 한 호텔 체인 관계자는 롤링스톤스에 “관련 분야에 종사했거나 학교를 나온 뒤 몇 년 이상 글을 실어야 ‘평론가(critic)’ 권위를 인정받는다”고 했다. 하지만 웬 ‘듣보잡’이 생태계를 파괴하니 공분이 치솟았다. 리가 요리에 뿌리가 없다는 건 맞는 말이다. 어린 시절 그는 아버지가 감옥에 간 뒤 학교를 6번 옮겨 다닌 문제아였다. 고교 시절 레슬링에 입문해 마음을 잡고서 프로로 데뷔한 종합격투기 선수다. 그러다 ‘카메라 울렁증’을 이겨보겠다고 소셜미디어에 영상을 올린 게 인생을 뒤바꿨다. 팬데믹 시절 경기가 끊겨 배달 일을 했던 경험을 녹인 지금 방식의 음식 평가가 대박이 났다. 사람들이 열광한 건 바로 이 대목이었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우아하게 칼질하는 게 아니라, 자동차에 끼어 앉아 무표정하게 우걱우걱 끼니를 때우는 모습. 그게 우리네 처지랑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었다. 갈수록 비싸지는 팁 탓에 식당에 앉기조차 부담스러운 주머니 사정도 그렇다. 그의 영상에 달린 상당수 댓글은 “나도 맨날 저렇게 먹는데”였다. 게다가 리가 주로 유색인종 가족이 꾸려가는 영세 식당 위주로 가는 게 알려지며 호감이 더 커졌다. 물론 리의 방식을 무조건 편들 순 없다. 음식 따라 먹는 법이 다르건만 자기 스타일만 고수하는 건 문제다. 요리의 일관성이나 서비스도 중요한데, 한 입 먹고 단정 짓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야후뉴스에 따르면 지난해 박하게 평가받은 몇몇 식당들은 경영에 곤란을 겪고 있다. 그도 이젠 왕관의 무게를 깨우쳐야 한다. 하지만 그가 다시금 일깨운 진리도 명확하다. 맛있는 건 어찌 먹어도 맛있다. 비싸고 화려한 음식이 항상 좋은 것도 아니다. 흑백요리사에도 나오지 않았던가. “아는 맛이 더 무섭다”고. 우리는 누구나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일지언정 즐겁게 먹은 기억이 있다. 그건 정성 혹은 공감이 주는 힘이다. 맛이란 각자가 정하는 가치일테니. 행복은 내 혀 끝에 달렸다.정양환 국제부 차장 ray@donga.com}
한 주를 마무리하던 일요일 6일 밤(현지 시간). 미국에선 5초짜리 영상 하나로 소셜미디어 틱톡과 X가 난리가 났다. 별다른 설명 없이 해시태그(#) ‘베이루트(Beirut)’가 붙은 동영상엔 레바논 수도의 중심가가 불바다로 뒤덮인 모습이 담겨 있었다. 밤하늘은 뿌연 잿빛 연기가 자욱했고, 주거용 아파트 단지들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 베이루트는 그야말로 초토화됐다.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누가 이런 참사를 일으켰는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1일 레바논 남부에 육군을 투입하며 지상전을 개시했고, 지난달부터 베이루트 일대에 대한 공습을 이어온 이스라엘 소행인 게 틀림없어 보였다. 특히 미 최대 무슬림 단체 ‘미국이슬람관계협의회(CAIR)’가 팔로어 20만 명이 넘는 공식 X에 이 영상을 게재하며 중동 전쟁에 반대하는 이들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다. 미 CBS방송에 따르면 해당 영상은 몇 시간 만에 조회수 1000만 회를 넘어섰다. 한데 다음 날, 허무하게도 ‘베이루트 불바다’ 영상은 가짜였음이 드러났다. 자칭 “인공지능(AI) 예술가”가 시중에 유통되는 AI 제작 도구로 만든 것이었다. 당시 이스라엘 공군이 베이루트 남부 교외 지역을 폭격하긴 했으나, 위치도 피해 규모도 크게 달랐다. 불과 하루 사이 벌어진 에피소드였지만 파장은 적지 않았다. 아랍권 알자지라 방송은 “거짓 AI 영상으로 인해 레바논은 물론 중동 전역이 혼돈에 빠질 뻔했다”고 전했다. AI가 사람 목숨이 걸린 전쟁까지 혼란을 몰고 온 이런 현실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올 2월 챗GPT 개발사 오픈AI가 프로젝트명 ‘소라(Sora)’란 AI 프로그램을 공개했을 때부터 우려가 쏟아졌다. 몇 줄 안 되는 문장을 입력하자 선사시대 멸종동물 매머드가 설원 위를 걸어가는 동영상이 뚝딱하고 만들어지는 장면은 여러 의미로 충격이었다. 뉴욕타임스(NYT)는 소라의 작품을 “매우 사실적(photorealistic)”이라 평하며 “이제 경고문이 붙지 않으면 진위를 구분하기 어려운 시대”라 걱정했다. 1년도 채 안 돼 AI 영상 기술은 더 큰 진전을 이뤄냈다. 이달 4일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을 소유한 빅테크 메타는 또 다른 AI 프로그램 ‘무비 젠(Movie Gen)’을 선보였다. 이전 AI는 영상만 창조했지만, 무비 젠은 AI로 소리도 만들어낸다. 메타 시연 동영상을 보면 뱀이 밀림을 기어가자 풀 스치는 소리가 스르륵 들려온다. NYT가 비슷한 영상을 만들어 보니 사운드까지 입히는 데 10분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메타 측은 “무비 젠 영상에 꼭 ‘AI 생성(Generated by AI)’ 문구를 넣겠다”고 했으나, NYT 취재 결과 이를 제거하는 것도 가능했다. 논란이 된 베이루트 영상을 다시 보자. 영국 일간 가디언이 AI 전문가들에게 의뢰해 분석한 결과, 해당 영상은 건물 사이로 불이 이어져 있는 등 결함이 상당했다. CAIR 대변인은 ‘확인 절차만 거쳤어도 가짜로 들통날 영상을 왜 게재했나’라는 CBS 질의에 “명백하고 단순한 실수”라면서도 “이스라엘이 레바논에서 2200여 명을 숨지게 만든 범죄를 저질렀단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 사이 소셜미디어에선 여전히 진짜인 줄 믿는 이들이 영상을 퍼나르고 있다. 세상은 실재와 가상의 경계선만 흐릿해지고 있는 게 아니다. 뭐가 본질인진 모르겠으나, 신뢰와 윤리의 영역도 함께 무너지고 있다.정양환 국제부 차장 ray@donga.com}
“거짓과 싸우는 가장 간명한 길은 진실과 함께(with the truth)하는 거죠.” 근사하면서도 씁쓸했다. 11일(현지 시간) 현존하는 ‘원톱’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가 카멀라 해리스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를 지지하며 올린 인스타그램 게시물은 끝내줬다. 딱 하나, 인공지능(AI) 딥페이크로 만든 자신의 가짜 사진에 대한 언급은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진실로 거짓과 맞서자. 분명 옳은 말인데, 거대한 벽에 부딪힌 현실이 떠올랐다. 최근 국내에서도 논란인 AI 딥페이크 성 착취물이 무서운 건 이런 ‘진위(眞僞)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단 점이다. AI 편집기술로 다른 이 얼굴을 합성해 음란물을 만드는 순간, 참인지 아닌지 상관없이 누군가는 끔찍한 피해를 본다. 이미 퍼진 뒤 사실이 밝혀진들 그 상처를 어찌 보상할까. 영국 인디펜던트는 이런 AI의 악용을 두고 “어느 여염집에나 있는 토스터가 핵폭탄을 만드는 가공할 병기창(arsenal)이 되는 셈”이라 했다. 설마 그 정도일까. 지난달 독일의 한 정보기술(IT) 웹진에 따르면 AI 딥페이크 성 착취물 제작은 범죄에 쓰일까 봐 구체적 방법은 기술하지 않는 게 민망할 정도다. 누구나 접근 가능한 오픈 소프(Open Source) AI 모델만 컴퓨터에 깐 뒤 ‘적당한’ 문구를 입력하면 끝이다. 결과물을 살펴본 IT 전문가는 “어색한 점도 있으나 꼼꼼히 살펴야 알 정도”라며 “별다른 전문지식 없이도(without specialized knowledge) 만들 수 있다는 게 충격적”이라 했다. 최근 미국에서 AI 성 착취물 제작 혐의로 붙잡힌 이들 면면을 봐도 그렇다. 펜타곤에서 근무하는 군인부터 한적한 시골 현직 교사, 10대 초반 중학생까지…. 그저 방구석에 앉아 키보드만 두드려 악질 범죄자가 됐다. 미국 시카고트리뷴은 “그들은 일상에서 인사 건네던 주변 사람부터 일면식도 없는 해외 인플루언서까지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고 전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서구 정부나 입법기관 등은 총력전에 나서는 모양새다. 미 캘리포니아 주의회는 이달 초 AI 딥페이크로 아동 성 착취물을 제작·배포·소지한 이들을 모두 처벌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 오픈AI 등은 11일 백악관에서 딥페이크 성 착취물 방지를 위해 AI 학습데이터에서 나체(nude) 이미지를 제거하기로 서약했다. 유럽연합(EU)도 최근 개발된 AI 모델들이 성 착취물을 양산해 개인 보호 규정을 어겼는지 전면 조사에 착수했다. 미 워싱턴포스트는 “규제가 기술을 쫓아가지 못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늦은 감이 있지만, 전방위적 노력 없인 AI가 심각한 재앙 덩어리가 될 것”이라며 규제를 지지했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한국도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19일 아동, 청소년 대상 AI 딥페이크 성 착취물 등과 관련된 범죄 처벌을 강화하고 피해자를 지원하는 법안들이 여야 합의로 국회 상임위 소위를 통과했다. 실은 지난해 거의 동일한 법안이 발의됐으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폐기된 걸 떠올리면 이런 늑장 대응이 없다. 하지만 늦었다고 포기할 순 없다. 미 NBC뉴스는 백악관 서약식을 보도하며 “AI 딥페이크 성 착취물 전쟁은 인간의 존엄성(dignity)이 달린 문제”라고 했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기관들이 국민 존엄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면 굳이 존재할 이유가 있을까.정양환 국제부 차장 ray@donga.com}
설마가 현실이 됐다. 6월 27일(현지 시간) 미국 대선 TV토론은 미 정치사에 가장 큰 지각변동을 불러일으킨 사건 중 하나로 남으리라. 현직 대통령의 대선 후보 사퇴를 촉발한 가혹한 트리거(trigger·방아쇠)가 됐기 때문이다. 그날 토론은 조 바이든 대통령(82)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과는 별개로, 세상만사는 상대적이란 걸 깨닫게도 해줬다. 바이든 대통령의 멍한 표정은 토론 보름 전쯤 78세 생일이던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를 무척 젊어 보이게 만드는 ‘착시 현상’을 일으켰다. 같은 달 30일 프랑스 정당 대표 3자 TV토론은 또 다른 착시 현상이 두드러졌다. 트럼프보다 마흔 살이나 어린,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 정당의 마뉘엘 봉파르 의원이 지긋해 보였다. 집권당 르네상스의 가브리엘 아탈 총리(35)와 극우 국민연합(RN)의 조르당 바르델라 대표(29)가 워낙 아이돌처럼 말쑥하게 생긴 탓이 컸다. 그렇다고 해도 대표 셋이 모두 20, 30대인 토론은 참 낯설고도 부러웠다. 흔하진 않지만 아시아에도 주목받는 청년 정치인이 있다. 일본 효고현 아시야시의 다카시마 료스케(高島崚輔) 시장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4월 당선된 그는 1997년생. 재임 1년이 지났는데 스물일곱 살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노인들이 지배하는(gerontocratic) 일본 정치판에 거의 유일하게 맞서는 인물”이라고 불렀다. 유럽 정치계는 풀뿌리 청년 조직이 잘 갖춰져 젊은 정치인의 등장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 각광받는 20, 30대 정치인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누군가의 후광보단 자기 힘으로 기반을 다진 자수성가 스타일이 많다. 이민자 출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바르델라 대표는 빈민가에서 생계 곤란을 겪으며 꿈을 키웠다. 요즘 세대답게 소셜미디어 활용에 능숙한 점도 공통분모다. 물론 바이든이나 트럼프도 틱톡은 한다. 하지만 청년 정치인들은 정책 홍보보단 유권자와의 공감대 형성에 주력한다. 올 4월 취임한 사이먼 해리스 아일랜드 총리(37)는 별명이 ‘틱톡 총리’일 정도다. 아일랜드 역대 최연소 총리인 그는 자신의 ‘울퉁불퉁했던’ 10대 이야기를 들려주며 젊은층의 공감을 샀다. 다카시마 시장도 유럽 청년 정치인들과 닮은 점이 많다. 유복한 집안의 ‘엄친아’이지만 계파 정치가 단단한 일본에서 별 뒷배 없이 무소속 신화를 일궈냈다. 그간 일본 청년 정치인들은 거물 아버지의 후광을 입거나 지역구를 물려받은 경우가 다수였다. 소셜미디어 활용도 적극적이다. 하버드대를 졸업한 다카시마 시장은 “도쿄대와 하버드대 중 어디가 입학이 어렵냐”란 장난 섞인 질문에도 성실하게 자기 경험을 들려줘 화제를 모았다. 구글 입사시험 문제를 풀어보는 영상은 조회 수가 100만 회를 넘었다. 이들의 공통점엔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이 있다. 그들의 ‘접촉’은 온라인에 그치지 않았단 점이다. 곧 물러날 아탈 총리는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누구와도 대화하는 소통 능력”(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이 강점으로 꼽혔다. 그의 유세장은 10대부터 중장년층까지 연령대가 폭넓기로 유명하다. 다카시마 시장은 중고교 교칙 개정안 추진 때 이해당사자들과 수시로 직접 대화했다. 뻔한 공청회가 아니라 학생과 교사를 따로 만나 속내를 들었다고 한다. 이코노미스트는 “젊은층의 의사가 반영되기 힘든 일본의 상명하복 문화(top-down culture)를 현장에서 발로 뛰어 이겨냈다”고 호평했다. 생물학적 나이가 다는 아니다. 이른바 ‘젊꼰’(젊은 꼰대)도 많고, 중장년층의 경륜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50대 이상만 가득해 기성세대에게 치우친 정치가 미래세대를 얼마나 이해하고 헤아릴까. 최근 개원한 한국의 22대 국회는 20대 의원이 한 명도 없다. 30대도 겨우 4.7%다. 정양환 국제부 차장 ray@donga.com}
“때아닌 ‘죽음의 블루스크린(Blue Screen Of Death)’이 Y2K(2000년)의 공포를 현실화했다.”(영국 파이낸셜타임스) 1990년대만 해도 익숙했다. 뜬금없이 컴퓨터 화면이 파래지며 먹통이 됐다. 보통 껐다 켜면 나아졌지만, 답답한 마음에 본체를 탕탕 두드리기도 했다. 그 시절, 2000년이 도래하면 온 세상 컴퓨터가 멈춘다는 ‘밀레니엄 버그’는 언론에서도 비중 있게 다뤘다. 별일 없이, 나이만 한 살 더 먹었지만. 19일(현지 시간) ‘글로벌 IT(정보기술) 대란’은 서구 사회에선 Y2K가 떠오를 정도로 충격이 컸다. 미국의 한 보안업체가 업데이트 한 번 잘못한 게 세계 곳곳의 전산 장애를 초래한 광경은, 초연결사회(hyper-connected society)가 장밋빛만 품은 게 아니란 걸 일깨웠다. 무엇보다 병원과 공항, 카페 등에서 벌어진 혼란은 우리 일상이 너무도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번 사태로 경제적 손실만 “10억 달러(약 1조3900억 원) 이상”(미 CNN)이라 한다. 뉴질랜드 시골 마트 계산대까지 멈춰 세울 만치 파장이 컸지만, 딱히 영향을 받지 않은 곳들도 있다. 자체 서버나 국내 클라우드 서비스를 주로 이용한 한국도 비교적 피해가 적었지만, 미국 대도시 대중교통망은 특별한 장애가 없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교통국(MTA)은 “일부 정보 시스템이 중단됐으나 지하철과 버스 운행은 아무 영향도 받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게 자랑스러웠던지, 재노 리버 MTA 사장은 “뉴욕은 전속력(full speed) 운행 중”이라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등의 대중교통도 정상 운영됐다. 이유는 다름 아닌 시대에 뒤처진 ‘노후화’ 때문이었다. 예산 부족으로 낡은 전산 시스템을 그대로 쓰다 보니, 이번 최신 업데이트 대상조차 되질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교통국은 “우리 시스템은 인터넷도 연결돼 있지 않다”고 했다. 중국과 러시아가 별 피해를 보지 않은 건 ‘디커플링(decoupling·탈동조화)의 역설’이 작용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이 대(對)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 등을 시행한 뒤, 중국 국무원이 해외 소프트웨어를 자국 제품으로 교체하도록 한 덕분”이라고 전했다. 영 BBC방송에 따르면 러시아 역시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뒤 국제사회와 단절돼 불가피하게 대체 시스템 개발에 주력해왔다. 서방 제재에 가로막혀 글로벌 서비스에서 배제된 게 오히려 이득이 된 셈이다. 지난달 이코노미스트는 ‘왜 여행안내서는 사라지지 않는가’란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인터넷 세상에서 도태될 듯 보였던 여행 서적이 여전히 많이 팔리는 현상을 짚었다. 이코노미스트는 “사람들은 인터넷이 불가능한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는 ‘확실성(authenticity)’을 필요로 한다”며 “믿을 만한(trusty) 도구는 어느 시대건 돈을 지불할 가치를 지닌다”고 했다. 여행안내서의 인기는 여러 시사점을 던져준다. 기술의 진보는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 낙후된 설비와 폐쇄적 독재국가가 한번 요행을 누렸다고 정체나 퇴보가 정답일 리도 없다. 다만 서둘러 먹는 밥은 체하기 마련이다. 천천히 가더라도 기본을 버려선 안 된다. 변수에 대비하지 않고 대세만 좇다간 ‘죽음의 블루스크린’ 다음 차례는 우리일 수 있다. 뒤늦게 컴퓨터를 때려본들 손만 아플 뿐이다. 정양환 국제부 차장 ray@donga.com}
“프랑사프리크(Fran¤afrique·프랑스와 아프리카)는 이젠 사라져 가는 과거의 유물이 돼 버렸다.”(AFP통신)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어는 친숙한 말 중 하나다. 아프리카 54개국 가운데 프랑스어가 공용어인 나라는 23곳. 영어와 더불어 가장 많다. 프랑스어가 유일 공용어인 나라는 11개국으로 영어(8개국)를 앞선다. 10여 년 전 아프리카 출장 때, 한국인이 더듬더듬 뱉은 영어를 벨기에 출신 가이드가 프랑스어로 통역하니 이라크계 공무원이 아랍어로 현지인에게 물어봐 주던 희한한 경험은 아직도 생생하다. 식민지 시절부터 이어온 프랑스의 아프리카 영향력은 그만큼 질기고 뿌리 깊었다. 하나 요즘 파리의 입김이 예년 같지 않다. 솔직하게 “되돌릴 수 없는(irreversible)” 지경이다. 지난해부터 말리와 부르키나파소, 니제르 등에선 줄줄이 쿠데타가 벌어졌고, 프랑스에 반기를 들고 주둔군을 몰아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세네갈 등 그나마 안정적인 국가조차 반(反)프랑스 물결이 거세다”며 “과거 식민지였던 20여 개국 중 상당수가 연을 끊으려는 모양새”라고 전했다. 이 같은 움직임은 프랑스가 자초했다는 게 중론이다. 현지 치안을 등한시한 병력 주둔은 자국의 군사적 이익만 좇았다. 투자 역시 자원 개발에 치중해 부당한 경제 수탈로 읽혔다. 한참 전부터 경고음이 났건만 프랑스 정부는 안일했다. 민심을 잃은 정권 편만 들어 시민사회도 등을 돌렸다. 프랑스의 마르크 메미에 전 아프리카 특별고문은 WSJ에 “현지의 부패한 집권세력이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기존 정책을 고집했다”고 했다. 그럼 프랑스가 밀려난 ‘빈자리’는 누가 채우고 있을까. 미 워싱턴포스트(WP)는 “미국마저 아시아태평양에 치중하며 소홀한 틈을 타 러시아와 중국이 기세를 올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두 나라의 접근법은 다소 다르다. 러시아는 용병 기업 ‘바그너 그룹’을 통한 군사 지원이 중점이다. 중국은 막대한 자금력을 앞세워 경제 원조에 집중한다. 이리 정성을 쏟는 이유는 자명하다. 아프리카를 미국과 유럽 등 서방에 대항할 교두보로 삼으려 한다. 물론 프랑스가 팔짱만 끼고 있는 건 아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프랑스는 최근 수직적이던 전통적 관계를 버리고 동등한 눈높이에서 협력하는 ‘파트너십’으로 외교노선을 바꿨다. 대표적인 나라가 르완다다. 1994년 수십만 명이 숨진 르완다 대학살 뒤 사이가 냉랭했던 두 나라는 최근 적극적으로 관계 개선에 나섰다. 4월 학살 30주년 추도식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의지가 부족해 희생을 막지 못했다”며 사과 영상을 보낸 것도 이런 맥락이다. NYT는 “프랑스의 영향력 강화와 르완다의 빈곤 퇴치라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새로운 ‘데탕트(D´etente·긴장 완화)’의 문을 열고자 한다”고 평했다. 다만 앞길에 붉은 주단만 깔려 있진 않다. NYT에 따르면 르완다 대학살은 여전히 갈등의 불씨다. 르완다는 프랑스에 머무는 관련자 인도를 요구하지만 프랑스 정부는 난색을 표하고 있다. 더 결정적인 건, 양국 화해를 주도적으로 이끈 마크롱 대통령이 조기 총선 1차 투표에서 대패하며 정치적 입지가 위태로워졌다는 점이다. 승기를 잡은 극우 세력은 자국우선주의를 강조해 왔다. 프랑스의 아프리카 입지 축소는 그저 한 시대의 종언으로 그칠 문제가 아니다. WSJ는 “불량 정권들이 ‘힘의 공백(power vacuum)’을 메우고 있는 상황은 결국 아프리카의 서방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번져 국제질서에도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강산이 변하면 꽃이 지는 건 순리다. 프랑스가 떠난 뒤 러시아나 중국은 아프리카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할까. 돌고 돌아도 검은 대륙의 눈물은 마르지 않을 것만 같다. 세상 어디도 편할 날이 없다. 정양환 국제부 차장 ray@donga.com}
“저의 미인대회 출전은 나이나 인종, 생김새와 상관없이 ‘모든 여성은 동등하다’는 걸 보여준다고 믿습니다.” 올해부터 나이 제한이 철폐된 미스 유니버스 선발대회에 일흔이 넘은 미국인 여성이 출사표를 냈다. 미인대회 참가자 중 역대 최고령이다. 미 일간 USA투데이는 “21일(현지 시간) 텍사스주 휴스턴에 있는 힐턴휴스턴포스트오크호텔에서 개막한 미스 텍사스 선발대회에 머리사 테이요 씨(71)가 참가했다”고 보도했다. 미스 텍사스 본선은 25∼29일 열리며, 우승자 등은 미스 USA에 진출해 국제대회인 미스 유니버스 참가권을 놓고 겨룬다. 1952년부터 시작된 미스 유니버스는 지난해까지 18∼28세만 참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올해 관련 규정을 없애면서 결혼했거나 임신한 여성도 도전할 수 있게 됐다. 1일 열린 미스 메릴랜드 선발대회에선 미국에서 처음으로 31세의 트랜스젠더 여성이 우승했다. 테이요 씨는 평소 운동과 댄스 등으로 꾸준하게 건강을 관리해 왔다고 한다. 구체적인 가족 관계는 공개되지 않았으나, 미혼으로 알려졌다. 테이요 씨는 지역매체 엘패소타임스 인터뷰에서 “꿈을 좇기에 너무 늦은 나이란 없다”며 “누구라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최근 아르헨티나에서도 변호사이자 기자인 알레한드라 로드리게스 씨(60)가 미인대회에 출전해 큰 관심을 받았다. 4월 미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우승한 그는 지난달 미스 아르헨티나 선발대회에 출전해 ‘최고의 얼굴’로 뽑히며 입상했다. 우승 왕관을 차지한 코르도바 출신 배우 마갈리 베나젬(29)도 지난해였다면 나이 제한에 걸려 출전이 불가능했다. 로드리게스 씨는 대회 당시 “이것이 앞으로 다가올 변화의 첫걸음이 될 것”이란 소감을 밝혔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저의 미인대회 출전은 나이나 인종, 생김새와 상관없이 ‘모든 여성은 동등하다’는 걸 보여준다고 믿습니다.”올해부터 나이 제한이 철폐된 미스 유니버스 선발대회에 일흔이 넘은 미국인 여성이 출사표를 던졌다. 미인대회 참가자 중 역대 최고령이다.미 일간 USA투데이는 “21일(현지 시간) 텍사스 주 휴스턴에 있는 힐튼휴스턴포스트오크호텔에서 개막한 미스 텍사스 선발대회에 마리사 테이요 씨(71)가 참가했다”고 보도했다. 미스 텍사스 본선은 25∼29일 열리며, 우승자 등은 미스 USA에 진출해 국제대회인 미스 유니버스 참가권을 놓고 겨룬다.1952년부터 시작된 미스 유니버스는 지난해까지 18∼28세만 참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올해 관련 규정을 없애면서 결혼했거나 임신한 여성도 도전할 수 있게 됐다. 1일 열린 미스 메릴랜드 선발대회에선 미국에서 처음으로 31세의 트랜스젠더 여성이 우승했다.테이요 씨는 평소 운동과 댄스 등으로 꾸준하게 건강을 관리해왔다고 한다. 구체적인 가족 관계는 공개되지 않았으나, 미혼으로 알려졌다. 테이요 씨는 지역매체 엘파소타임스 인터뷰에서 “꿈을 좇기에 너무 늦은 나이란 없다”며 “누구라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최근 아르헨티나에서도 변호사이자 기자인 알레한드라 로드리게스 씨(60)가 미인대회에 출전해 큰 관심을 받았다. 4월 미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우승한 그는 지난달 미스 아르헨티나 선발대회에 출전해 ‘최고의 얼굴’로 뽑히며 입상했다. 우승 왕관을 차지한 코르도바 출신 배우 마갈리 베나젬(29)도 지난해였다면 나이 제한에 걸려 출전이 불가능했다. 로드리게스 씨는 대회 당시 “이것이 앞으로 다가올 변화의 첫걸음이 될 것”이란 소감을 밝혔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현실에서 도망치려 한 적도 있죠. 그런데 불가능하단 걸 아시잖아요?”(라얀 하루다·26) 한국에선 요즘 청년들을 MZ세대라 묶는 경우가 잦다. 하지만 분명 Z세대는 또 다르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 출생을 일컫는 그들은 지금 딱 20대쯤 된다. Z세대 눈엔 30대에 들어선 밀레니얼(M)세대 역시 그저 ‘좀 젊은 아저씨’일지도. 세대 규정에 동의하진 않지만, Z세대를 거론할 때 한결같이 꼽는 특징이 있다. 그들 다수는 “모바일 디지털 월드가 없는 세상”(미국 뉴욕타임스·NYT)을 살아본 적이 없다. 어디서나 손에 쥔 휴대전화로 ‘접속’이 가능한 삶. 역시 날 때부터 존재했던 소셜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보고 관계를 형성하는 건, 그들에겐 자연스럽다 못해 당연했다. NYT에 따르면 Z세대는 정치 성향도 소셜미디어에 절대적 영향을 받는다. 최근 주목받은 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유대계가 사회 각 분야에서 영향력이 큰 미국은 오랜 세월 이스라엘의 절대적 우방이었다. 지난해 10월 막 전쟁이 터졌을 때, 미 퀴니피액대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6%가 이스라엘을 지지했을 정도다. 하지만 Z세대는 달랐다. 미 정치매체 액시오스는 지난달 “미국인 18∼29세 가운데 이번 전쟁에서 이스라엘 편을 든 건 14%뿐”이란 조사 결과를 보도했다. 2배가 넘는 33%는 팔레스타인을 응원한다고 했다. 실제로 미 Z세대가 선호하는 틱톡 게시물 조회수를 비교하면, 친(親)팔레스타인 게시물이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영상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러셀 앨런 씨(23)는 한 인터뷰에서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의 이스라엘 지지를 일종의 ‘검열(censors)’로 여긴다”며 “소셜미디어에 드러난 팔레스타인 청년들의 고통에 훨씬 공감 간다”고 했다. 팔레스타인은 Z세대가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중위연령(median age)이 22세로, 15∼29세가 인구의 30%를 넘는다. 이스라엘은 중위연령이 43세로 한국(46세)과 엇비슷하다. Z세대에겐 소셜미디어를 통해 바라본 팔레스타인 동년배의 고통이 더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을 수 있다. 실제로 당사자인 팔레스타인 Z세대가 느끼는 절망은 탈출구가 없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태어난 이들은 1993년 오슬로 협정(Oslo Accords)으로 그나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평화적 공존을 꾀하던 시기를 모른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평생 분쟁밖에 겪지 못한 그들은 평화적 공존은 불가능하단 인식이 깊게 뿌리박혀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현 전쟁이 언젠가 끝을 맺어도, 위험천만한 불씨는 그대로 남을 거란 어두운 관측도 나온다. 주변 사람들이 일상처럼 희생당한 경험은 청년들에게 총이란 선택지만 남겨줄 거란 전망이다. 라얀도 마찬가지였다. “폭력의 고리를 끊고 싶지만, 가족을 잃은 친구가 무장세력에 가담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고 털어놨다. 악순환은 소셜미디어에서 더 넓게 번져 나간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미 대학가 반전시위를 예로 들며 “Z세대의 절망에 대한 공감이, 폭력에 대한 수긍으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고 우려했다. 소셜미디어는 인생의 낭비라지만, 이미 그 ‘문(frame)’을 통해 보고 듣는 시대는 되돌릴 수 없다. 프레임 너머 다른 세상을 알려주지 못한 어른들 책임이다. 정양환 국제부 차장 ray@donga.com}
에리카 모스카텔로 씨는 행복을 찾았다고 믿었다. 고향 아르헨티나의 삶은 곤궁했다. 정치는 둘째 치고 경제가 뒤숭숭했다. 지난해만 인플레이션이 211%. 1년 새 물가가 3배 넘게 뛰었단 소리다. 탈출을 꿈꾸던 그에게 달콤한 유혹이 찾아왔다. 모스카텔로 씨의 먼 이탈리아 친척이 남부 시칠리아주 무소멜리를 추천했다. 지방소멸 위기에 빠진 소도시는 외지인에게 빈집을 1유로(약 1460원)에 내주고 있었다. 고민 끝에 택한 이민은 만족스러웠다. 유럽 선진국다운 안정감이 좋았다. 할머니는 “뿌리를 찾아 귀향했다”며 반색했다. 이웃 주민은 정다웠고, 아이 학교도 맘에 들었다. 더 바랄 게 없어 보였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진. 2022년 갑작스레 아이가 아팠다. 치료가 시급했지만 동네에 ‘의사’가 없었다. 소아과는 모두 문을 닫아, 몇 시간을 운전해 대도시에서 진료받았다. 그때야 알았다. 소아과뿐이 아니었다. 산부인과도 없고, 하나 남은 외과도 곧 폐업할 참이었다. 이탈리아는 의사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예전만 못하다지만 국내총생산(GDP) 세계 10위(한국 13위). 주요 7개국(G7) 멤버인 이탈리아에 뭔 일이 생긴 걸까. 영국 일간 가디언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기 민낯이 드러났던, 부실한 공공의료체계가 자아낸 비극”이라고 설명했다. 20세기만 해도 이탈리아 공공의료는 양적, 질적으로 우수하단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뒤 정부 재정적자가 심해지며 의료 투자가 줄어들었다. 지난해 관련 정부 지출은 GDP의 8.9%로 유럽연합(EU) 밑바닥 수준. 최근 5년 동안 주요 의료기관 800여 곳이 간판을 내렸다. 상황이 나빠지자 의료진의 엑소더스가 잇따랐다. 원래도 공무원급 처우가 불만이던 의사들은 높은 연봉을 안겨주는 다른 유럽 국가들로 떠나갔다. 후폭풍은 지방부터 몰아쳤다. 부유한 북부보다 남부가 심각했다. 특히 시칠리아 등 남부의 ‘의료 공백’은 지자체도 속수무책. 밀라노 국립의대에 따르면 현재 전국에서 3만 명 넘게 의사가 부족하다. “산소호흡기(oxygen respirator)를 단 의료 시스템”(유로TV)에 단비를 뿌려준 건, 다름 아닌 ‘외국인 노동자’였다. 코로나19 때 쿠바에서 파견한 의료진 도움이 컸던 이탈리아는 당시 인연을 계기로 쿠바 정부에 간청했다. 드디어 올해 1월부터 의사 약 500명이 한시적 계약을 맺고 남부로 오고 있다. 아바나 출신 오스벨 디아스 외과의(38)는 현지 매체에 “우린 돈이 아니라 인류의 연대(solidarity)를 위해 여기 왔다”고 했다. 또 다른 물꼬는 아르헨티나에서 트였다. 아르헨티나는 인구의 62.5%가 이탈리아계다. 낮은 임금과 미친 물가에 허덕이던 의사들에게 이탈리아는 선조의 나라이자 기회의 땅이었다. 지난해 말부터 의사 100여 명이 시칠리아로 넘어왔다. 이를 중개한 주축 중 한 명이 모스카텔로 씨. 그는 “부에노아이레스 지원자만 수천 명”이라며 “이들은 이탈리아를 구하는 영웅(superhero)이 될 것”이라 자신했다. 드라마라면 이쯤에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련만…. 현실은 넘을 산이 쌔고 쌨다. 겨우 숨통만 트였을 뿐, 의사 수는 여전히 너무 모자라다. 더구나 쿠바 의료진은 몇 년 뒤엔 돌아간다. 현 정권이 반(反)이민 정책으로 기울고 있는 대목도 불안하다. 가디언은 “아르헨티나 의사들의 면허가 만료되는 2028년 전후에도 쉽사리 갱신해줄지 미지수”라고 짚었다. 게다가 이탈리아 의사들이 그랬듯, 앞으론 더 조건 좋은 타국으로 갈 수 있다. 시칠리아의 의료 현실은 자명한 이치를 일깨운다. 이탈리아 라이라디오1은 “공들여 쌓은 의료체계라도 자칫 금이 가면 속절없이 무너진다”며 “더 큰 문제는 재건이 수십 배는 힘들다는 점”이라고 한탄했다. 이게 남의 나라라고 불구경해도 되는 걸까. 엉덩이 타는 냄새가 물씬 풍겨 온다. 정양환 국제부 차장 ray@donga.com}
미국 할리우드 배우 톰 크루즈(61·사진)가 러시아 사교계의 유명 인사인 엘시나 카이로바(36)와 3개월 만에 결별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 야후뉴스 등은 27일(현지 시간) 소식통을 인용해 “카이로바가 이별을 요구해 두 사람이 헤어졌다”며 “크루즈가 서둘러 결혼을 원하자 부담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두 사람은 지난해 12월 영국 런던에서 처음 만나 사귀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모델 출신인 카이로바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가까운 유력 정치인의 딸로 알려져 있다. 다이아몬드 무역으로 유명한 러시아 올리가르히(신흥재벌) 드미트리 츠벳코프와 결혼했다가 11년 만인 2022년 이혼했다. 카이로바는 영국에 2200만 파운드(약 375억 원)의 대저택을 소유할 정도로 부유하다고 한다. 크루즈는 지금까지 세 번 결혼했다. 배우 미미 로저스와 니콜 키드먼, 케이티 홈스와 차례로 부부가 됐으나 헤어졌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미국 할리우드 배우 톰 크루즈(61·사진)가 러시아 사교계 유명인사인 엘시나 카이로바(36)와 3개월 만에 결별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 야후뉴스 등은 27일(현지 시간) 소식통을 인용해 “카이로바가 이별을 요구해 두 사람이 헤어졌다”며 “크루즈가 서둘러 결혼을 원하자 부담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두 사람은 지난해 12월 영국 런던에서 처음 만나 사귀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크루즈는 지난달 윌리엄 영국 왕세자도 참석한 자선단체 모금행사에 카이로바와 동행하기도 했다.모델 출신인 카이로바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가까운 유력 정치인의 딸로 알려져 있다. 다이아몬드 무역으로 유명한 러시아 울리가르히(신흥재벌) 드미트리 체츠코프와 결혼했다가 11년 만인 2022년 이혼했다. 카이로바는 영국에 2200만 파운드(약 375억 원) 대저택을 소유할 정도로 부유하다고 한다.크루즈는 지금까지 3번 결혼했다. 배우 미미 로저스와 니콜 키드먼, 케이티 홈즈와 차례로 부부가 됐으나 헤어졌다. 현재 영국에서 영화 ‘미션 임파서블8’을 촬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와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 등 세계적인 빅테크 거물들이 올해 들어 수억 달러 규모의 자사주를 팔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기술주(株)들이 주도해온 미국 증시의 상승세가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24일(현지 시간) 기업 임원이나 주요 주주 등의 거래를 추적하는 기업인 베리티LLC를 인용해 “올해 1분기(1∼3월) 기업 내부자들의 매수 주식 대비 매도 주식 비율이 2021년 이후 최고를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온라인결제서비스 페이팔과 빅데이터 분석회사인 팰런티어의 공동창업자인 피터 틸이다. 그는 이달에만 팰런티어 주식 1억7500만 달러(약 2340억 원)어치를 팔았다. 베이조스 창업자도 지난달 85억 달러 규모의 아마존 주식 5000만 주를 매각했으며, 앤디 재시 아마존 CEO는 올해 2110만 달러어치를 팔았다. 저커버그 메타 CEO는 지난달 1억3500만 달러 주식을 팔아 2011년 11월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원래 1분기 주식 매도는 연초 세금 신고 등을 고려해 일반적인 현상으로 여겨진다. FT는 “특히 지난해는 기업 가치 하락으로 투자자들이 주식 매도를 주저해 더 많은 수요가 억눌려 있던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를 감안하더라도 최근 움직임은 생성형 인공지능(AI) 붐이 이끌던 증시 활황이 조만간 멈출 수 있다는 신호라고 경고했다. 델라웨어대 기업지배구조센터의 찰스 엘슨 소장은 “빅테크 고위 경영진의 자사주 대량 매각은 더 나은 투자처를 찾았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실제로 데이터 클라우드 기업인 스노플레이크는 프랭크 슬루트먼 CEO가 지난달 주식을 대량 매각한 뒤에 이달 초 바로 사임해 버리자 주가가 29%나 뚝 떨어지는 최악의 상황을 겪었다. 베리티LLC의 벤 실버먼 부사장은 “빅테크에서 이례적인 내부자 거래 패턴이 나타나고 있다”며 “투자자들이 눈여겨봐야 할 부정적 신호”라고 지적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