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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한국에 태어나는 순간 2300만 원의 나랏빚을 어깨에 짊어지게 된다. 지난주에 정부가 발표한 국가채무를 주민등록인구 수로 나누면 국민 한 사람이 갚아야 할 나랏빚이 나오는데, 지난해 말 기준으로 2300만 원이었다. 10년 새 2배 이상으로 불었다. 국가채무는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직접적으로 상환 의무를 지고 있는 빚이다. 결국 아이들이 두고두고 다 갚아 나가야 하는 빚이지만 2020년부터 매우 가파르게 늘었다. 문재인 정부의 ‘방만한 재정 운용’을 문제 삼았던 윤석열 정부 역시 국가채무 증가 속도를 크게 늦추진 못했다. 윤 정부에서 국가채무는 205조 원 늘었다. 문 정부를 거치면서 늘어났던 국가채무보다는 적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보단 더 많다. 심지어 윤 정부의 3년 치 국가채무 증가액은 이들 정부의 5년 치, 4년 치보다도 많다. 2022년 한 해 동안 증가한 국가채무는 그해 예산을 짠 문 정부 탓도 일부 있지만 5월부터 나라 살림을 책임졌던 건 윤 정부다. 윤 정부는 줄기차게 재정 건전성을 외쳤지만 결국 말뿐이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재정준칙’이다. 재정 적자 폭을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로 묶는 것이 핵심인 재정준칙은 윤 정부의 국정과제 중 하나였다. 윤 전 대통령은 “방만한 지출로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미래 세대에 떠넘기는 것은 미래 세대에 대한 착취”라며 국회에 재정준칙 법제화 법안 처리를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윤 정부 출범 후 재정준칙이 지켜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나랏빚 관리를 위해 정부 씀씀이를 줄이는 건 올해도 쉽지 않다. 어려운 내수를 살리려면 정부의 12조 원 필수 추가경정예산이 꼭 필요하다. 또 예정에 없던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데도 나랏돈이 더 들어간다. 선거가 끝난 뒤에는 공약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본격적으로 돈을 써야 한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는 인공지능(AI) 학습과 연산에 필수적인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최소 5만 개 이상 확보하겠다고 했다. 최신형 GPU 5만 개를 사고 운영하는 데는 3조5000억 원 넘게 들 것으로 추산된다. 국민의힘은 2월부터 소상공인에 대한 현금성 지원 정책을 잇달아 내놓은 바 있다. 필요한 곳에 나랏돈을 쓰는 걸 두고 뭐라 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장기적인 계획 없이 일단 쓰고 보자는 행태가 반복되는 건 문제다. 3년 전 대선 때 정치권에선 표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 정책이 쏟아졌다. 그중 여야 모두가 약속했던 ‘병사 월급 200만 원’은 예산에 그대로 반영됐다. 청년들에겐 기쁜 일이었지만 초급 군 간부 처우 개선, 첨단 무기 도입 등에 쓸 돈이 줄어 재원 배분을 왜곡한다는 지적이 계속 제기됐다. 앞으로 40일 넘게 이어질 대선 레이스에선 수많은 공약들이 발표될 것이다. 표심을 잡기 위한 정치권의 포퓰리즘 경쟁이 지난 대선 때와 똑같이 흘러가선 안 된다. 무엇보다 나라 살림은 전보다 더 나빠졌다. ‘총알’인 세수마저 2년 연속 펑크가 났고 올해도 빠듯하다. 후보들은 국가채무를 어떻게 관리해 나갈지 비전과 실행 계획을 함께 제시해야 한다. 나랏빚의 절대 규모를 당장 줄이진 못해도 증가 속도만큼은 더 늦춰야 한다. 나랏빚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는 정치에는 미래가 없다. 박희창 경제부 차장 ramblas@donga.com}
K드라마와 K팝의 ‘쌍끌이’ 인기가 계속되고 있다. 올 들어서도 드라마 ‘오징어게임’ 시즌2는 90여 개국에서 1위에 오르며 흥행을 이어갔다. 블랙핑크 로제의 솔로곡 ‘아파트’도 미국 빌보드 차트 최상위에 이름을 올리며 세계를 강타했다. 오징어게임 시즌1이 세계적인 열풍을 불러일으킨 게 3년 반 전이었다. 당시에도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영국 밴드 콜드플레이와 함께 부른 ‘마이 유니버스(My Universe)’가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인 ‘핫 100’ 1위에 이름을 올렸다. 이쯤 되면 K콘텐츠는 일시적 유행을 넘어섰다고 볼 수 있다. 콘텐츠의 힘은 한국 산업 구조와 ‘나라 장부’까지 바꾼다. 지난해 멀티미디어 제작 서비스 수지(수출―수입)는 4억9000만 달러(약 7200억 원) 흑자였다. 한국 제작사가 해외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 드라마를 제작해 납품하고 받은 돈이 흑자에 기여했다. 한국 가수가 해외에서 콘서트를 열어 벌어들인 돈이 잡히는 공연 및 전시 관련 서비스 수지도 3억 달러 넘게 흑자를 냈다. 불과 2019년까지만 해도 이 서비스 수지는 만성 적자였다. K콘텐츠가 약진하고 있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전체 지식서비스 무역 수지는 여전히 적자다. 특허나 상표권 사용료, 법률·인수합병(M&A) 자문료 등까지 포함되는 지식서비스 무역 수지는 지난해 72억6000만 달러 적자를 냈다. 통계를 확인할 수 있는 2010년 이후 단 한 번도 흑자를 본 적이 없다. 지식재산권 사용료와 전문·사업서비스로 해외에 지출하는 돈이 워낙 많다 보니 적자를 벗어나기 어렵다. 제조업에 편중된 한국 산업 구조를 바꾸려면 서비스 산업을 키우고 서비스 수출도 늘려야 한다. 한국의 서비스 산업 경쟁력이 싱가포르, 태국보다 낮다는 건 약 30년 전 한국은행 보고서에도 등장한다. 하지만 한국의 서비스업 비중은 20년 넘게 60% 수준에 그치고 있다. 영국과 일본, 독일 등 주요국은 이미 2000년대 초반에 70%에 육박하거나 넘었다. 서비스 산업 선진화를 더는 미루기 어렵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교역에서 서비스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게 늘었다. 한은은 지난달 내놓은 보고서에서 “통상 환경의 불확실성 증대, 중국의 경쟁력 향상 등의 영향으로 당분간 상품 수출은 크게 증가하지 못할 것으로 전망되면서 서비스 수출 확대가 필수적인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2일(현지 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요 교역국을 대상으로 상호 관세 부과에 나선다. 미국은 지난해 한국과의 상품 교역에서 세계에서 8번째로 많은 적자를 봤다. 그러나 상품이 아닌 지식서비스 분야에선 오히려 한국이 지난해 56억1000만 달러 적자였다. 미국의 상품 관세 장벽은 갈수록 더 높아질 것이다. 관세로 상품 교역의 흑자 축소가 불가피하다면 서비스 산업의 대미(對美) 적자는 줄여 나가야 균형이 맞는다. 정부와 국회는 트럼프발(發) 관세 폭탄을 걱정만 할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아서 해야 한다. 지난해 10월 또 발의된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은 14년째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오징어게임과 BTS의 개인기로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정부와 정치권이 깨달을 때가 됐다. 박희창 경제부 차장 ramblas@donga.com}
‘뉴 노멀(new normal·새로운 정상)’이 된 1400원대 중반 원-달러 환율이 물가를 끌어올리고 있다. 지난달 휘발유와 경유 등이 포함된 석유류 가격은 1년 전보다 6.3% 뛰었다. 국제유가 자체는 지난해 2월과 비교하면 오히려 내렸다. 그런데도 석유류 가격이 오른 건 환율이 100원 넘게 치솟았기 때문이다. 지난달 평균 원-달러 환율은 1446원으로 1년 전보다 114원 상승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던 지난해 12월부터 월평균 환율은 1437원에서 1456원을 오갔다. 재료 가격이 오른 데다 환율까지 고공행진하면서 식품 업체들의 가격 인상은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농심은 17일부터 신라면 한 봉지 가격을 1000원으로 올리기로 했다. 새우깡도 이젠 1500원을 줘야 한다. 대형마트에서 판매하는 스팸 가격은 이달 들어 이미 9.8% 올랐다. 학생들이 편의점에서 즐겨 먹는 소시지도 다음 달 200원 인상을 앞두고 있다. 빵과 아이스크림, 커피는 연초에 가격이 올랐다. 치솟은 환율의 영향이 물가에 다 반영된 것도 아니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내놓은 보고서에서 환율이 소비자물가에 미치는 영향은 환율 변동 후 9개월이 될 때 가장 커졌다가 줄어드는 모습을 보였다고 분석했다. 특히 최근처럼 환율이 크게 올라 3개월 이상 지속됐을 때는 장기적으로 물가 상승률을 밀어 올리는 폭이 더 컸다. 고환율이 길어지면 가격 인상에 나서는 업체가 더 늘어나고 환율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이 더욱 확대될 수 있다. 정부는 가격 인상 자제를 요청하고 나섰지만 말발이 안 먹힌다. 지난달 중순부터 농림축산식품부 장관과 차관이 잇달아 식품, 외식 업체들을 만나 가격 인상 요인을 최소화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런데도 가격이 오르는 가공식품 목록은 연일 늘어만 간다. 계엄·탄핵 정국으로 정부의 ‘그립’이 약해진 틈을 타 업체들이 가격을 올리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때도 식품 업체들은 앞다퉈 가격을 올렸다. 1년 9개월 전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당시 정부가 주원료인 밀 가격이 떨어졌다며 라면 가격을 인하할 필요가 있다고 하자 라면 업체들은 13년 만에 값을 내린 바 있다. 밀 가격은 하락했지만 그때도 원-달러 환율은 전년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이달 라면 가격을 인상하겠다는 이유는 환율과 원재료비 상승이다. 그러나 모든 원재료 가격이 다 오른 건 아니다. 지난달 국제 밀 가격은 라면 값이 내린 2023년 6월보다도 낮았다. 식료품 가격이 오르면 소득이 적은 이들의 부담이 더 크게 늘어난다. 저소득 가구일수록 소득에서 식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지난해 4분기(10∼12월) 소득 하위 20%인 1분위 가구가 식비로 쓴 금액은 전체 가처분소득의 45%에 달했다. 반면 소득 상위 20%에 해당하는 가구는 이 비중이 15%에 불과했다. 최근 프랑스에선 식료품을 살 수 있도록 매달 150유로가 충전되는 ‘식품복지카드’를 전국적으로 도입하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가격 인상 자제가 무색해진 만큼 여러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밥값이 부족한 이들이 라면마저 못 먹는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박희창 경제부 차장 ramblas@donga.com}
이대로면 직장인들이 낸 근로소득세가 전체 세금의 ‘빅2’가 될 수도 있다. 지난해 1년간 근로소득세는 61조 원이 걷혔다. 부가가치세와 법인세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이 걷혔지만 2위인 법인세와의 차이는 1조5000억 원에 불과했다. 올해 근로소득세가 정부가 예상했던 만큼만 걷혀도 지난해 법인세 세수를 뛰어넘는다. 정부는 올해 법인세가 지난해보다 26조 원 더 걷힐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3분기(7∼9월) 들어 코스피 상장사들의 영업이익이 전 분기보다 줄어드는 등 상황이 녹록진 않다. 이미 전체 세수에서 근로소득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역대 최대로 불었다. 지난해 근로소득세 세수는 전체 국세 수입의 18.1%를 차지했다. 5년 새 5%포인트 뛰었다. 2년 연속 이어진 세수 펑크에도 직장인이 전체 세금의 5분의 1가량을 책임진 셈이다. 급여에서 미리 떼어 ‘유리 지갑’으로 불리는 근로소득세가 재정의 버팀목이 됐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지난해 걷힌 전체 세금은 정부가 예산을 짤 때 잡았던 세수보다 30조8000억 원 모자랐다. 월급에 매기는 근로소득세는 가파르게 늘고 있다. 지난해 걷힌 근로소득세는 5년 전의 1.6배로 늘었다. 매년 물가가 오르면서 급여명세서에 찍히는 월급도 일정 수준 함께 오르는 데다 임금근로자 수 자체도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확산됐던 2020년 한 해를 제외하면 임금근로자는 최근 들어 매년 늘었다. 반면 법인세는 반도체 불황 등의 여파로 2019년보다 오히려 9조7000억 원 줄었다. 올해도 벌써 세수가 부족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는데 하나의 세금에 대한 의존도가 빠르게 커지는 건 문제다. 게다가 직장인 10명 중 3명은 근로소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는다. 각종 소득공제와 세액공제를 받은 결과 최종적으로 내야 할 세금이 0원으로 결정된 면세자는 2023년 전체 근로소득자 2085만 명 중 689만 명(33%)이었다. 여전히 일본(2020년·15.1%)의 2배가 넘는 수준이다. 같은 해 기준으로 연봉 1억 원이 넘는 이들이 납부한 근로소득세도 전체의 63.5%를 차지해 비중이 전년보다 0.8%포인트 커졌다. 세금을 내는 근로자들의 부담만 커지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정부가 깎아주는 세금은 세수가 늘어나는 폭보다 더 빠르게 불어나고 있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2016년부터 10년간 국세 감면액은 연평균 8.1% 증가했는데 전체 국세 수입은 6.6% 늘었다. 2023년과 2024년에 깎아준 세금만 이미 141조 원이 넘었고 올해도 국세 감면액은 78조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깎아주는 세금이 많아지면 세입 기반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전면적인 조세 개혁을 추진했던 노무현 정부 당시 세정 당국은 ‘넓은 세원, 낮은 세율’이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선 ‘넓은 세원’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넓은 세원은 ‘내가 내는 세금이 늘어날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져 거부감이 크기 때문이지 싶다. 저출산, 고령화 등으로 나랏돈을 써야 할 곳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넓은 세원이라는 조세 원칙을 다시 짚어봐야 할 때가 됐다. 세금을 더 내야 하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한다면 불만이 있더라도 납득할 수 있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박희창 경제부 차장 ramblas@donga.com}
중소기업에 다니는 30대 A는 3년 전쯤 결혼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만났던 그는 “애는 낳지 않겠다”고 말했다. 애를 키우는 데 돈과 시간을 다 써 버리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철철이 단둘이서 여행을 다닐 계획이라고 했다. 하지만 한 달 전쯤 A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됐다. 마음이 바뀐 이유를 묻자 그는 별말 없이 웃었다. “출산지원금이 늘어난 게 영향을 미쳤냐”고 다시 물었다. “돈 더 준다고 애를 낳는 건 아니지. 그래도 애 몫으로 이것저것 나오니까 부담이 줄긴 하더라.” 지난해 출산율은 9년 만의 반등이 확실해졌다. 주형환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은 최근 “이대로라면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0.75명을 기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인 합계출산율은 2015년 이후 매년 뒷걸음질 쳤다. 1.24명이었던 출산율은 2023년에는 0.72명까지 떨어졌다. 출산율이 증가세로 돌아선 건 반가운 일이다. 실제 출산율이 0.75명을 보인다면 통계청 추계보다 빠르게 반등하는 셈이다. 통계청은 ‘2022∼2072년 장래인구추계’에서 출산율이 올해 0.65명(중위추계 기준)까지 떨어진 뒤 내년부터 다시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0.7명대의 합계출산율은 여전히 국가 소멸을 걱정해야 하는 숫자다. 현재의 인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출산율이 2.1명이다. 출산율이 0.7명으로 두 세대만 지속되면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부모’의 수는 큰 폭으로 줄어든다. 현재 부모 세대 1000명이 350명의 아이를 낳고, 자녀 세대 350명은 다시 123명의 아이를 낳기 때문이다. 사망률, 이민 등에 따라 전체 인구 감소 속도는 달라지겠지만 나라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출산율 반등이 이어질 수 있을지 역시 미지수다. 결혼 적령기에 접어들어 부모가 될 수 있는 인구 자체가 일시적으로 늘어난 데 따른 ‘착시’라는 지적도 나온다. 1982년 84만 명이 넘었던 출생아 수는 1990년 65만 명까지 떨어졌다가 1991년부터 1995년까지 70만 명대로 잠깐 반등했다. 이 시기에 태어났던 아이들이 올해 30∼34세가 됐다. 올해 23세인 청년들이 태어난 2002년부터 연간 출생아 수는 15년 연속 40만 명대를 보였다.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은 올해도 아이를 낳으면 현금을 나눠줄 계획이다. 전남도와 22개 시군은 이달 처음으로 출생기본수당을 지급했다. 전남도가 지급하는 현금 10만 원에다 시군 수당이 합쳐져 최대 20만 원을 매달 받게 된다. 부산진구도 출산지원금을 늘려 올해부터 첫째 아이가 태어나면 20만 원의 출산축하금을 주기로 했다. 하지만 돈 풀기의 효과가 크지 않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지자체 출산 장려 사업의 효과성 분석 연구’에 따르면 출산율 상승 등 출산지원금의 긍정적 효과에 대해선 일관적 해석이 어렵고 긍정적 영향이 관찰되더라도 단기적이었다. A의 말처럼 돈만이 출산율의 결정 요인은 아니다. 정부가 저출산 정책을 총괄하기 위해 만든 기구조차 ‘워라밸’(일과 생활의 균형)을 지킬 수 없다는 말들이 들려온다. 반등 추세를 이어가기 위해선 일하는 문화 자체를 다시 짚어보는 작업 역시 함께 이뤄져야 한다.박희창 경제부 차장 ramblas@donga.com}
올 한 해 경제정책의 네 개 축 중 하나는 ‘대외 신인도 관리’다. 정부는 2일 ‘2025년 경제정책 방향’을 발표하면서 “대내적으로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이 민생 개선이라면 대외적으로는 신인도를 관리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비상계엄 이후 계속되는 정치 혼란으로 국가신용등급마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자 대외 신인도 유지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한 것이다. 과거 한국 경제를 이끌었던 경제 관료를 협력 대사로 임명하고 해외에서 한국 경제 설명회도 연다. 대통령 직무가 정지된 채로 새해를 맞이한 건 이번이 두 번째다. 그러나 대외 신인도 관리가 전면에 등장한 건 처음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심판이 시작됐던 2016년 말 정부가 내놨던 이듬해 경제정책 방향에 ‘대외 신인도’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2017년 1월에 미국 뉴욕에서 경제부총리가 주재하는 한국 경제 설명회를 열겠다는 내용이 한 줄 들어가 있을 뿐이다. 정부 역시 정치 불안이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박 전 대통령 탄핵 때보다 더 크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2017년과 달리 대외 신인도 관리가 왜 중요해졌을까. 악화된 대외 여건이 주요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12월 “과거 탄핵 국면에는 중국의 고성장(2004년), 반도체 경기 호조(2016년) 등 우호적인 대외 여건이 수출 개선을 통해 성장세를 뒷받침했으나 이번에는 통상 환경의 불확실성 증대 등으로 대외 여건의 어려움이 커진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정부는 올해 수출이 지난해보다 1.5% 늘어나는 데 그칠 것으로 보고 있다. 2017년 연간 수출이 전년보다 15.8% 급증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크게 늘어난 국가채무도 대외 신인도에 부담이다. 2016년 말 627조 원이었던 국가채무는 2023년 말 1127조 원으로 500조 원 급증했다. 정부는 올해 국가채무가 1277조 원까지 불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 경우 국가채무는 국내총생산(GDP)의 50%에 육박하게 된다. 국제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한 계단 높였던 2016년 국가채무는 GDP의 34%였다. 올해는 국고채 발행 규모마저 역대 최대다. 상환액보다 발행액이 80조 원 더 많아 국가채무도 80조 원 더 늘어난다. 올해도 세수 부족이 이어질 가능성이 큰 가운데 추가경정예산 편성까지 현실화하면 결국 국가채무를 늘려 충당해야 한다. 국내 신용평가사 나이스신용평가사는 최근 “국고채 발행 급증에 따른 정부 채무 상환 능력 지표 악화는 국가신용등급 하방 압력을 높이는 요인”이라며 2025년 이후 등급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 경제의 ‘뉴노멀’이 된 저성장도 대외 신인도에는 마이너스다. 정부는 현재의 정치 불확실성이 빨리 정리되는 상황을 전제로 올해 경제성장률을 1.8%로 전망했다. 2016년 탄핵 정국 때와 달리 경제만 놓고 봐도 대외 신인도를 깎아 먹을 만한 점들투성이다. 대외 신인도가 흔들리면 그 피해는 결국 국민들의 몫이다. 정부가 아무리 발 벗고 뛰어도 정치 불확실성 해소가 대외 신인도 관리의 첫걸음이다. ‘민폐 정치’부터 멈춰야 한국 경제의 위상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정치인들만 모르는 듯하다.박희창 경제부 차장 ramblas@donga.com}
‘○○플레이션’이 유행하더니 이제는 ‘칩플레이션(Cheapflation)’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값이 싸다는 뜻의 ‘칩(cheap)’과 물가 상승을 의미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다. 싼 상품이 비싼 상품보다 가격이 더 크게 오르는 현상을 뜻한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나타난 모습 중 하나다. 한국은행이 2020년 1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라면, 햄 등의 가공식품 가격 변화를 분석해 봤더니 저가 상품의 가격이 16.4% 뛸 때 고가 상품은 5.6% 오르는 데 그쳤다. 소득이 적을수록 저렴한 상품을 찾기 마련이다. 결국 저소득층이 체감한 물가 상승률은 고소득층보다 더 컸다. 칩플레이션으로 인플레이션마저 불평등하게 겪는 셈이다. 한은에 따르면 2019년 4분기(10∼12월)부터 2023년 3분기(7∼9월) 사이 소득 하위 20%의 실질적인 누적 물가 상승률은 13.0%였다. 소득 상위 20%가 경험한 물가 상승률보다 1.3%포인트 높다. 저소득층일수록 더 저렴한 상품을 사기 위해 더 많은 발품을 들일 가능성도 크다. ‘발품 비용’까지 더하면 저소득층의 인플레이션 부담은 더 불어난다. 더 싼 상품으로 장바구니를 채우며 허리띠를 졸라매도 저소득층을 탈출하긴 어렵다. 이는 일주일 전 처음으로 발표된 국가통계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통계청의 ‘소득 이동 통계’를 보면 2021년 소득 하위 20%에 속했던 10명 가운데 7명은 1년이 지난 뒤에도 소득 하위 20%에 머물렀다. 2017년으로 범위를 넓혀 보면 5년 내내 저소득층에 머문 이들은 10명 중 3명이었다. 2022년과 2021년을 비교했을 때 오히려 더 낮은 소득 계층으로 떨어진 사람도 17.4%나 됐다. 윤석열 정부 경제 정책의 핵심 키워드는 ‘역동 경제’였다. 올 7월에는 “역동 경제로 서민, 중산층 시대를 구현하겠다”며 중장기 과제를 담은 로드맵도 내놨었다. 로드맵의 3대 축 중 하나가 사회 이동성 개선이었다. 계층 이동이 활발히 이뤄지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가계 소득·자산 확충, 핵심 생계비 경감, 재기 지원 강화 등이 제시됐다. 15%에 육박하는 상대적 빈곤율을 2028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으로까지 낮추겠다는 식으로 목표도 여러 개 설정했다. ‘12·3 비상계엄’으로 현 정부의 정책들은 폐기 수순을 밟고 있다. 역동 경제 로드맵 역시 ‘윤석열표’ 정책으로 조용히 잊혀질 게 뻔하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역동성을 살리기 위해선 계층 이동을 통한 성공 사다리의 복원이 필수적이다. 정치적 입장을 떠나 그 점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계 소득·자산 확충을 비롯한 그 방법론들 역시 마찬가지다. 삶은 팍팍하고 계층 이동은 꿈조차 꿀 수 없게 되면서 ‘운’에 기대는 사람들은 더 늘었다. 올 3분기 복권을 구매한 가구 비중은 같은 분기 기준으로 역대 최고치를 다시 썼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가져온 경제 정책 공백은 내년 상반기(1∼6월)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이미 세워둔 중장기 과제들 가운데 여야가 함께할 수 있는 지점들은 계속 추진해 나가야 한다. 중장기 구조 개혁까지 멈춰 서면 국가 경제마저 운에 기대야 하는 미래밖에 남지 않는다.박희창 경제부 차장 ramblas@donga.com}
지난해에 이어 내년에도 한국 경제는 1%대 성장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말 내년 한국 경제성장률을 1.9%로 전망했고, 글로벌 투자은행(IB) 8곳이 제시한 성장률 전망치는 평균 1.8%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모든 수입품에 부과하겠다고 한 10∼20%의 보편 관세가 예상보다 빠르게 현실화하면 성장률은 더 낮아질 수도 있다. 경제 개발이 본격화된 이후 한국 경제가 2%도 안 되는 성장률을 보였던 건 초대형 대외 악재가 발생했던 때를 제외하면 2023년 한 번뿐이었다. 한국 경제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답습할 것이란 위기감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정부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지만 정부의 경제 정책은 모두 멈춰 섰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탄핵 무산 후폭풍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통상적으로 매년 12월에 내놨던 내년 경제정책방향은 언제 발표할지도 알 수 없다. 경제정책방향에는 한 해 동안 정부가 추진할 정책의 큰 틀과 실행 계획이 담기는데, 침체에 빠진 내수를 살릴 방안들이 포함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퇴진을 두고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정부 내부에서도 “의미가 있느냐”는 말이 나온다.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폐지와 가상자산 과세 2년 유예 역시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이미 여야가 합의를 마쳤지만 양측의 대립이 극심해지면서 국회 통과는 다시 불투명해졌다. 남은 23일 동안 국회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면 금투세와 가상자산 과세는 내년 1월 1일부터 시행된다. 야당이 반대했던 반도체 특별법은 국회 통과가 더 힘들어졌다. 정책을 실현하는 주요 수단 중 하나인 예산마저 내년에는 빨간불이 켜졌다. 야당이 지난달 말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단독으로 처리한 감액 예산안이 본회의에서도 그대로 통과되면 ‘대왕고래 프로젝트(동해 심해 석유·가스전)’는 사업 차질이 불가피하다. 505억5700만 원의 관련 예산 중 8억3700만 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삭감됐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예고한 추가 삭감까지 이어지면 경기 부양을 위한 정부의 ‘총알’은 더 부족해질 수밖에 없다. 해외 언론들은 이번 사태를 두고 다시 한번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를 주목하고 있다. 책 ‘일본화-일본의 잃어버린 수십 년에서 세계가 배울 수 있는 것’을 집필한 칼럼니스트 윌리엄 페섹은 포브스에 기고한 글에서 “윤 대통령은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옳다는 점을 증명했다”고 지적했다. 그간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이유로는 상장 기업들의 후진적 지배구조, 지정학적 리스크 등이 꼽혔는데 정치 불확실성까지 더해진 셈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수차례 강조했던 대통령이 정작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더 견고하게 완성시켰다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탄핵 정국이 길어지면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증시를 넘어 대외 신인도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을 제공한 정부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줄 해외 투자자들은 많지 않다. 소비, 기업 활동 위축은 이미 확실시된다. 정치적 혼란이 길어지면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계속 쌓여 간다. ‘잃어버린 30년’을 따라갈 가능성만 점점 키울 뿐이다.박희창 경제부 차장 ramblas@donga.com}
국회 심의를 앞둔 올해 세법 개정안이 처음 발표됐을 때부터 의아했던 건 세 부담 변화다. ‘부자들의 세금’으로 여겨지는 상속세 부담을 줄여주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도 정부가 고소득자보다 서민, 중산층의 세 부담이 더 크게 감소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고소득자의 세 부담은 1664억 원 줄어들지만 서민, 중산층은 6282억 원 감소한다고 추산했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부자들을 감세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중산층 부담을 완화하는 차원”이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최근 정반대인 추계가 나왔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올해 세법 개정에 따른 고소득자의 세 부담 감소 폭이 4조 원이 넘어 서민, 중산층 감소 폭의 13.5배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올해를 기준으로 앞으로 5년 동안의 세수 효과도 산출해봤더니 고소득자의 세 부담은 20조 원 넘게 줄었다. 서민, 중산층의 세 부담 감소 폭은 1조7000억 원에 불과했다. 엇갈린 추계는 상속·증여세 개정이 가져올 세수 효과를 분류한 방법에서 기인했다. 정부는 상속인들이 받을 감세 혜택을 분석이 곤란한 항목들을 모아둔 ‘기타’로 빼놓고 계산했다. 반면 예정처는 해당 효과가 고소득자에게 돌아갈 것으로 봤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정부가 ‘부자 감세’ 프레임을 누그러뜨리려 개인의 세 부담 변화를 계산하며 상속·증여세 개정 효과를 제외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제기됐다. 서민, 중산층의 세 부담 감소 폭이 더 크게 보이도록 꼼수를 썼다는 것이다. 내년부터 크게 달라지는 상속·증여세를 뜯어 보면 소득과 재산이 많은 이들에게 더 큰 감세 혜택이 돌아간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개정안이 그대로 국회를 통과하면 상속·증여세 최고세율은 50%에서 40%로 낮아진다. 또 최고세율이 적용되는 과세표준(상속액에서 각종 공제액을 제외한 금액)도 ‘30억 원 초과’에서 ‘10억 원 초과’로 조정된다. 상속세를 매길 때 자녀 한 명당 빼주는 금액은 5000만 원에서 5억 원으로 확대된다. 17억 원을 배우자와 자녀 2명에게 물려준다고 하면 아예 상속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 부자 감세 철회를 주장하고 있는 야당이 상속인들에게 돌아갈 감세 혜택을 제외하고 계산한 이유를 묻는다면 정부는 어떤 답을 내놓을까. 세법 개정안 발표 때 정부는 개인의 여건에 따라 중산층도 상속·증여세 부담이 줄어들 수 있어 일률적으로 고소득자로 넣긴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똑같이 답하려면 감세 혜택을 받는 중산층이 최소 절반에 육박한다는 분석이라도 가져와야 한다. 불필요한 논란만 키운 비합리적인 계산법의 근거를 더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2년 연속 역대급 세수 펑크가 이어지면서 윤석열 정부 재정 정책의 대원칙인 ‘건전 재정’과 감세는 함께 가기 어려워지고 있다. 세금이 덜 걷히는 상황에서 건전 재정을 지키려면 추가 감세는 그만하거나 씀씀이를 줄여야 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납득하기 어려운 숫자를 앞세워 ‘중산층 감세’를 외치며 감세 기조를 뒷받침하고 있다. 지출은 줄이지도 못해 올해도 청약통장 저축액 등으로 조성된 기금에서까지 돈을 끌어다 쓰는 ‘돌려막기’에 나선다. 이런저런 꼼수들로 채워지는 건전 재정은 지속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경제 전반에 주름살만 안긴다.박희창 경제부 차장 ramblas@donga.com}
햄버거 속 토마토 한 쪽의 ‘가격’은 얼마일까. 요즘은 커피 한 잔과 같다고 해도 무리가 없지 싶다. 지난주부터 한국맥도날드는 일부 매장의 햄버거에서 토마토를 뺐다. 그 대신 무료 커피 쿠폰을 준다. 토마토 한 쪽과 커피 한 잔의 가치가 똑같아진 셈이다. 실제 토마토 가격은 고공 행진 중이다. 토마토 1kg의 소매 가격은 최근 1만4000원까지 뛰었다. 지난달 초와 비교하면 약 2배로 올랐다. 토마토가 햄버거에서 사라진 건 이상기후 탓이다. 한국맥도날드는 “올여름 이어진 폭염으로 토마토 성장이 충분하지 못해 공급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토마토가 잘 자라는 한계 재배 온도는 30도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낮 온도가 35도 이상으로 높게 유지되면 토마토 열매는 4분의 1가량 줄어든다. 토마토 주산지인 전북 장수군은 올 8월 한 달 동안 사흘을 빼고 모두 낮 최고기온이 30도를 넘었다. ‘토마토 빠진 햄버거’를 맛보는 게 처음은 아니다. 4년 전에도 맥도날드와 버거킹, 롯데리아 등은 토마토를 빼는 대신 양상추와 같은 채소를 더 넣거나 가격을 내려 판매했다. 당시에 롯데리아는 토마토 한 쪽 가격이 평균 300원이라며 버거값에서 그만큼을 빼줬다. 그때도 이상기후 때문이었다. 2020년에는 장마가 54일(중부지방 기준)이나 이어졌다. 역대 가장 긴 기간이었다. 태풍까지 겹치면서 토마토 작황이 나빴고 지금처럼 가격이 급등했다. 다시 등장한 토마토 빠진 햄버거는 이상기후의 영향이 일회성에 그치진 않을 것이란 우려가 기우가 아님을 확인시켜 줬다. 올해 초 벌어진 ‘금(金)사과’ 대란 역시 이상기후에 따른 흉작이 원인이었다. 이상기후가 자주 발생하면서 국내 사과 재배지 자체는 계속 북상 중이다. 현재 사과 주산지인 경북 지역이 봄에는 이상고온, 여름에는 폭염과 폭우의 영향을 받는 일이 잦아지자 정부는 아예 더 서늘한 강원도를 미래 사과 주산지로 조성하기로 했다. 이상기후가 농작물 생산 패턴을 바꾸는 모습들은 이미 세계 곳곳에서 나타난다. 60년 전만 해도 올리브 재배에 최적이라고 했던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선 올리브 농사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연평균 기온은 높아지고 강우량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수확기에 기온이 40도에 육박하면서 농부들은 특수 냉각 기계도 도입했다. 농사를 짓기 어렵다고 여겨졌던 미국 알래스카에선 ‘얼지 않는 여름’이 길어지면서 농장 수가 20년 전보다 2배 가까이로 늘었다. 그러나 변화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이상기후가 그저 이례적인 일인 듯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지난해 정부가 남는 쌀을 웃돈을 주고 사들이고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에 따라 매년 의무적으로 수입한 쌀을 싼값에 되파는 데 쓴 비용만 1조7000억 원이 넘었다. 공공 비축 제도가 도입된 2005년 이후 최대였다. 반면 기후변화 대응 정책과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하는 전담 기관인 농식품 기후변화대응센터는 조성 사업 첫해부터 지연됐다. 지난해 잡혀 있던 예산 21억 원도 다 못 쓰고 절반 넘는 금액이 올해로 이월됐다. ‘정상기후’가 돼버린 이상기후는 먹거리에 큰 영향을 미친다. 기후변화 속도에 맞춰 제때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를 기다리는 건 더 많은 익숙한 맛들과의 이별이다. 박희창 경제부 차장 ramblas@donga.com}
자영업자들이 어렵다는 건 늘 들려오는 말이다. 길을 걷다 보면 ‘임대 문의’가 붙은 텅 빈 가게를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런데도 자영업자가 고통을 겪고 있다는 ‘뉴스(News)’ 아닌 뉴스가 반복돼 나오는 이유는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폐업 신고를 한 사업자 수 98만 명은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최대다. 실업자가 된 자영업자 증가 폭 23%(올 1∼6월 기준)는 전체 실업자 증가율의 3배가 넘는다. 아는 이야기라며 넘기긴 어려운 수치들이다. 자영업자의 눈물을 보여주는 숫자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쌓이고 있다. 대금이 밀린 식당 사장 등을 대신해 SGI서울보증이 갚아준 돈은 올 들어 6개월 만에 벌써 지난해 1년 치의 두 배가 넘었다. 코로나19가 확산됐던 2020, 2021년보다도 이미 많다. 올 6월 말 기준으로 자영업자 10명 중 7명은 금융사 3곳 이상에서 돈을 빌렸고 이들의 연체율은 3년 전보다 3배 넘게 뛰었다. 코로나19 때 쌓인 빚에다 내수 부진까지 이어지면서 한계 상황에 놓인 자영업자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지표를 보고 있는 정부는 대책을 내놓느라 바쁘다. 지난주에는 소비 활성화 대책들을 발표하며 자영업자 맞춤형 지원 방안을 함께 내놨다. 이달 중에 또 자영업자 대책을 내놓는다는 얘기도 나온다. 아직 국회에서 통과되진 않았지만 내년 예산에도 자영업자 지원에 쓸 돈이 담겨 있다. 정부는 내년에 자영업자들에게 배달·택배비를 1년에 최대 30만 원 지급할 계획이다. 하지만 뜯어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지점들이 눈에 띈다. 최근 정부는 자영업자들의 비용 부담 완화뿐만 아니라 취업, 재창업 지원 강화로 재기를 뒷받침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2일 나온 맞춤형 지원 방안에서 재취업을 비롯한 ‘재기 지원’에 들어가는 추가 자금은 3000억 원으로 전체의 3%도 안 됐다. 2022년 7월부터 2년 동안 지원된 전체 정책 금융은 47조 원이 넘었지만 재기 지원 자금은 1조 원에 그쳤다.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 출발 기반을 마련하기에는 충분치 않아 보이는 액수다. 정부의 지원 예산 역시 마찬가지다. 자영업자 약 68만 명에게 배달·택배비를 지원하기 위해 잡아놓은 내년 예산은 2037억 원이다. 전체 자영업자 지원 예산이 2733억 원 늘었는데 그중 75%나 된다. 현금성 지원보다는 자영업자의 경쟁력을 키우는 데 초점을 맞추겠다고 하면서도 하루에 1000원꼴도 안 되는 현금성 지원은 계속되는 셈이다. 정부는 올해도 자영업자들에게 전기요금을 지원하고 있다. 2520억 원을 들여 한 명당 1년에 최대 20만 원을 준다. 예전에 한 고위 공직자는 “비바람이 불 땐 우산이라도 씌워 주면서 같이 비를 맞는 게 공무원이 할 일”이라고 했다. 조금이라도 어려움을 덜어줄 수 있다면 정책 목표에서 벗어나거나 효과가 작더라도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공직자로서 필요한 자세다. 그러나 자영업자 지원은 같이 비를 맞아주며 생색만 내는 데 그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많은 자영업자는 오래전부터 한국 경제의 문제점으로 꼽혀 왔다. 이참에 호흡기만 달아주는 현금성 지원에서 벗어나 전직, 재교육 등에 더 많은 정부의 돈과 시간을 써야 한다. 지금처럼 해선 그들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없다. 박희창 경제부 차장 ramblas@donga.com}
친구 J는 최근 이사를 한 뒤 통장이라는 사람으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실거주 확인을 위해 방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메시지는 ‘세대원 누구나 확인 가능합니다’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J는 혼자 산다며 주말 아침에 방문할 순 없느냐고 물었다. 프로젝트 마감을 앞두고 계속 야근을 해야 했다. 돌아온 건 ‘오후 11시 안에만 전화주세요’라는 짧은 답장이었다. 몇 차례 더 말이 오갔지만 통장은 평일을 고집했다. 결국 퇴근 후 오후 11시가 넘어 일면식도 없던 통장이 집을 다녀갔다. J는 “다른 방법이 없어 허락했지만 혼자 사는 사람에 대해선 배려가 하나도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J의 에피소드가 떠오른 건 통계청이 12일 내놓은 장래가구추계 때문이었다. 통계청은 2, 3년에 한 번씩 앞으로 30년 동안의 가구 규모, 가구원 수 등을 전망하는데, 이번 추계에선 빨라진 1인 가구 증가세가 특히 두드러졌다. 1인 가구는 2037년 처음으로 전체 가구의 40%를 넘어설 것으로 추산됐다. 당장 13년 뒤면 다섯 집 중 두 집은 혼자 사는 셈이다. 2년 전 추계 때는 2050년에도 1인 가구 비중은 40%를 넘지 않았다. 올해 추계대로 2052년에 2인 가구 비중도 35%까지 늘어나면 열 집 중 일곱 집이 1인 가구이거나 1인 가구가 될 가능성이 있다. 정부가 1인 가구 증가에 따른 중장기 대응 방안을 내놓은 게 2020년이었다. 당시 정부는 “빠른 가구 구조 변화에도 불구하고 관련 정책들은 과거 4인 가구 중심의 골격을 유지 중”이라고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공유주택 활성화를 비롯해 여성 1인 가구에 대한 안전 강화, 노인 1인 가구에 대한 고독사 방지 노력 등이 담겼다. 그러나 J처럼 “그런 정책을 언제 내놨느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더 많다. 마트에 진열된 작게 포장된 채소와 과일들, 1인용 주방 가전제품들에서 기업의 발 빠른 대응을 확인할 수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배달 애플리케이션의 첫 화면에 ‘1인분’이 포함된 지도 오래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건 고령화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미 자녀들과 따로 사는 노인들이 많아지면서 1인 가구는 고령층을 중심으로 늘고 있다. 올해 추계에 따르면 65세 이상 1인 가구는 앞으로 30년 안에 2.6배로 늘어난다. 2052년에는 1인 가구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연령대도 ‘80세 이상’이 된다. 나이가 들수록 병원에 갈 일은 많아지지만 병원 시스템조차 1인 가구엔 친화적이지 않다. 건강검진을 할 때 수면내시경을 선택하면 반드시 보호자를 동반하도록 하는 곳들이 많다. 중고거래 플랫폼 ‘당근’에선 병원 동행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글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국가 소멸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저출산이 심각한 만큼 1인 가구 대응이 뒷전으로 밀릴 순 있다. 아이가 더 많이 태어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선 2명 이상의 가구를 우대하는 정책을 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 1인 가구가 되는 미래는 고령화가 가져올 또 다른 현실이 됐다. 전 정부 때부터 외쳤던 ‘축소사회 대응’이라는 구호에 알맹이를 채워 넣어야 한다. 피부에 와닿는 변화 없이는 ‘4인 가구 중심의 골격’과 현실이 부딪치는 불협화음이 조만간 여기저기서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박희창 경제부 차장 ramblas@donga.com}
이대로면 올해 세수(稅收)는 32조 원이 모자란다. 정부가 올해 걷힌다고 봤던 세수의 9%가 비는 셈이다. 지난해에도 세수는 정부가 예산을 짤 때 잡았던 것보다 56조 원 넘게 부족했다. 2년째 이어지는 세수 부족은 법인세 급감 탓이 크다. 지난해 적자를 냈던 법인세 납부 1, 2위 기업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올해 법인세를 한 푼도 내지 않는다. 지난해 역대급 세수 펑크에 정부는 쓸 수 있는 모든 카드를 다 꺼내 썼다. 전국 지방자치단체와 시도교육청에 내려보내는 돈을 줄였고, 환율이 급등락할 때 환율을 안정시키기 위해 쌓아둔 기금에선 20조 원을 끌어다 썼다. 우체국보험 가입자가 낸 보험료 등으로 조성된 우체국보험 적립금에서도 2500억 원을 꿔왔다. 일시적인 자금 부족을 메우기 위해 한국은행에서 잠깐씩 돈을 빌려다 쓰기도 했다. 1년 동안 117조 원을 빌려 쓰면서 낸 이자만 1500억 원이다. 그러나 정부의 대응 카드 중 세수 펑크가 날 때 자주 썼던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은 없었다. 세금이 덜 걷혀 국회에서 통과됐던 예산안보다 세입이 부족하면 정부는 연도 중에 예산안을 고칠 수 있다. 추경을 통해 세수가 모자란 만큼 세입을 적게 고치고 그에 맞춰 지출도 줄이거나 지출은 그대로 두면서 적자 국채를 발행해 부족분을 메꾸는 것이다. 추경보단 지자체, 교육청과의 ‘고통 분담’과 ‘기금 돌려막기’를 택한 건 오롯이 정부의 의사 결정에 따라 세수를 메울 수 있기 때문이다. 세수가 모자라 지출을 줄이겠다고 해도, 지출은 계획대로 하면서 적자 국채를 찍어 국가채무를 늘리겠다고 해도, ‘바람직한 대응 방안’을 두고 여러 의견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금 돌려막기 등을 활용하면 세수를 메운 방법을 당장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듬해 결산이 끝난 뒤에도 분석 능력과 의지를 함께 갖춘 이가 없으면 공론화될 가능성도 작다. 처음부터 정부는 추경 편성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정부 고위 관계자는 “추경을 하면 총선을 앞둔 정치권이 ‘돈을 더 풀어야 한다’며 이런저런 요구를 할 것”이라며 “세입을 고치려다 자칫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릴 수 있다”고 했다. 올해도 정부는 추경을 편성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고통 분담과 기금 돌려막기를 들여다보고 있다고 한다. 모자란 세수에 맞춰 정부 내부적으로 지출 구조조정에 나서면서 재정 운용의 투명성은 떨어졌다. 지자체와 교육청에 미지급한 돈을 포함해 지난해 예산에서 쓰지 않은 불용액은 전년의 3.5배가 넘었다. 정부 자체 판단만으로 국회에서 논의돼 확정된 정부 지출의 7%에 해당하는 예산이 쓰이지 않았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재정 운용의 투명성 측면에서 적절하지 않은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올해 세수 부족을 메꾸는 방법들은 여전히 깜깜이다. 세수 펑크가 2년째 계속되는 만큼 정부는 각각의 대응 방안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세입만 적게 고치는 추경 편성이 가능하다는데도 기금 돌려막기보다 나쁜 선택지가 되는 이유도 밝혀야 한다. 아무리 국회가 미덥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헌법이 국회에 예산 심의·의결권을 준 취지에 부합한다. 꼬박꼬박 세금을 내는 국민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길이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박희창 경제부 차장 ramblas@donga.com}
어른이 되기 싫어하는 어른을 가리킬 때 ‘피터팬 증후군’이라는 말을 쓴다. 기업을 두고도 가끔 피터팬 증후군에 빠졌다고 한다. 중소기업들이 중견기업, 대기업으로 성장하지 않고 중소기업에 머무르려 하는 현상을 일컬을 때다. 중소기업이 스스로 성장을 멈추는 건 그게 더 낫다는 판단이 들기 때문이다. 더 큰 기업이 되는 순간 세금 감면을 비롯해 정부로부터 받던 각종 지원과 혜택은 끊긴다. 정부가 쳐 놓은 ‘중소기업’ 울타리를 굳이 벗어나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중소기업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가 오히려 그들의 발목을 잡는 역설적인 상황은 24년 전부터 지적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00년 내놓은 ‘한국 경제 보고서’에서 “중소기업에 대한 대규모 지원은 생산성 향상을 위한 자체 노력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진단했다. 당시 OECD는 중소기업 정책을 정부 지원에 의존하게 만드는 데서 벗어나 역동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후 중소기업 지원 문제는 OECD 한국 경제 보고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관가에서는 “보고서가 나오기 전에 ‘톤 다운’ 해달라고 하는 게 정부 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올해도 한국 경제 보고서에는 중소기업 지원 프로그램이 과도하게 많다는 판단이 담겼다. 보고서를 쓴 욘 파렐리우센 한국 담당관은 “지난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중소기업 지원 프로그램을 다 합하면 1646개였지만 중소기업 생산성은 계속 뒤처지고 있다”며 “수를 줄인 단순한 시스템이 더욱 효율적일 것”이라고 했다. OECD는 1646개의 지원 프로그램을 ‘파편화되고 형편없이 조율된 시스템’이라고 평가했다. 정부의 지원이 과도한지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릴 수 있다. 하지만 피터팬 증후군에 빠진 중소기업이 많아지면 좋은 일자리가 늘어날 가능성조차 사라진다는 건 분명하다. 한국 사회에서 좋은 일자리가 부족한 건 대기업 일자리가 적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한국의 대기업 일자리 비율은 14%(2021년 기준)로 OECD 32개 회원국 중 꼴찌였다. OECD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급여나 복지 등 근로조건은 보통 대기업이 중소기업보다 훨씬 낫다. 대기업 일자리가 부족해 나타나는 문제 중 하나가 청년들의 노동시장 이탈이다. 1년 4개월가량 다닌 중소기업을 최근 관둔 20대 A 씨는 “잦은 야근, 상사와의 갈등 등으로 그간 회사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일단은 그냥 쉬고 있다”고 했다. 그처럼 일할 능력이 있는데도 지난달 뚜렷한 이유 없이 그냥 쉰 15∼29세 청년 수는 역대 7월 중 가장 많았다.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은 무책임하다. 한국 사회에서 첫 직장으로 뚜렷하게 갈라지는 삶의 궤적은 고개만 돌리면 확인할 수 있다. 처음에 좋은 직장에 정규직으로 들어가면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아갈 가능성은 매우 높아진다. 야근 수당도 제대로 못 주는 중소기업에 다니다가 대기업으로 옮기는 이들을 찾긴 어렵다. 20년 넘게 지속된 OECD의 권고에 이제라도 귀 기울여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은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느리더라도 그게 더 확실한 청년 일자리 대책이다. 박희창 경제부 차장 ramblas@donga.com}
준비만 4년을 했다. 그런데도 또 2년이 미뤄졌다. 정부는 최근 발표한 올해 세법 개정안에서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자산으로 번 돈에 세금을 매기는 시점을 2027년 1월로 유예하기로 했다. 현행법에 따르면 내년 1월부터 가상자산 매매로 250만 원이 넘는 수익을 얻으면 세금을 내야 한다. 1년 동안 1000만 원을 벌었다면 750만 원에 20%를 곱한 150만 원의 소득세를 내게 된다. 하지만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면 앞으로 2년간은 지금처럼 세금이 없다. 가상자산 투자소득 과세는 2020년 7월 처음으로 공식화됐다. 당시 정부는 “해외 주요국의 과세 사례와 주식 등 다른 자산과의 형평을 감안해 과세해 나가고자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과세는 그 이후 두 차례 미뤄졌다. 원래 2022년 1월 시행될 예정이었던 게 2023년 1월로 유예되더니 다시 2025년 1월로 늦춰졌다. 첫 번째는 과세 시행을 약 한 달 남겨 두고, 두 번째는 9일 앞두고 최종적으로 미뤄졌다. 세 번째 유예인 이번까지 포함하면 유예 기간만 총 5년이다. 과세를 미루는 이유도 매번 “준비가 덜 됐다”였다. 첫 번째 유예 때는 정부가 “문제없이 과세할 수 있다”고 했지만 국회가 ‘과세 인프라를 마련하는 데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업계 의견에 맞장구를 치며 유예가 결정됐다. 그 다음부턴 정부가 유예의 이유로 ‘선(先) 정비, 후(後) 과세’를 내세웠다. 첫 번째 유예가 결정됐을 때부터 업계에선 “그때 가봐야 안다”는 말이 나왔다. 세금을 거둬야 할 때가 되면 준비가 부족한 점들이 또 튀어나올 것이고, 2030 투자자가 많은 만큼 정치권과 정부가 과세 시행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예상이었다. 그 말은 이번에도 맞아떨어졌다. 올해 22대 총선을 앞두고 여당은 ‘과세 시행 연기 검토’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정부는 예상을 현실로 만들었다. 늘어난 준비 기간에 정비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가상자산 투자소득에 세금을 매길 때 수익에서 기본적으로 빼주는 250만 원이 적다는 지적은 계속 제기돼 왔다. 2년 전 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도 여야는 250만 원보다 높이겠다고 했다. 국민의힘은 아예 5000만 원까지 세금을 매기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후 실질적인 논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올해 세법 개정안에도 기본공제 확대는 담겨 있지 않다. 프랑스 루이 14세 때 재무장관을 지낸 장바티스트 콜베르는 세금을 걷는 기술을 거위털 뽑기에 비유했다. 거위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깃털을 빼내듯이 세금을 걷어야 한다고 했다. 반복된 유예로 세금을 내는 고통을 피할 수 있다는 ‘기대’는 더없이 커졌다. 물론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과세에 나섰다가 혼란이 발생하는 것보단 유예가 낫다. 하지만 주식으로 번 돈이 1년에 5000만 원이 넘으면 수익의 20∼25%를 세금으로 내야 하는 금융투자소득세도 유예 끝에 결국 폐지가 추진 중이다. 가상자산 투자소득 과세는 시행도, 유예도 정부와 국회의 합작품이다. 많은 이들이 정해 놓은 법도 뒤집을 수 있다고 기대한다. 이젠 정비가 다 끝나더라도 조세 저항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됐다. 찔끔 유예보단 차라리 5년을 더 미루더라도 그땐 무슨 일이 있더라도 과세하겠다는 방침을 밝혀야 한다. 그나마 조세 정책의 신뢰성을 회복하는 길일 것이다. 박희창 경제부 차장 ramblas@donga.com}
관행을 깨고 다음 달부터 집에서 쓰는 도시가스 요금이 오른다. 서울에 산다면 6.8% 인상돼 4인 가구 기준으로 한 달에 3770원가량 부담이 커진다. 주택용 도시가스는 그간 원가보다 낮은 가격에 공급돼 한국가스공사 입장에선 팔면 팔수록 손해였다. 역마진 구조로 쌓인 가스공사의 손실은 13조5000억 원으로 30년 치 인건비를 웃돈다. 전 직원한테 30년 동안 한 푼도 주지 않고 일을 시켜도 손실을 털어낼 수 없다. 손실을 줄이기 위한 요금 인상은 기정사실이었다. 인상 시점이 여름이 될 것 역시 예견됐던 일이다. 난방을 할 필요가 없어 당장 요금 인상이 피부에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초 겨울 각 집으로 날아든 ‘난방비 폭탄’ 고지서는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까지 끌어내릴 정도로 파장이 컸다. 찬 바람이 불며 난방비 부담을 체감하기 전에 가스 요금을 올려야 정치적 부담이 작다. 다만 인상 시점이 8월인 건 의외라는 말들이 나왔다. ‘도시가스 요금 원료비 연동제 시행 지침’에 주택용 도시가스 요금은 홀수 달에 조정한다고 돼 있고, 지금까지 관행적으로 홀수 달에 요금을 조정했다. 가장 최근에 가스 요금을 올렸던 달도 지난해 5월이었다. 게다가 정부는 1일 “이달 중 도시가스 요금 인상은 어렵게 됐다”고 밝혔다. 그로부터 불과 나흘 뒤 “다음 달부터 요금을 올리겠다”고 나서는 모습은 예상하기 어려웠다. 도시가스 요금은 정부가 언제든지 올릴 수 있다. 홀수 달 조정은 시행 지침일 뿐 법적으로 요금 조정 시기가 명확하게 정해져 있진 않다. 가스공사가 요금 조정 여부 등을 보고하면 산업통상자원부가 기획재정부와 협의해 결정하면 된다. 실무를 담당하는 가스공사는 요금 인상이 7월에는 되고 8월에는 안 되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업계는 정부가 이달 가스 요금을 동결하며 “물가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협의 중”이라고 했던 말을 통해 미뤄 짐작할 뿐이다. 2%대 물가 상승률을 지키기 위해 가스 요금 인상을 한 달 미뤘다는 해석도 나온다. 지난달 2.4%까지 떨어졌던 물가 상승률은 이달 다시 오를 가능성이 크다. 유류세 인하 폭이 축소된 데다 폭염과 장마로 농산물 가격 오름세도 더욱 커질 수 있다. 보통 물가 상승률은 1년 전과 비교하는데 지난해 7월 물가 상승률은 연중 최저치를 보였다. 기저효과까지 더해진 마당에 가스 요금까지 얹힐 순 없었을 것이라는 말을 마냥 억측으로만 볼 수 있을까. 당장 눈앞의 숫자를 관리하기 위해 해왔던 소소한 ‘통계 마사지’ 중 하나가 아니라는 건 정부가 설명해야 할 몫이다. 정부는 두루뭉술한 ‘비상시’를 근거로 계속 원료비 연동제를 무력화하며 원료비를 충당할 수 있을 만큼의 요금 인상도 미뤄왔다. 두 달에 한 번씩 국제 에너지 가격 변동을 요금에 반영하는 원료비 연동제는 안정적으로 가스를 공급하고 요금 조정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1998년부터 시행돼 왔다. 하지만 앞선 정부들은 가스 요금을 ‘정치 요금’으로 만들어 왔고 현 정부도 경제 논리가 아닌 정치 논리로 요금을 결정하고 있다. 그 결과 남은 건 세금으로 메워야 할 공공기관의 손실이다. 이제는 정말 가스 요금을 투명하게 결정할 독립 기구를 마련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앞으로도 안정성과 객관성 모두 놓칠 수밖에 없다. 박희창 경제부 차장 ramblas@donga.com}
대통령의 입을 거치는 순간 ‘과학’도 ‘정치’에 한 발 걸치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 일주일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3일 취임 후 첫 국정브리핑을 열고 경북 포항 영일만 앞 심해의 석유·가스 매장 가능성을 직접 발표했다. 보고를 받고 대통령이 직접 브리핑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정치적 고려 없이 단순히 파급력이 큰 과학적 사실을 국민들에게 직접 설명해야 한다는 판단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첫발을 대통령의 ‘깜짝 발표’로 떼면서 영일만 앞 석유 탐사와 개발은 과학의 영역에만 머무를 순 없게 됐다. 미국 액트지오의 비토르 아브레우 고문은 최근 동아일보에 “동해에서 이미 세 차례 시추가 이뤄졌는데 그때마다 이렇게 폭발적일 만큼 여론이 들끓었느냐”고 반문했다. 아브레우 고문이 최대 140억 배럴의 석유와 가스가 묻혀 있을 수 있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은 영일만 앞 심해에서 한국석유공사는 2012년부터 세 번 시추를 진행했다. 그러나 국민 대다수는 이번에 그 시추공들의 존재를 알았다. 정부 출범 이후 최저치로 떨어진 국정 운영 지지율과 정부 안에서 나오는 “담당 국장이 발표하면 됐을 사안”이란 평가는 여론이 들끓게 된 이유 한 조각을 보여준다. 과학적 사실에 과도한 기대감을 덧씌운 것 역시 정부였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140억 배럴을 현재 가치로 따지면 삼성전자 시가총액의 5배 정도”라고 했다. 석유 탐사와 개발은 과학이다. 거기다 경제가 더해진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매장량’이라는 단어부터 엄격히 구분해서 쓴다. 석유 탐사·개발에서 매장량이라고 하면 시추를 통해 부존 여부와 경제적 가치를 모두 확인한 양이다. 즉, 불확실성 없이 검증된 기술로 상업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양을 뜻한다. 담당 장관이 경제성은커녕 실제 있는지조차 확인되지 않은 양을 갖고 약 2200조 원의 가치가 있다고 설명한 것이다. 이성적 판단보단 비이성적 과열이 가득 찬 투기판도 깔아줬다. 대통령이 탐사 시추 계획 승인을 발표한 건 오전 10시쯤이었다. 주식 거래가 한창인 시간이었다. 당장 “그래서 어떤 종목을 사야 되냐”란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회사 이름에 ‘석유’라는 두 글자만 들어가 있어도 주가가 뛰었다. 이날 상한가로 장을 마친 한국석유는 아스팔트 제조·유통기업으로 석유 시추와는 큰 관련이 없었다. 통상 주가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항들은 장 마감 이후에 발표한다. 다음 달이나 돼야 첫 시추에 나설 탐사 작업을 개장 1시간 만에 급히 발표한 이유는 찾기 어렵다. 정부와 여당은 “야당이 과학의 영역까지 정치화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영일만 앞 석유 탐사를 정치로 끌고 간 건 정부다. 심지어 정부와 석유공사는 야당의 자료 제출 요구에 ‘영업상 비밀’을 내세우며 대부분 거부하고 있다. 액트지오의 분석 결과를 검증한 자문단을 어떻게 추천했는지에 대한 자료조차 내지 않았다. 그러면서 갑자기 정보 공개 취지에 맞게 문서를 재분류했다며 온라인에 부분공개로 올려놨던 탐사 프로젝트 관련 자료 일부를 비공개로 전환했다. 정부가 이미 정치의 영역으로 넘어간 영일만 앞 심해 석유 탐사·개발을 다시 과학의 영역으로 되돌려 놓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과학적 논의의 출발점인 기본적인 데이터부터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박희창 경제부 차장 ramblas@donga.com}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시행을 놓고 두 번째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1년 4개월 전 막을 내렸던 첫 번째 판에서 ‘2년 유예’를 관철시켰던 정부와 여당은 이번에는 폐지를 들고나왔다. 대통령이 연초부터 직접 나서 공식화한 목표다. 반대편에 선 야당은 그때처럼 “예정대로 시행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그사이 국회의원을 다시 뽑았지만 여소야대는 똑같다. 폐지는 법을 고쳐야 해 야당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국회와 정부 안팎에선 둘 다 한 발씩 물러나 금투세 시행이 한 번 더 유예될 수 있다는 말들이 나온다. 물론 아직까진 양쪽 다 유예에 선을 긋고 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최근 금투세 시행 유예에 대해 “비겁한 결정”이라며 “정부 입장은 변함이 없다”고 했다. 더불어민주당 진성준 정책위의장도 “유예든 폐지든 금투세 시행을 미뤄 부자들 세금을 걷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예정대로 2025년부터 금투세가 차질 없이 시행되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첫 번째 판에서도 정부·여당과 야당은 합의 직전까지 내내 평행선을 달렸다. 두 번째 줄다리기는 언제쯤 끝날까. 앞선 판을 복기해 보는 것이 한 방법이다. 정부는 2022년 9월 금투세 시행 일자를 2023년 1월 1일에서 2025년 1월 1일로 바꾸는 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후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확실하게 시행이 미뤄진 건 그해 12월 23일로 시행 딱 9일 전이었다. 정부 관계자는 “이번에도 9월 정기국회가 시작되면 그때 상황을 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 첫 번째 줄다리기 때처럼 다른 세제 개편 사항이나 내년 예산안 쟁점들과 얽히면 협상용 카드로 쓰이며 올 연말까지 결론이 안 날 수 있는 것이다. 개인투자자들은 속이 탄다. 30대 직장인 A 씨는 “다들 금투세가 시행되면 국내 증시가 폭락할 것이라고 해서 국내 주식을 정리하고 미국 주식으로 넘어가야 하는지 고민”이라고 했다. 금투세는 주식, 펀드 등에 투자해 번 돈이 1년에 5000만 원을 넘으면 수익의 20∼25%를 세금으로 내는 구조다. 실제로 세금 부담이 커진 큰손들이 국내 증시에서 빠져나가면 악영향이 불가피하다. 채권에 투자하는 이들은 더 문제다. 현재 채권 자본차익(매매차익)에 대해선 세금을 물리지 않는데, 금투세가 시행되면 자본차익이 250만 원만 넘어가도 세금을 내야 한다. 시행에 맞춰 돈을 쓴 곳들도 속이 타긴 매한가지다. 금투세 도입이 결정된 2020년 말부터 3년 동안 국내 10개 증권사가 컨설팅비와 전산 구축비 등으로 투입한 비용만 총 450억 원이라고 한다. 금투세를 걷는 방법 중 하나가 원천징수기 때문에 증권사들은 관련 전산 시스템 등을 개발, 구축해야 한다. 국세청도 금투세 과세를 위한 시스템을 만드는 데 이미 230억 원을 썼다. 첫 번째 줄다리기가 한창일 때 한 자본시장 전문가가 했던 말이 있다. “정치 상황에 따라 여야 합의로 통과된 법안마저 쉽게 뒤집힌다면 외국인투자가들은 ‘한국 정책은 예측 가능성이 없고 불안정성이 높다’고 여길 수 있어요.” 다시 되풀이된 금투세 뒤집기는 예측 가능성이 없는 국내 정책을 또 한 번 확인시켜줬다. 연말까지 질질 끌지 않고 빠르게 결판을 짓는 게 그나마 남은 신뢰를 지키는 길임을 정부도 여야도 기억해야 한다. 박희창 경제부 차장 ramblas@donga.com}
웹툰 작가가 처음으로 초등학생 장래 희망 ‘톱 10’에 든 건 4년 전이었다. 11위로 밀려났던 2021년을 제외하곤 지난해까지 계속 10위였다. 자유롭게 일하면서 경제적으로 자립도 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일 것이다. 실제로 최근 1년 내에 연재를 한 적이 있는 웹툰 작가의 연간 총수입은 평균 6477만 원(2023년 웹툰 작가 실태조사)이었다. 지난주 정부가 청년 친화 서비스 업종을 육성하겠다며 내놓은 방안에 웹툰 작가 지원책을 담은 건 일견 그럴듯해 보였다. 그러나 내용을 짚어볼수록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지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첫 번째 정책과제로 내건 ‘웹툰 표준계약서 고도화’는 창작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작업이다. 계약을 맺을 때 표준계약서 양식을 사용하지 않는 웹툰 작가의 비율은 지난해 절반이 넘었다. 2021년에는 이 비율이 25%에 그쳤다. 하지만 활용도를 어떻게 높이겠다는 건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정부 관계자는 “표준계약서를 사용하지 않는 원인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상황”이라고 했다. 표준계약서 활용도 점검만 고도화 대책 중 하나로 담아놨다. 하지만 활용도는 이미 매년 하고 있는 웹툰 작가 실태조사를 통해 확인하고 있다. 고도화는 단지 계약서 조항을 손보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표준계약서 활용도가 떨어지는 건 웹툰 작가들이 계약을 맺는 플랫폼 기업 등보다 협상력이 낮은 탓도 있는데, 이에 대해선 아무런 내용이 없다. 심지어 지난해 표준계약서를 모른다는 웹툰 작가의 비율은 33%로 전년보다 4.6%포인트 늘었다. “활용도가 낮은 이유 분석이 필요하다”는 말은 대책을 발표하기 전에 내부 회의에서 할 말이다. 정부는 웹툰 작가의 정신건강 진단 및 관리도 지원하기로 했다. ‘웹 콘텐츠 창작자는 온라인 플랫폼의 악성 댓글, 비난성 의견 등에 자주 노출돼 정신질환 위험이 우려된다.’ 정부가 자료에서 설명한 심리상담 지원 강화의 이유다. 웹툰 작가의 77%가 댓글로 작품에 대한 비난을 받은 경험이 있다는 조사 결과도 함께 달아놨다. 하나의 직업군을 정신질환 위험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근거로는 충분치 않다. 웹툰 분야의 취업과 창업을 활성화하겠다는 목표와도 어떻게 연결되는지 의아하다. 수많은 청년 친화 서비스 업종 중 웹툰을 비롯한 웹 콘텐츠 분야를 선정하게 된 과정 자체도 의문이 남는다. 정부는 기획재정부 청년보좌역, 2030자문단 등이 제출한 의견을 바탕으로 선정 기준에 부합하는 업종 후보군을 뽑아 선정했다고 했다. 청년보좌역과 1, 2기 2030자문단을 모두 합하면 40여 명이다. 40여 명의 목소리가 후보군을 도출하는 출발점이었던 셈이다. 이야기를 들은 방식도 “비공식적인 편한 자리”였다. 올 들어 정부가 내놓은 정책들이 4·10총선용이라는 건 새삼스럽지도 않다. 하지만 ‘청년’ 같은 키워드만 있고 구체적인 방법론은 없는 정책들까지 계속 급하게 발표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포장은 번지르르한데 ‘보여주기’에 그쳐 실효성은 기대조차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집권 3년 차면 이런저런 무성의한 정책들보단 정부 조직 정점에 있는 대통령실의 말이나 행동 하나에 표심이 더 크게 왔다갔다 한다는 걸 알 때도 됐다.박희창 경제부 차장 ramblas@donga.com}
“그게 표에 도움이 돼요?” 한 여당 의원은 ‘플랫폼 공정경쟁 촉진법’(플랫폼 경촉법)을 두고 이같이 평가했다. 그의 말에서 공정거래위원회가 법 제정을 돌연 무기한 연기한 이유 중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당초 공정위는 의원 입법 형식으로 빠르게 법 제정에 나설 예정이었다. 하지만 여권에선 정보기술(IT) 업계가 강하게 반발하는 만큼 굳이 논란을 키워 4월 총선 표를 깎아 먹을 필요는 없다고 본 것이다. 플랫폼 경촉법과 달리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등 표를 얻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된 법안들은 이미 여당 의원들이 발의를 마쳤다. 플랫폼 경촉법은 공정위가 “법 제정이 늦어지면 역사의 죄인이 될 것 같다”고 했던 법이다. 네이버나 카카오 같은 소수의 공룡 플랫폼 기업을 ‘지배적 사업자’로 미리 지정하고 끼워팔기 등 불공정 행위를 금지하는 게 핵심이다. 일부 기업이 시장에서 경쟁자를 몰아내기 위해 해온 반칙들을 사전에 방지해 부당하게 독점력을 키우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정위는 법의 기본 뼈대인 지배적 사업자 사전 지정 제도도 원점에서 재검토하기로 했다. 공정위는 법 제정 자체를 백지화하는 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폐지 수순을 밟는 것 아니냐는 일각의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정부 내에서도 디테일에 대해선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정인교 통상교섭본부장은 15일 “플랫폼 경촉법과 관련해 주요 파트너들이 공식, 비공식 우려 사항을 제기하고 있다”며 “통상 마찰이 발생하는 것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국내 규제가 통상 문제가 돼 한국의 통상 정책 역량이 떨어지는 문제를 지적하며 플랫폼 경촉법을 예로 들었다. 플랫폼 경촉법을 둘러싸고 통상 마찰 우려가 커지는 건 운영체제(OS) 시장을 과점하고 있는 구글, 애플 등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지배적 사업자로 지정될 가능성이 큰 탓이다. 미 재계를 대변하는 미 상공회의소는 플랫폼 경촉법에 대해 무역 합의를 위반할 수 있다며 공개 반대에 나섰다. ‘트럼프 2기’가 들어설 경우 유력한 국무장관 후보로 꼽히는 로버트 오브라이언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미국엔 손해이고 중국 공산당에는 선물”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플랫폼 경촉법에서 금지하게 될 불공정 행위들은 현행법으로도 제재할 수 있다. 그런데도 공정위가 별도 법 제정 추진에 나선 데는 이미 강화된 독점력을 되돌릴 수 없을 때 제재가 이뤄져 실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쟁사인 ‘원스토어’에 게임사들이 게임을 출시하지 못하도록 한 구글에 대한 제재는 공정위 조사 개시 이후 5년 만에 이뤄졌다. 구글은 421억 원의 과징금을 물었지만 경쟁사 제거 비용치고는 적다는 말들이 나온다.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는 시장을 만들기 위해선 필요한 법인 셈이다. 공정위는 플랫폼 경촉법 제정을 공식화한 이후에도 두 달 가까이 법안의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지배적 사업자를 지정하는 구체적인 기준과 금지되는 행위를 했을 때 적용되는 제재는 정부만 알고 있다. 다시 의견 수렴을 거치게 된 참에 정부안을 명확히 밝혀 ‘깜깜이 입법’ 논란부터 걷어내야 한다. 그것이 업계와 국회를 설득하고 통상 마찰 우려를 해소해 크게 꺾인 법 추진 동력을 다시 살려내는 출발점이다.박희창 경제부 차장 ramblas@donga.com}